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312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연중 제1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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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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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KDkcFb6xy4
[서울대교구 강철호 세례자 요한(개포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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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1212년 성지주일 아시시의 부호이자 명망가였던 스티피카 공작의 대저택 뒷문으로 신부처럼 단장한 한 젊은 여인이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소성당, 포르지운콜라(Porziuncola, 현재 아시시 천사들의 성모 대성당 내 위치한 소성당)였습니다.
소성당 앞에는 상거지 복장을 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촛불을 들고 마중 나와 그 젊은 여인을 성당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곧 장엄한 기도와 감미로운 성가가 교대로 울려 퍼졌고, 잠시 후 젊은 여인은 제대 앞으로 나왔고, 놀랍게도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습니다.
이른바 세상과 가족을 떠나는 작별 예식이 거행된 것입니다. 여인은 머리에 수건을 둘러썼으며, 세상의 옷을 벗고 소복으로 갈아입었고, 허리는 끈으로 동여매고, 제대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의 정체는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추종하기로 결심했던 스티피 공작의 장녀 클라라였습니다. 포로지운콜라 소성당에 거행된 예식은 클라라가 부모 형제와의 인연을 끊고 프란치스코의 영적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이른바 착복식이었습니다.
이로써 클라라는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제자들 가운데 최초의 여제자가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프란치스코회에 이어 프란치스코 제2회, 다시 말해서 클라라회의 창립자가 된 것입니다.
후에 클라라는 교황 및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당부에 따라 수녀회 총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함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총장이었지만, 스스로를 항상 말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생각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한번은 다른 수녀회를 떠나 클라라 수녀회로 넘어온 한 수녀가 있었습니다. 클라라 수녀는 그녀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대야를 준비하고 물을 떠오고 그녀 발 밑에 엎드렸습니다. 정성껏 뽀독뽀독 그녀의 발을 씻겨준 다음, 그 발에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그녀는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면서 발을 웅크리다가 실수로 클라라 총원장 수녀의 얼굴을 가격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클라라 수녀의 얼굴에는 만만치 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았으면, ‘적당히 해라이~ 가만 좀 있어라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클라라 수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활짝 웃으면서, 다시 그녀의 발을 잡아 부드럽게 친구를 했답니다.
스승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따라 클라라의 가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그 고집은 교황님도 막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클라라와 수녀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당시 교황님은 최소한의 양식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약간의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끝끝내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클라라가 한평생, 혼신의 힘을 다했던 투쟁 가운데 하나가 물질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최소한 다음 날 먹을 양식만이라도 확보해놓으면, 수도공동체는 먹는 것으로부터 걱정을 덜게 되고, 그만큼 더 열심히 관상 생활에 투신할 수 있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의견과 맞서 클라라는 한평생 싸웠습니다. 절대로 내일을 생각하지 않게 했습니다.
클라라에게 있어 내일에 대한 보장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클라라는 언제나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주님의 말씀만 되풀이 해주었습니다.
클라라는 ‘거룩한 가난’과 얼마나 깊이 관계를 맺고 사랑했던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소유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딸들에게도 무엇 하나 가지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들이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그분께만 마음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클라라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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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n1DAUybX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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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입 속의 동전, 그 기이한 기적의 진짜 의미>
오늘 복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셔야 하는데, 그냥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베드로를 바다에 보내 낚시를 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처음 낚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 하나를 찾아, “나와 네 몫으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전능하신 분의 행동치고는 너무 번거롭고,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이런 비효율적인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셔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 슬퍼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수난과 부활에 대한 필연성을 이해시켜야만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잃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세는 누가 낼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다 밑의 물고기 한 마리가 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물고기는 요나의 기적에서처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베드로가 성전,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자격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구원에 이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셨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사에 김익두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원래는 황해도를 주름잡던 악명 높은 주먹대장이었죠.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 뒤, 예전의 그를 알던 사람들이 시비를 걸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모욕을 참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당신들이 알던 주먹대장 김익두는 이미 죽었소. 죽은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주먹을 씁니까?”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신앙을 가졌을 때 이전의 자신은 죽었다고 부고장까지 돌렸다고 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이전의 내가 죽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유익한 분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그분 없으면 구원이 없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필요한 것은 ‘슬기로운 감방 생활’에 대한 유익한 책이 아닙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감옥 문을 열어줄 ‘사면권’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을 변화시킨 것은 ‘앞으로 착하게 살자’는 유익한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죽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거스르는 믿음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혹시 갯벌이나 유사(流沙)에 빠졌을 때 살아나오는 법을 아십니까? 얼마 전 흥미로운 생존법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갯벌에 빠졌을 때, 본능적으로 다리를 빼내려고 허우적거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 주위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져, 펄은 더욱더 강한 힘으로 몸을 빨아들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더 빨리 빠져들어 가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정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몸부림을 멈추고, 차라리 갯벌 위로 편안하게 드러누워야 합니다. 몸의 무게를 펄 전체에 분산시켜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겁니다. 그러면 다리를 옭아매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신기하게도 다리가 스르르 떠오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삼키려는 그 펄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죽은 듯이’ 누울 때, 역설적으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과 우리 신앙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라는 갯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 힘으로 발버둥 칩니다. ‘노력’과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허우적거릴수록, 우리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라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우리가 죄에서 빠져나오게 ‘노력하게 만드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합니다.
만약 갯벌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뭍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칩니다. “거기서 힘을 빼고 드러누우시오!” 여러분, 그 말을 선뜻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비상식적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바로 내 옆에서 똑같이 펄에 빠졌던 사람이, 바로 그 방법으로 살아나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면 어떨까요? “제가 해 봐서 압니다. 저를 믿고, 당신의 몸을 펄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그 죽음을 이겨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이미 죽은 몸으로 사셨습니다. 처음부터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듯이’ 당신을 온전히 성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의 중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죽음의 갯벌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을 당신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만이 죽음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실제적 권능을 지니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만이 '옛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고 그것을 영적 현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하는 일은 작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따름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나중에 순교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은 유익한 조언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죽음이 되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입장료를 “나와 네 몫으로” 대신 지불해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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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녀는 우리가 잘 아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깊은 영적 우정을 나눈 분입니다. 성녀 클라라의 삶을 통해, 또 우리 삶을 통해 ‘좋은 관계’가 큰 선물인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 연구에 얼마나따르면 행복한 사람,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학력이 아니고, 돈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고요, 바로 좋은 인간관계랍니다. 혼자 사는 분 중에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아도, 아플 때 금방 무너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비록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파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잘 버텨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사람을 많이 아는 것보다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합니다. 50대에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은 80대가 되어서도 기억력이 더 좋고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신앙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 그리고 이방인을 사랑하라. 너희도 한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하늘에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고, 낯선 이방인에게도 따뜻하게 옷과 음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깊은 관계, 그리고 이웃과 따뜻한 관계. 이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사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 하시고,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포도나무다. 너희는 가지다.” 우리가 가지로서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녀 클라라, 그분도 관계의 사람입니다. 클라라 성녀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나 귀족 가문의 딸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들은 뒤, 마음이 흔들립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가난한 삶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훨씬 더 기쁘고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을 몰래 빠져나와 밤중에 프란치스코 성인을 찾아갑니다. 그날 프란치스코는 수도자들의 겉옷을 꿰매 만든 간단한 옷을 클라라에게 입혀 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라 줍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이자,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입구였습니다. 그 후 클라라는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자매들과 함께 ‘가난의 수도회’를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형제 공동체를 이끌었다면, 클라라는 자매 공동체를 세워 여성 수도자들이 복음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결코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재물과 권세를 버렸지만, 그녀는 프란치스코와의 깊은 우정, 자매들과의 따뜻한 공동체, 그리고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서 누구보다도 충만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는 관계들, 가족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본당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그 모든 관계는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로 향해 가는 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보다, 하느님 안에서 사람과 깊이 연결되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녀 클라라처럼 하느님과의 깊은 사랑에 머물며, 서로의 삶에 빛이 되어주는 관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전구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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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오늘 독서에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신명 10,16)라는 말씀은 육체의 할례뿐 아니라 마음의 할례까지 강조합니다. 외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경외하며 내적 변화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는]”(10,18)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10,1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은 보호자가 없는 사회적 약자였기에,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관심과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오늘날 가톨릭 사회 교리까지 이어져 옵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세 이야기입니다. 스타테르 한 닢은 그리스 은화로 4드라크마였습니다. 드라크마 한 닢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4드라크마, 곧 스타테르 한 닢은 나흘 치 품삯이면서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성은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고자 일 년에 2드라크마를 내야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바쳐진 공간이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성전의 주인이시지요.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없으신 분께서 당시 사회적 의무에 충실하신 모습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인간의 고통에 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태의연한 정치적 분쟁이나 이기주의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이 시대의 사회적 약자는 누구이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객관적으로 진단해 보고, 문제의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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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22-27: 성전 세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진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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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마태오 17,22-27 (수난과 부활에 관해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이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ㄱ)
(직역: 우리가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되니)
깔보일망정
깔보지 않고
오히려 우러르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빼앗길지언정
빼앗지 않고
오히려 내어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플지언정
아프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짓밟힐지언정
짓밟지 않고
오히려 북돋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쓰러질지언정
쓰러뜨리지 않고
오히려 일으키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버려질지언정
버리지 않고
오히려 보듬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죽을지언정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리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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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종교적 의무’를 실행하셨습니다.>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2-27)
1) ‘성전 세’는 성전 유지를 위해서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입니다.(탈출 30,11-16) 따라서 ‘성전 세’는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종교적 의무’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마태 16,16), ‘성전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마태 12,6). 그래서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라는 점에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세례를 받으신 일과 비슷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3-15)
죄가 없으신 분이니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그 세례를 받으신 것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십자가 수난’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셔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 즉 죄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신 일(대속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앞장서서 걸어가신 속죄의 길”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사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 27절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의 원문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번역은, 예수님께서 현실과 타협하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안 좋은 번역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도,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4)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일은,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서 팔아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돈을 ‘노동의 대가’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고, 또 만일에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으로 성전 세를 낸다면, 또는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5) 어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진 것을 모두 다 바친 그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모두 되돌려 드린다는 그 ‘믿음’과 그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에서 일부만 바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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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요셉 신부님]
<우리는 매일 작은 죽음과 작은 부활을 체험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습니다. 생명이 다한 자연사도 그렇거니와 사고로 인해 맞는 죽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순리처럼 다가오는 죽음을 거역할 수 없기에 그만큼 두려움도 더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신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예수님. 죽음 앞에서 얼마나 많은 번민을 했습니까? 가시관과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두렵기에 피땀을 흘리셨을까요?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다시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이 슬퍼한 까닭에는 스승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의 희망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반을 했으니, 제자들이 슬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죽음과 작은 부활을 체험합니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뜬다는 것이 작은 죽음이며 작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한 번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도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빈손으로 왔던 손에 무엇을 들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생이 사랑만 남기고 가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그 사랑을 품에 안고 하느님 곁으로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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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한 남성이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신부님, 아무도 저를 안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곧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이 남성을 따뜻하게 꼭 안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깜짝 놀란 다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노숙 생활을 오래 해서 온몸에 벼룩이 가득합니다.”
그 뒤 신부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온몸에 가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사랑의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포옹은 분명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벼룩으로 인해 괴로운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옹 자체는 쉽지만, 벼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랑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벼룩’으로 호칭 되는 이유가 붙게 되면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도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로 사랑 자체가 지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에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로 사랑이 지워지고, 나의 행복도 또 기쁨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다.”(마태 17,22)라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퍼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죽음’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부활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통과 시련이지만, 사랑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의 사랑은 배려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세 사건 역시 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처럼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세금인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 성전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세금을 내십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복음 선포가 방해받지 않도록 겸손과 배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보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조건을 붙이고, 나의 욕심을 더하면서 오염된 사랑만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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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는 그때를 준비하여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당신께서 가지신 특권과 자유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사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는 결코 타협이 아니라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혜라 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여라”(마태 10,16)라고 하셨듯이, 당신께서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슬기롭고 순박한 사랑을 성전세로 바치는 또 하나의 모범을 내일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꼴베 성인에게서 봅니다.
그는 성체성사의 삶을 몸소 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에페 5,2)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온몸을 사랑의 성전세로 기꺼이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온몸을 불살라 예수님께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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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산 여인>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오늘 감사송은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걸은 성녀로 칭송합니다. “주님께서는 복된 클라라를 지극히 높은 가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써 세라핌 완덕의 정상에 올리셨나이다.”
그리고 클라라의 가난을 얘기할 때 매우 엄격한 가난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사실 클라라는 가난을 가장 엄격하게 살은 성인 중의 하나이고 가난 면에서는 가난의 대명사요 자신이 가난의 본보기로 삼았던 프란치스코보다도 어쩌면 더 가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클라라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엄격한 가난만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엄격한 가난이지 지극히 높은 가난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클라라가 가난을 엄격하게 준수하였지만 기쁨이 없었다거나, 엄격한 가난을 실천하였지만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산 것이 아니고 그런 가난을 우리는 칭송하지도 따르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클라라의 가난은 우선 관상적 가난이고, 그래서 지극히 높은 가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관상을 위한 가난이지 가난을 위한 가난은 아닙니다.
관상을 위한 가난일 때 우리는 무엇을 소유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치 않는 것이며 그럴 때 봉헌하는 가난이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난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면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애착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무엇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유 이상의 애착이나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되게 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애착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으며 무엇에도 안주치 않음으로써 지극히 높은 가난은 훨훨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고 하느님께 머물게 합니다.
다음으로 지극히 높은 가난은 형제적 가난입니다. 가난하기만 하고 형제애가 없으면 낮은 가난이고, 가난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면 그 가난은 더 낮은 가난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을 보면 재산 때문에 형제끼리 싸우고 갈라서기도 하지만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져 싸우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클라라의 공동체를 보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에 가난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 덕분에 영혼이 풍요로워져 서로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클라라는 가난한 자매들을 가난 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특히 가난 때문에 병약한 자매들을 더욱 사랑으로 돌봤습니다. 이것은 마치 콩 한 쪽도 반으로 나눠 먹는 사랑이고 그래서 애틋합니다,
저는 요즘 같은 더위에 산다미아노 공동체를 생각해봅니다. 좁은 공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는 수도원에 자매들은 많아서 마치 좁은 감방에 열기 때문에 옆 사람이 원수가 되는 그런 일이 산다미아노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클라라와 산다미아노 공동체 자매들은 그러지 않았지요. 그것은 클라라와 자매들이 지극히 높은 가난을 살았기 때문이고 이것이 바로 관상적이고 형제적인 가난을 살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오늘, 에어컨이 없어서 더위에 짜증이 나고 옆 사람이 없었으면 할 때도 더위야,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하며 더위도 관상하고 하느님도 관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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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의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하나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이 임금을 공경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임금 또한 백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임금은 먼저 욕심을 내려놓아야합니다. 하찮은 권력에 눈이 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프고 지친 이들을 친히 안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고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인으로 살면서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해드려야 기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이미 하나라는 이 사실에 기뻐하는 하루 되십시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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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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