참된 행복
-김석영 수사-
세 상에는 ‘행복지수’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그 사회 또는 국가에서 몇 퍼센트인지를 표시한 숫자다. 사회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스리랑카나 인도, 방글라데시처럼 가난한 나라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는 물론 복지의 천국이라는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고 한다.
내가 ‘행복’이라는 말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해 본 것은 중학교 시절 어느 방학이었다. 그때 내가 행복을 하도 절실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무렵 나는 며칠째 계속해서 가족과 함께 보리 베는 일을 하고 있었고, 더위와 중노동에 지친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 행복을 생각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었다. ‘청주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라디오나 들으며 시원한 방에서 뒹굴며 쉬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 우리 외갓집은 별로 잘사는 것도 아니었고, 라디오 들을 때도 온갖 이웃 전파의 혼신과 함께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뒤에 제 몸통만 한 건전지를 고무줄로 묶어놓은 트랜지스터라디오였다. 나는 지금 그때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이 쾌적한 집 안에서, 성능 좋은 오디오로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지만, ‘지금 나는 행복한가?’ 자문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의 조건은 세속적인 가치관의 전도, 다른 말로 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내적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지금 내가 찾는 행복은 무엇인지, 내 삶의 내적 태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하루이기를 바란다
-조명연신부-
요 즘 아이들이 무섭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폭력적인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묻지마 폭행을 비롯해서,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들은 정말로 가까이 가기 싫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장차 사제가 되겠다고 말하는 예비신학생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요즘 아이들과 다를 것 같지만, 그렇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어 제 예비신학생 모임이 있었습니다. 예비신학생 지도자들에게도 욕을 하는 아이가 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는 학생도 있더군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인상을 써 버리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다 되면 행복할까요? 욕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행복해질까요?
이 세상은 나 중심으로 진행되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 함께 흘러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을 살고 있는 이들이 바로 자기 자신만이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구만 채워지면 그만이라는 생각,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자기에게 감히 충고할 수 없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더욱 더 마음이 피폐해지면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과 집착이 나를 긴장하게 하고 때로는 낙심하게 하여 더욱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렇다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행복 선언을 예수님께서는 이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슬퍼하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하신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기준만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인간적인 기준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첫째, 내게 없는 것을 보려하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려하십시오.
둘째, 행복을 먼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내 곁에 있는 행복을 찾으려 하십시오.
셋째,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변 사람들이 바뀌어야 행복한 것이 아닌, 내 마음이 바뀔 때 가장 쉽게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만 실천한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에 해당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만 있어도 번뇌는 훨씬 줄어든다(법륜).
행복하세요
이 세상을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야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인지할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 제 예비신학생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속상한 마음을 간직하고 밖에 나갔는데, 다른 예비신학생이 저를 보더니 밝고 큰 소리로 “신부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안 좋은 기분이 이 인사 한 마디로 그냥 기분이 좋아지며 행복해집니다.
지난달 예비신학생 모임 때 큰 수술을 받으신 아버지께서 이번 예비신학생 모임 때에는 함께 미사를 봉헌할 정도로 많이 좋아지셨지요. 이것 역시 큰 행복입니다.
모임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뒤, 피곤해서 그냥 방바닥에 엎드려 저도 모르게 잠들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깨어났을 때, 얼마나 개운했는지 모릅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며 찾으면 너무나도 많은 행복이 내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라고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행복을 찾으십시오.
“마음이 가난하다.”
-김대열신부-
무엇을 두고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일까?
쉽게 생각해서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상처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에 나와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즐거움도 있다.
삶이 깊어갈 수록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인생의 덧없음이다.
덧없음의 체험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지만, 그 중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관계에서 나오는 상처가 아닐까?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도, 우정도, 의리도 시간과 함께 퇴색하고 마는 것을 부정할 이 있을까?
물론 강하게 묶인 사랑도 있고 우정도 있고 의리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처음과 같지 않음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상처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 의한 상처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안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이란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결국 의지해야만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느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허락되는 마음이 아닐까?
서로 등을 돌리고 서로 피해자임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처의 악순환.
무엇보다도 내 안에 발견되는 반복음적 삶을 부정할 수 없음에 “내가 의지하고 향할 분은
오직 하느님 당신 밖에 없나이다.”라는 고백이 가능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일 아닐까?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면, 자신이 마음이 가난한 자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차지하고 계신가를 보아야 한다.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가?
얼마나 그분께서 당신이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그분께 얼마나 의지하는가?
그분의 말씀이 당신에게 어떤 행복을 주고 있는가?
세상을 그분의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을 해보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곱씹고 곱씹어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어쩌면 무척 쉬운 일인데,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우리는 하지를 못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체험하는 것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님을 고백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전삼용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행복에 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슬퍼하면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조건 슬퍼하면 다 위로를 주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골의사’ 박경철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슬퍼한다는 것이 바로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죠. 4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위암이 온 몸에 전이된 상태였습니다. 그 환자의 남편은 죽었고, 시댁식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본인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어떡합니까.” 하더라고요.
사망을 앞두고 며칠 동안은 아이들이 학교를 안가고 병원을 왔는데 항상 그 자세였어요.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셋이서 서서 있었죠.
우리들 중 하나가 돌아가면서 그 병실에서 아이들을 데려와서 같이 라면을 먹고는 했었어요. 하지만 이건 사실 특별한 선의는 아니었어요. 특별한 선의였다면 제 시간에 제 돈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주었겠죠. 하지만 제약회사에서 가져온 라면을, 인턴이 만들어 놓은 라면을 같이 먹었었죠.
후륵 후르륵 먹으면서 아이들한테 이런 저런 대화를 했었을 거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아이들에게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도 힘들었다’ 뭐 이런 얘기를 했었나 봅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했었나 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제가 사실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에 의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의 엄마인 환자는 거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의사가 할 일은 사망 실시간이 임박하면 사망확인하고 시간 기록하고 진단서 쓰는 게 다입니다. 간호사한테 정말로 연락이 왔어요.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저와 간호사는 서 있었죠. 두 세 차례 사인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면서 심전도가 멈췄는데 아이들은 또 예의 그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죠. 이후의 상황은 대충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울부짖고, 간호사들이 떼어내고, 영안실에서 와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로 데려가고..
저는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보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모르나 보다. 그래서 한 잠시 일분 기다렸어요. 그러다 아이의 어깨를 눌렀더니 엄마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봤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더라고요. 돌아가신 것을 아는 거였더라고요.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서 있는데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서서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아요. 그리고는 엄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사랑해요.. !’ 하고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사랑해요..' 라는 말 안에는 떠나는 엄마에 대한 송별사 일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죠. 저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맡았던 환자가 하루에 5명이 돌아가신 적이 있었어요. 인간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위? 돈? 그가 누구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하는 단어가 바로 ‘손’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진짜 내 마지막 순간에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이죠.
근데 십여 년이 지나서.. 간호사가 하루는 신부님이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피 흘리는 신부님이 오셨나 보구나 했습니다. 제가 안동에서는 항문외과의로는 아주 유명해서 사실 경상도 지역 전체에서 거의 손꼽을 정도거든요. 신부님들이 보통 손님으로 위장해서 치료받으러 오시는데 그런 분이신가 하고 문을 열고 나가니 손님의 얼굴에 아우라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람의 얼굴의 빛깔과 때깔은 다르잖아요? 때깔은 돼지처럼 먹고, 색조 화장품을 바르면 좋아 집니다. 하지만 빛깔은 습관, 태도, 사고, 삶의 방식들이 지금까지 내 얼굴에 반영되어 반죽으로 나온 겁니다. 그 사람의 아우라는 사실상 그 사람에게 나쁜 습관, 나쁜 태도, 나쁜 성향이 거의 없었다는 얘깁니다. 놀라서 제가 ‘누구십니까’ 했더니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 고등학생이 저랍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혹시나 잘못한 게 있나 뜨끔 하더라고요. (웃음)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눠보았더니 여동생은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오누이가 곱게 잘 자랐죠.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겨진 아이들이 혹시나 잘못되면 어떡할까 하고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저는 제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 말씀이 두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어요. 제가 멋있는 말을 했구나 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생각을 했더니, 반대로 누군가를 절벽에서 밀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그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급은 위로만 올라가야 하고, 내가 많은 사람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하고, 그 힘은 점점 더 세져야 하죠. 하지만 영향력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영향력은 반드시 선한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박경철씨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그 위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항상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지금은 슬퍼할지라도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위로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으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다면 그런 위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듯한 마음을 가집시다. 함께 울어주어야 할 때가 많이 있겠지만 그만큼 위로도 많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