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레이와·일본'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재주목', 설마 '복간'한 '환상의 정치본'이 밝힌 '사이고 다카모리'의 '알 수 없는 진실'…! / 9/24(화) / 현대 비즈니스
9월 24일은 '유신의 삼걸'의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서남전쟁(1877년 2~9월)에서 정부군에 패해 자결한 날이다.
세이난 전쟁을 둘러싸고는, 제개혁에 수반해 특권을 빼앗긴 불평 사족이 일으킨 난으로서 자리 매김하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이 설을 「논외」라고 일도양단으로 하는 것은 보수계 유튜버이자 정치학자인 이와타 아츠시 씨다.
이와타 씨가 학창시절에 간행해 최근 20년 만에 복간된 화제의 책 『[신판] 일본인의 역사철학』(산케이신문 출판)은 사이고의 사상과 행동을 읽어내면서 사이고가 결단한 거병의 진상을 파헤친다.
사람들의 정신이 생동하는 역사관과 일본인의 역사철학을 제시하는 '환상의 명저'에서 일부 발췌·재구성해 전달한다.
◇ 냉철하고 피가 통하지 않는 유물 사관
우선 일반적인 설로는 폐도령·봉록의 정지로 인해 불만을 가진 불평사족이 일으킨 난으로 서남전쟁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있다.
이 학설에는 유물사관 정신의 빈곤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사람을 사물과 권리로만 바라보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역동, 고동을 느낄 수 없는 냉철하고 피가 통하지 않는 사관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요구하는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논외라고 밖에 형용할 수 없다.
이어 취해지는 설은 서고가 제자들의 폭발을 억제하지 못해 우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설이다.
사이고는 단지 제자들의 정의를 위해 필패의 전쟁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는 것이 이 설이다. 그렇지만, 이 설은 중대한 점을 간과해 버리고 있다. 그것은 만약 필패로 불필요한 전쟁이라면 수많은 문하생들, 그리고 장래의 일본을 담당할 관군을 대대적으로 격돌시키지 않더라도 사이고가 극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관군에게 칼을 빼들면 된다.
하지만, 사이고는 관군에 대해 철저하게 항전해, 부하에게도 감투를 명하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부하를 사랑하고 일본을 사랑한 사이고가 자신의 길동무를 위해 젊은 유능한 목숨을 희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병에 이른 깊은 슬픔과 분노
예기치 못한 정부의 사이고 암살 계획의 이슬견, 그리고 자제에 의한 해군 조선소에 부속된 화약고의 탄약 약탈…. 사이고가 거병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은 절절하게 전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거병의 대의가 아닐까.
물론 정부가 사이고 암살을 명령한 것은 논외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관물 약탈해도 충분한 죄이다. 암살사건과 관물약탈의 두 죄를 눈앞에 둔 사이고가 스스로를 원고라고 해도 피고 스승의 입장을 무시하고 거병했다니 논리 전개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고가 원고였다고 해도 피고의 스승임을 사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애초에 어느 쪽이 원고이고 피고라는 이원론적인 명제 속에 사이고 거병의 이유를 구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보통사람이라면 반드시 스스로를 원고의 입장에 두고, 상대를 피고로서 서로 다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이고우 정도의 영웅이다. 거병의 대의를 더욱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까.
부하로부터 사이고 자신의 암살 계획과 제자에 의한 관물 약탈을 들은 사이고는 자신이 암살당하고 제자와 함께 쌓아 올린 병학교가 궤멸할 미래를 예견했을 것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문명국간의 제휴의 꿈은 무너졌고,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생명도 메이지 정부는 노리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가리기도 전에 이 일본을 서양화시켜 정신적으로 망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여기에 사이고는 슬퍼하고 분노하여 마음속 깊이 기약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거병에 이른 것이 아닌가.
즉 서향의 거병이야말로 서향의 사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사이고의 거병은 단순한 우연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서고의 사상을 그 근저에 두는 것이다.
정한 논쟁 때도 마찬가지지만 사이고는 일관되게 서양 근대라는 것의 본질을 잃지 않았다. 유신을 이룬 일본이 맹목적으로 서양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본래 가야 할 길을 그르친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 이대로는 나라가 망한다, 그것이야말로 하야한 이래의 사이고의 진의였던 것은 아닐까. 제자의 폭발과 암살 계획을 눈앞에 둔 채 국가의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다는 진심 어린 애국의 지정이 불타오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이고 거병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관군측・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권고를 거부한 이유
후세 국민에게 감투의 기억을 남김으로써 수직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지켜낸다.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더라도 국가라는 수직적 공동체를 지키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이고의 사상이자 일본인의 역사철학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이고는 끝까지 싸우는 길을 택한다. 왜냐하면 이 철저항전인 모습이야말로 요긴하기 때문이다. 서툴지만 철저하게 서양 근대에 맞서 싸워낸 기억을 가진 국민과 가지지 못한 국민 사이에는 자연히 그 미래의 차이가 분명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패의 투쟁을 시도한 것이다.
서남전쟁 말기, 서향이 성산에 농성했을 때, 관군측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고에게 "한시라도 빨리 다시 생각하기를 갈망한다. 하나는 이 거병이 귀군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하나는 양군의 사상자를 더 이상 내지 않기 위해. 귀군만 다시 생각하면 군사도 싸움을 멈추는 것입니다라는 서한을 보냈다. 서고가 자인함으로써 휘하의 목숨을 걸게 하는 길을 택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사이고가 제자들의 폭발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 정의에서만 서남전쟁을 일으켰다면 사이고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혹은 산현이 지적한 것처럼 '사쓰마의 군대는 사이고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었다면 사이고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고의 거병의 대의는 거기에 없다. 있는 것은 순국의 지정뿐이다. 그러므로 이 권고에 서고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중략) 이 성을 사지(死地)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지금 더욱 분발하고, 후세에 치욕을 남기지 않도록 각오하고 싸우도록".
이것이 서고의 절필이다.
사이고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싸워냄으로써 후세의 국민에게 감투의 기억과 무언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그 모습을 국가 역사에 새기고 후세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것. 여기에는 대동아전쟁 때 특공대의 철학과 비슷한 역사철학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연재 기사 「설마"복간"으로 대주목, 「충격의 정치 책」이 묻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왜인지 말할 수 없는"일본의 최대 문제"의 대단한 내용…!」에서는, 어째서인지 지금 일본 정치에서 말할 수 없는 「일본의 문제」에 대해 리포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