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무신론(無神論)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는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실천적 무신론자와 이론적인 무신론자이다. 전자는 불경건한 자들이고, 후자는 이론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교만하며 어리석다고 말씀하고 있다(시 10:4, 14:1).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 무엇이 있다고 논증하기에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만, 없다고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에 갈매기가 있나 없나 토론한다고 할 경우,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천에 가서 바닷가에 갈매기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있다고 하면 증명이 된다.
그러나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고 할 경우, 인천에 가서 다 살펴보니 없다고 해도 목포 앞바다에는 있는지, 부산 앞바다에는 또 있는지 어찌 아는가? 다시 말해서 한국 전토를 동시에 다 돌아보기 전에는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와 달과 별, 온 우주를 다 다녀보고 없다는 증명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악일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는 무신론 강연을 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다가 항해 도중에 대서양 한복판에서 파선을 겪게 되었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그는 널판 한 쪽을 발견하고 거기에 올라탔는데 혼자서가 아니고 기독교 신자와 함께 둘이었다.
대서양의 세찬 물결은 널쪽을 가만 두지 않고 마음대로 동요시키며 둘의 생명을 위협했다. 공포와 굶주림으로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상항에서 신자는 계속 기도했다. 이 때 볼테르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만일 당신이 계시거든 이때에 살려 주소서.”
얼마 후 구조선에 의하여 그는 구출되어 미국에 이르렀다. 그는 해상에서 된 일을 잊은 듯이 열심히 무신론을 강연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해상에서 그의 일은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말했다. “볼테르의 무신론은 육지에서 강하다.”
평생을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을 멸시하고 큰소리치며 살았던 볼테르는 “나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에 가는 구나”라고 처절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무신론자도 야밤중에는 절반쯤은 신은 믿는 법이다. 위기에 처하면 모두가 유신론자가 된다(욘 1:4-5).
2)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단어는 1869년 헉슬리 교수에게서 생겨났다. 헉슬리는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제단을 발견한 것에 주목했다(행 17:23). ‘알지 못하는’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그노스토스(agnostos)라는 말이다. 헉슬리가 만든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나는 모든 것을 안다’라는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말의 반대어이다.
불가지론은 세상의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은 얻기 어렵다는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경험주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회의론자들도 불가지론자들이다. 과학에 있어서의 실증주의와 철학 및 신학에 있어서의 실용주의는 근래에 나타난 대표적인 불가지론이다.
불가지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거짓된 겸양이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이 성경에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 14:9). 불가지론은 신앙과 불신앙의 중간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과학적 회의와 외관 속에 숨기려는 사람들에게 평안한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3) 범신론(汎神論)
범신론은 자연과 초자연, 유한과 무한을 하나의 실체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알지 못하며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 분으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성경은 범신론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성경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과 자연을 구별하고 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곧 우주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4) 다신론(多神論)
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나무와 돌에 경배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타락한 인간의 성품에는 다신론이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이교도의 신들은 헛된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사 41:29).
바울은 그리스의 아덴에 갔을 때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행 17:16). 칼빈은 이에 대하여 “바울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헛된 우상에게 돌리고 있어서 분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체념하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아덴 사람들에 대하여 불경심을 느꼈기 때문에 또 분개했다”고 하였다.
아고라에 있던 우상만 해도 300, 기타 신상은 3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아덴에서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우상을 만나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이방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초대 교회 상황 속에서 무신론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방 신에 대한 강한 부정 때문에 가장 무서운 박해를 받았다.
5) 이원론(二元論)
이 이론은 두 개의 명백하고 나눌 수 있는 실체들, 혹은 원리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신의 세계를 선신과 악신으로 구분하며 사탄과 하나님을 대립되는 존재로 본다. 그러나 사탄도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다(욥 1:12).
페르시야의 조로아스터교에 근원한 기독교 이단인 영지주의와 마니교는 초대 교회를 괴롭혔다. 영지주의자들은 우월적 신과 악의 창조신 데미우즈(Demiurge) 등 두 개의 신들을 가상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구약의 신은 우월적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월적 신은 전적으로 선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신은 우주를 창조한 악의 창조신 데미우즈다. 우월적 신과 데미우즈 사이에는 늘 싸움이 있었다. 선신과 악신의 투쟁이었다. 사람들 가운데서 이 논쟁은 계속되었다. 세린투스(Cerinthus), 바실리데스(Basilides), 발렌티누스(Valentinus), 그리고 말시온(Marcion)이 2세기의 대표적 영지주의자들이다.
마니교의 창시자는 옛 바벨론의 한 종파에서 정장한 마니(Mani)이다. 그는 기독교와 접촉하자 동양의 이원론과 기독교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연결시키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약속된 보혜사로 여겼다. 그는 기독교에서 모든 유대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거기에다가 조로아스터교를 대치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어두움의 나라와 빛의 나라를 예리하게 구분하고 그 두 나라들은 피차간에 영구히 투쟁할 것으로 제시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 여러 해 동안 이 종파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6) 자연신론(自然神論)
범신론이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을 주장한 나머지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을 배격했던 것처럼, 자연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주장한 나머지 하나님의 편재성 혹은 내재성을 배격했다. 자연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는 하셨으나 그 후에는 피조물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도록 함께 하지 아니하며 간섭하지 않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다양한 법칙을 주시고, 어떤 속성을 부여하시고, 다양한 법칙 아래 두신 후 손을 떼셨다. 자연신론은 특별계시, 이적, 섭리를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단지 최초의 원인으로 생각하고 우주 창조 후 우주가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고 사라져 버리는 욕심 없는 ‘시계 제작자’와 같다는 자연신론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