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여 728
최명선
그리움을 그리워 하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워 하다가
눈물을 눈물겨워 하다가
허무를 다만 허무해 하다가
아무래도 내 생의 갈피를
접어얄것 같으니
그리운 이여,
그리하거든
나의 얼굴
나의 몸짓
나의 말투
모두다 지우고
울림으로 감지 되었던
떨림만을 기억해 주시게나
내가 그대의 이름을 지우고
그대의 목소리를 지우고
순살의 떨림으로 오던
작은 울림만으로도
이 생 내내 벅차 울듯이
그 울음만으로도 황송하듯이
행복 하듯이
그리운 이여
내 그리운 이여
그대도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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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집 (기억,그 따듯하고 쓰린)
최명선님의 詩集 [기억, 그 따뜻하고 쓰린]입니다
일독을 권하며 동인의 소식을 전합니다.
(시선사 02-938-1577.6000원
서울 교보문고를 포함한 전국 서점
동도 최명선詩人(1953~.속초.여)이 오랜 産苦 끝에
시집 [기억, 그 따듯하고 쓰린]이
[시선사]에 의해 나왔다.
최명선 시인은 최명길.이성선 문하에서
오랫동안 시문학습작활동을 하고
30년을 넘게 습작한, 詩人임을 드러내지않는, 겸손한 분
1987년 전국 신사임당 백일장 차상/1990 강원여성 주부백일장 시부문에 입상 하였고
[詩.촛농]이 대구신문[시창]에 추천(서지월시인 추천) 되었으며
최고의 문학권위사이트인 온라인 문학사이트인 시사랑사람들(대표시인 우당김지향 교수)
의 2002년도 우수문학작품選]者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인들의 권유로 기억, 그 따뜻하고 쓰린"을 모아
"기억, 그 따뜻하고 쓰린"을 펴냈다. (시평 김점용詩人이 평론)
시인의 기억은
시편 60수 한 수 한 수에 그 따듯하고 쓰린 인자의 심성이
우리들 심연의 발걸음을 뒤척이게 하고는,
맑음이 정으로 맑아, 스스로 드러눕지 못하는 나의 살곶이에
세상의 이치를 새기는 경經의 典으로 계신다
"가뭇없이 사라진 저녁
눈 닫고 귀 닫고
마음에 들다..어느 맑으신 님이 시 님을 읽고 있었으니,
최명선 님의 詩集 [기억, 그 따뜻하고 쓰린]이다
--동인 대표,이민영李旻影(1953~.시인)
....................................................
욕망의 연금술-최명선시집 해설/김점용
평론가 김점용시인 (경남통영출생. 서울시립대 대학원.『문학과사회』시발표 등단)
“옛날 공부하던 사람은 자기를 위해 했으나,
지금 공부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한다.”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장기근의 역주에 의하면 이는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옛날의 공부하던 사람은 자기 수양(즉 자신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기 위해서)을
위해서 했으나,
오늘의 공부하는 사람은 남에게 보이고
팔리기 위해(즉 등용되기 위해서)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무리는 있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보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 듯하다.
‘신지식인’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모든 공부를
경제적 이해득실의 잣대로 가늠하려 든다.
게다가 누가 논문을 얼마나 많이 썼느냐를 둘러싼 숫자놀음이나 학점 따기,
점수 경쟁을 들여다보면 그 바닥의 척박함에 달리 손 쓸 길이 없어 보인다.
안타깝게도 공부 중의 공부,
모든 공부를 통틀어 으뜸이라는 시 쓰기마저 그렇게 변해간다.
자기 수양과는 상관없이 세상이 주목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파편적인 이미지를 숨가쁘게 나열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야 새롭고 참신한 시를 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답답하고 슬픈 일이다. 세월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졌으니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시를 담는 그릇이나 내용물은 변할지언정 그 태도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미적 현대성 운운하며 전체적인 시의 기율이 미메시스보다 카타르시스로 기울었다고
하지만 승화를 동반한 카타르시스와,
단순 배설 혹은 말장난을 구분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자본의 코드가
삶의 질을 바꿔 놓는다 하여도
본질만은 변하지 않지
- 「이면지 앞에서」 부분
서두가 다소 길었지만 필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위 시를 비롯해서
최명선의 첫 시집 원고를 통독하고 나서였다.
거기에는 얄팍한 제스처로 세인의 주목을 받으려는
개인적 욕심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크고 작은 내적 욕망들을 기어코 다스리려는 어떤 극진함이 배어 있었다.
시 쓰기가 자신의 마음공부,
곧 자기 수양이라는 태도가 역력했던 것이다.
그의 시편들에는 타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더불어
자기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한과 연민도 짙게 스며 있었지만,
자기 안에서 내밀하게 치솟는 주체의 욕망에 대한 정직한 응시와 갈등이
더욱 진하게 부각되어 있었다. 그 표정은 때론 유쾌했고,
때론 위험했으며, 때론 안쓰러웠다.
잘라낸 관능
그 메마른 오관마다
붉은 꽃물 돌게 하는
돌게 하고야 마는,
먼 길 돌아온 한 사내의
은밀한 애무여
잔인한 봄밤의 뜨거운 방사여
- 「프란체스카를 위하여·1 - 봄비, 그 잔인한」 전문
우선은 유쾌하다. 특히 “뜨거운 방사”가 갖는 중의적 의미는
부제의 “봄비”와 겹쳐지면서 독자의 상상력에 야릇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한밤에 온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내리는 봄비를 매우 에로틱한 풍경으로 포착해낸
이 작품은,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는, 성적 상상력을 통해 생명수로 내리는 봄비를 하늘과 땅의 에로티시즘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자연 생명의 힘에 대한 경탄이나 만물이 깨어나는
우주적 순환의 한 순간을 묘파해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수작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그렇게만 보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분명히 있다.
앞서 말한 식으로 이해하기엔 “잘라낸 관능”과 “잔인한 봄밤”이 개운치 못하고,
시의 제목이 주는 무거운 분위기도 쉽게 떨쳐내기 힘들다.
좀 더 기민한 독자라면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어떤 욕망의 억눌림,
혹은 비극적 사랑의 후렴구가 숨어 있는 듯하다.
우선 “잘라낸 관능”은, 얼핏 보기엔 겨울에 가지치기를 한 나무를 연상시키지만,
제목의 ‘프란체스카’와 연결되면 자의든 타의든 관능을 제지당하거나
억압당한 모습으로 읽힌다. “잔인한 봄밤” 역시 마찬가지다.
외국 시인의 전언을 빌어 “잔인한 4월”로 쉽게 이해되는 듯하지만 부제인
‘봄비, 그 잔인한’과 맥을 이어 놓고 보면 그 뜻이 전혀 달라진다.
“그”라는 지시대명사가 말해주듯 대지와 뜨거운 방사를 치르는 봄비 자체가 잔인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짚어 읽으면 결국 ‘프란체스카’는 “잔인한 봄밤의 뜨거운 방사”에서
소외된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필자의 우문에다 별도의 설명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
그는 수도원에서 구도중인 수녀일 수도 있고,
시동생을 사랑한 비극의 여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프란체스카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가 닿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
다른 시에 기대면 그 주체는 “베란다 창틀에 갇혀”
“제 설움 곱게 삭여”(「사과분재 앞에서」)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입구를 봉쇄당한 음성音聲역”(「어쩌겠어요」)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시적 언어가 지닌 모호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제목의 그가 누구인지
굳이 규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시가,
생명 에너지의 뜨거운 관능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관능을 억압해야 하는 한 존재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동시에 껴안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한밤중의 “뜨거운 방사” 이면에는 스스로 달아오른 관능을
내리는 봄비에 저 홀로 식혀야 하는 시적 주체의 놀라운 아이러니가 들어 있는 셈이다.
독자가 이 시에서 승화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듯 뛰어난 예술 작품에는 대극의 힘이 맞물려 있다.
그것이 작품에 긴장과 활력을 부여한다.
눈물 속에는 별빛이 돋고, 희열 뒤에는 반드시 죄가 따르는 법 아닌가.
그 점에서 최명선의 시는 두 힘의 균형을 아슬아슬 잘 유지하고 있다.
균형이 깨졌다 싶으면 이내 한가운데로 돌아가 두 힘 사이에서 씨름을 벌인다.
泥水와 離水 사이,
날개도 없이 비상을 꿈꾸다
利水라는 환승역을 놓쳤습니다
먼지 이는 소로에서 문득 뒤돌아보니
그 역이 내 삶을 바꿔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환승역은 아니었을까
여기 저기 막힌 물꼬 시원하게 터 주었을
어쩌면 거기가 내가 놓친
마지막 利水의 비상구는 아니었을까
갈증 같은 환승역, 다시 이수에서 문득
- 「다시 이수역에서」 전문
환승역을 놓쳤다는 것은 이미 균형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을 지나면 오직 한 방향으로의 이동만이 남는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마음은 여전히 “泥水와 離水 사이”의 환승역인
“利水”로 다시 돌아와 두리번거린다.
환승역에서처럼 삶을 갈아탈 수 있다면…. 그때 내 마음의 주소를 바꾸었더라면….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는데….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상념에 시달렸을 것이다. 필자 역시도 그랬다.
지금까지 타고 온 궁상맞고 지리멸렬한 생의 노선을 버리고,
뭔가 짜릿하고 격렬한 생의 비등점으로 갈아타고 싶었다.
가족을, 학교를, 사랑을, 직장을, 국적을, 지구를, 아니 차라리 다른 몸을 입었더라면…,
싶었다. 그래서 화자에게 환승역은 채워질 수 없는 “갈증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목마름이자 허기이고 부재이자 결별이며 틈이고 균열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 말하는 순간 사라지는 침묵처럼 비어 있어야만 균형을 유지하는 것,
채워지는 순간 봉합돼 버리는 무엇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에는 그러한 결절점들이 자주 눈에 띈다.
물음표를 앞세우고 떠나는 날들은
관절 속에 안타까운 울음소릴 박아 놓고
- 「낡은 목선의 비애」 부분
이미 떠나갈 것은 다 떠나가 버린
충만한 공허여,
- 「마른 꽃」 부분
빛이 되지 못한
꽃이 되지 못한
못한, 못한, 절망과 허기로 무성한
잡념의 나무
- 「가지치기, 그 환한」 부분
꽤 고심해서 얻었을 표현인 “관절 속에” 박힌 “안타까운 울음소릴” 들어보라.
그것은 곧 시인의 처연한 속울음이 아니겠는가.
더 이상 멀리 나갈 수 없어 삐걱거리는 용골로 정박한 낡은 목선이나,
생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 버린 마른 꽃,
잡스런 상념을 가지치기 해버린 나무 등은 시인이 시적 자아와 동일시하는 대상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무언가 결핍된 존재들이다.
왜 시인은 유독 이런 대상들에 집착하는 것일까? 앞서 말한 갈증,
허기, 부재, 결별, 틈, 균열 등을 지닌 대상이야말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붐비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갈증은 물을 부르고, 허기는 먹을거리를 찾는다.
부재는 허깨비를 세워두며 결별은 새로운 만남을 기대한다.
틈과 균열도 무엇인가로 메워지고 봉합되기를 기다린다.
이 모두가 욕망을 일으키는 유인들이다.
이들은 결핍 내지 결여의 자질들로서 욕망의 삼투압이 일어나는 숱한 결절점인 셈이다.
다음의 시는 그와 같은 성격을 좀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가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경사로에서 아무도 몰래 어제를 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
들어 본 적 없니? 허옇게 말라가는 꿈의 척추를 날마다 힘겹게 일으켜 세우느니
차라리 어제를 버리고 내일만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 들어 본 적 없니?
절정의 새날 합환식 끝나고 행복이 싹틀 무렵, 양심 한 올 살아나 활을 겨누면
그냥 이렇게만 말하는 거야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급발진
사고였을 뿐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눈물 먼저 흘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고
- 「완전 범죄를 꿈꾸며」 전문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시의 화자도 지금 “욕망의 경사로에서” 갈등하고 있다.
어떻게든 확, 저지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은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인다. ‘낡은 목선’처럼 낡아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마른 꽃’으로 걸려 있을 수만도 없지 않겠는가.
「다시 이수역에서」에서처럼 생을 갈아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왜 그럴까? 앞에서 우리는 희열 뒤에 죄가 온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대목을 두고 한 말 같다. 돌로 눌러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양심” 때문이다. 양가감정처럼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은
늘 짝패로 붙어 다닌다. “아무도 몰래 어제를 밀어 버리고 싶다는”
쾌락 원칙은, “양심 한 올 살아나 활을 겨누”는 현실 원칙 앞에 우리를 불러 세운다.
“눈물 먼저 흘리”게 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어 보지만 참회의 눈물이 먼저
솟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의 삶은 늘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쾌락 원칙과
이를 억제하는 현실 원칙의 길항으로 그 무늬를 짜나간다.
그렇게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정신을 경영해간다.
시인들도 똑같다. 시인들은 대체로 욕망을 실현하는 모습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고 동정을 보낸다.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 그 불가능성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최명선의 시들이 그런 그림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때로는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더 환하게 빛이 될 수 있거든
- 「이면지 앞에서」 부분
에서처럼 시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각별히 주목한다.
더 나아가 오히려 그곳이 “더 환하게 빛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 바닥을 다 써버렸다 해도, 깨끗한 이면지의 한쪽이
남아 있음을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 앞에 아무리 엄중한 현실 원칙이 놓여 있다 해도,
그것을 한 번 뒤집으면 쾌락 원칙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이미 봄비의 뜨거운 방사를 통해서 구체적인 장면을 목도한 바 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욕망을 정직하게 응시하면서
두 힘과 씨름하는 동안, 그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듯하다.
그것은 마치 일정한 도의 경지에 이른 듯 범상치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안경다리 부러져
맨눈 절름거리며 안경점 가는 길
보이는 것 모두 말랑말랑
이쁘기도 하다
모서리 닳아 부드럽고
더 낡아 여유로운
둥근 것들의 따스함이여
흐릿한 것들의 정겨움이여
몇 발자국 뒤에서 보면
수묵 같이 고요하고 담담한 세상사
너무 세세히 읽으려 말고
한쪽 눈 슬쩍 감고 봐도 좋을 일이다
부처 반 눈 뜨고 깨달음 얻듯
가끔은 안경 벗고 봐도 넉넉할 일이다
- 「풍경을 읽다」 전문
상식이지만 우리가 안경을 쓰는 까닭은 바깥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은 안경을 벗고 나서야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말랑말랑/이쁘”게 보인다. 각진 모서리는 부드러워 보이고
흐릿한 것들은 정겨워 보인다. 모든 사물들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세상이
둥글게 보이는 것이다. 노자를 이런 시간을 일러 도(道)의 시간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아침과 저녁을 일컫지만
애써 시간의 개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위 시에서 보듯 “부처가 반 눈 뜨고
깨달음 얻듯”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불가에서도 분별심을 버려야 진아(眞我)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의 본뜻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마치 안경을 쓰고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듯,
명징한 인식의 상태로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의 본뜻은 만물의 경계를 다 지우고,
나와 세상이 하나의 크나큰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늘 각성하고 살라는 뜻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그와 같은 이치를 시적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그들은 세상 만물과의 자리바꿈이 그 누구보다 자유자재하다. 작품 「풍경을 읽다」 는
그러한 경지가 아니고는 얻기 힘든 묘법이다.
그것은 “하얗게, 하얗게 마음을 비우”(「이면지 앞에서」)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다. 더 잘 보겠다는 욕심,
그 분별의 욕망을 버릴 때 세계는 전부 내 것이 된다.
시인이 마음(욕망)을 비우는 과정은 쉼표(,)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인 듯하다.
마침표 속에서 흘러내린 먹물 한 획, 그것은 모천회귀를
위한 삶의 긴 노정이자 내가 지워야 할 이승의 마지막 업이다
-「 , 에 대한 묵상」 전문
짧은 시인데도 불구하고 발상이 참신하고 의미의 진폭 또한 만만찮다.
우선 쉼표의 형태는 자신이 태어난 모천을 향해 수만 킬로미터를 헤엄쳐가는
한 마리 연어를 연상시킨다. 문제는 쉼표의 꼬리,
즉 연어의 꼬리다. 쉼표는 꼬리가 있어야 쉼표로 기능할 수 있다.
꼬리가 없다면 마침표가 되어 버린다. 연어 또한 꼬리가 있어야 동력을 얻고
모천으로 회귀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욕망의 문제를 겹쳐 놓으면 “흘러내린 먹물 한 획”인 꼬리는
곧 욕망의 추진체가 된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그것을
“지워야 할 이승의” “업”으로 여긴다. 익히 알다시피 연어는
모천으로 회귀하여 알을 낳고 죽는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기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시인)에게 모천은 무엇일까?
쉼표가 과정의 표지라면 마침표는 완성의 표지라는 점에서 죽음이나
무덤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불가에서 ‘업’을 닦는다는 것은 참 자아(眞我)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자아의식을 갖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의 화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가는 모천도 아마 ! 그 자리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흘러내린 먹물” 역시 어쭙잖은 지식,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갖게 된 이런저런 분별심으로 독해되어야
온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독법이 결코 과잉 해석이
아님을 우리는 다음 시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마음 닿는 자리마다 스스로 빛 되는,
비워서 가득한 무욕의 생이여
동안거 중인 뼈대 흰 새들이여
앉아서 창천을 나는 겨울나무여
- 「겨울소묘」 부분
그와 같은 모천에 이르면 시인의 말처럼 “앉아서 창천을” 날 수 있다.
죽음도 초월할 수 있다. 삼라만상 속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것이 우리의 놀라운 정신 세계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얻고자 했던 것도
결국엔 금이 아니라 ‘현자의 돌’이었다. 지혜였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무욕의 생”을 살려는 최명선 시인은 무척이나
큰 욕심쟁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욕심이라면 얼마든지 부려도 좋다.
너도나도 자기 욕심 채우느라 세상이 얼마나 팍팍해졌는가.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안간힘이다.
그러느라 마음공부는 항상 뒷전이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전지구적으로
자본주의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그 사정이 한층 심해졌다.
너도나도 돈 되는 쪽만 기웃거린다. 그 점에서 시는 정반대이다.
시는 결코 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자본적 성격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지켜오고, 또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 진정한 시인은 은자(隱者)다.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인용하면서 시인이 새로운 정신적! 도약을
감행할 것을 기대해본다.
서녘 별
가뭇없이 사라진 저녁
눈 닫고 귀 닫고
마음에 들다
물빛 어린 바람
풀잎 위에 감기고
산허리 두어 뼘 밖
안개비 도는 소리
- 「안개비에 부치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