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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2199
시작합니다.
과연 이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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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의 세상>
1215년의 아르메니아 원정은 과감하게 휴전협상을 맺고 군대를 끌고온 룸 셀주크 샤한샤의 기지로 실패했다.
다만 25년 전의 실패보다 개선된 점은, 대 아르메니아의 산악 요새들을 어느 정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이 개선점은 몇년 후 스테파노스의 또다른 아르메니아 원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실권자였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굴시>
예루살렘 왕국의 소년왕 제스퍼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던 굴시 추기경은 프리드리히 2세가 떠난 후 레반트 왕국들을 교황의 영향권으로 넣기 위해 노력했다.
케락 전투에서의 용기와 트리폴리 여공작의 음모를 막은 것으로 왕국 내에서 대단한 위신을 갖고 있는 굴시 추기경은 첫번째 순서로 소년 제스퍼의 교육자로 베이루트 여백작 앨리스 드 브리즈배어를 임명했다.
앨리스 드 브리즈베어는 베이루트 백작의 딸인데 베이루트가 파티마군에게 점령당할 때 정복자의 하렘으로 끌려갈 위기에 처했으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 결과로 그녀는 베이루트의 지배자가 된 에미르의 지하감옥에서 수십년을 보내야했지만 그녀의 신앙심과 육체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다.
십자군이 베이루트를 점령하고 앨리스가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땐 이미 40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녀의 가톨릭 신앙심은 추호의 의심도 할 수 없을만큼 단단했다.
종교와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산 굴시 추기경은 오랜 감옥생활로 생긴 다소의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소년왕의 교육자로 삼았다.
<구호기사단 단장 하프단 에스트리드,
그는 십자군에 참가했던 발데마르 2세의 삼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십자군에 참전했던 발데마르 1세였다.>
또 섭정은 기사단들과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했다.
구호기사단장 하프단은 혈통으로 따지면 덴마크 왕가인 에스트리드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가 나고 자란 곳은 남프랑스 툴루즈였다.
따라서 아키텐 왕국과 연이 닿은 인물이었다.
사실 구호기사단과 아키텐 왕국은 관계가 깊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하프단의 바로 전기사단장이었던 '미남' 리카드는 헨리 1세의 아들이자 현 아키텐 왕 헨리 2세의 동생이었다.
이에 비해 성당기사단원들은 대개 하급 신분이나 계승권이 밀린 귀족 출신들이 많았고 그에 비례해 기사단장들도 고귀한 출신들이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현 단장인 히콘이 노르웨이 왕국의 전 왕가였던 스카케 가문 출신이었지만 스카케 가문은 혈통이 끊겨 다른 가문으로 왕위가 넘어간지 오래였다.
튜튼기사단은 이름부터 알 수 있다시피 독일 출신들이 매우 많았고 창설에도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의 영향이 컸다.
다행히 이들은 역사도 짧고 레반트에 온지도 얼마 안되어 세력이 가장 약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굴시는 구호기사단, 성당기사단 인물들과 돈독하게 지내고 튜튼기사단을 포섭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둔 기사단이 바로 구호기사단이었다.
또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외부 세력과의 연계도 꾀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교섭은 쉽지 않았는데, 포르피리오스는 이미 자신의 두 딸을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시집보내면서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제 3차 십자군을 주창했던 영광의 교황 우르바누스 3세가 죽고 새 교황을 선출해야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콘클라베에 깊숙이 개입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칼리스투스 3세를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전 프리슬란트 주교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원정에 동행한 순례자이기도 한 칼리스투스 3세는 독실한 점이나 성직자 서임권 문제에서는 기존 교황들과 궤를 같이 했지만 황제에게 우호적인 편이었으며 평화적인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바랬고 이를 굴시 총대주교에게도 전했다.
하지만 능구렁이같던 프리드리히 2세는 칼리스투스 3세를 손 안에서 갖고 놀았고 유럽에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맞서기란 미친 짓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비잔티움 제국 대신 굴시가 눈을 돌린 것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었다.
아르메니아의 메소포타미아 공국과 시리아 왕국은 각기 네스토리우스교를 믿는 군주들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시리아 왕국 군주 메수드는 메소포타미아 공작인 스테파노스의 꼭두각시였다.
네스토리우스교가 비록 이단이었지만 그 후원자인 스테파노스 공작은 동방 총대주교에게 공의회를 선포하도록 만들어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네스토리우스교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통합하면서 교리를 가톨릭쪽에 가깝게 수정하는 등 가톨릭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또한 스테파노스 공작은 프리드리히 2세의 권유로 룩셈부르크의 하드비히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그녀는 결혼한 지 3년만인 1212년 늦둥이 아들 제르쿠스를 낳다가 사망했고 황제와의 연결점이 하나 사라져있는 상태였다.
스테파노스는 아르메니아 원정에서 돌아온 뒤 동맹을 얻기 위해 새 아내를 맞이하려고 했다.
비록 호엔슈타우펜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비잔티움 제국 측에선 스테파노스에게 독일 귀족 영애 대신 키예프 공국에서 태어난, 정교회 여성을 결혼 상대로 제안했다.
비잔티움 측의 제안에 스테파노스는 경계했지만 유럽에서 자신의 후원자 프리드리히 2세의 건강이 나날이 악화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새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자신에게 우호적일까 스테파노스가 걱정하고 있을 때, 굴시 추기경은 오직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가톨릭 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곳에 동맹을 둬야한다고 재촉했고 상당한 양의 축의금을 약속하며 비잔티움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스테파노스에게 부탁했다.
주위의 기독교 대국인 비잔티움 제국과 예루살렘 왕국이 한 뜻을 이루자 스테파노스도 두손을 들고 비잔티움이 제안한 결혼을 승낙했다.
스테파노스는 새 아내로 루스인 올레나를 맞이했고 예루살렘 왕국에게 많은 축의금을 선물로 받았다.
이 축의금을 군자금으로 사용해 스테파노스는 다시 한번 아르메니아 원정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시리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면서 계획을 잠시 미뤄야 했다.
네스토리우스교 군주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시리아 왕국의 무슬림 에미르들은 심심하면 반란을 터트렸고 그때마다 아르메니아인 부대가 반란자를 진압했다.
왕국에서 입지가 좁았던 메수드는 대대적인 반란을 경계해 처음엔 반란자들을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용서하면서 귀족들을 포섭하려고 했지만 많은 무슬림들의 적대감은 줄지 않았고 개종도 쉽지 않았다.
그러자 메수드는 남시리아에 있던 아랍 유목민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는데 이들은 파티마군의 중부 시리아 정복에도 시리아 왕국에 꾸준히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었고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군주의 새 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고 무슬림 에미르들이 이들 일부와 결탁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리아 왕국에서 손꼽히는 대반란을 일으켰다.
메수드 제위 내 최대 규모가 된 반란은 순식간에 국토를 휩쓸었고 북시리아에선 심지어 메수드가 임명한 네스토리우스교도 성주가 있던 텔 바시르 요새와 수도 팔미라를 제외한 국토 전부가 반란에 동참했다.
<시리아 왕국에서의 무슬림 반란
팔미라가 포위된 상황에서 양쪽으로 메수드와 스테파노스의 군대가 위치해 있다.>
스테파노스는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왕국으로 진입, 팔미라를 포위한 반란군 규모가 심상치 않자 반란군의 실세인 리드반의 영지인 보스트라를 공격했다.
영지가 습격당한 반란군이 술렁거릴 때 동시에 팔미라에서 메수드가 친위대를 이끌고 포위를 뚫었고 홈스로 달려갔다.
왕이 사라진 팔미라는 몇주 동안 잘 버텨주었는데 이는 메수드 제위기 동안 수도 팔미라에 꾸준히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을 이민시키거나 현지 주민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시켜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이슬람에 대한 공포감이 높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굴시 총대주교 역시 지원군을 편성해 시리아 왕국으로 보냈고 곧 메수드와 합류할 수 있었다.
메수드와 스테파노스는 팔미라를 포위 중이던 반란군을 양면에서 공격했고 아슬아슬하게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반란을 완전히 꺽어버리고 싶어한 메수드는 반역자들에게 매우 잔혹한 처벌들을 내렸다.
리드반은 두눈을 뽑힌 다음 거세되었고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들도 처형되거나 눈이 뽑혔고 시리아 왕국 내의 무슬림들은 철저하게 박해받고 개종을 요구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왕국의 인구 대다수는 무슬림이었지만 이들에게서 정치 참여의 기회는 박탈되었다.
굴시 총대주교는 시리아 군주의 감사를 받았고 여러해 동안 동방 총대주교 사브리소 2세와 교리 합의를 진행하면서 스테파노스와 메수드의 동의를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1217년 타론으로 돌아온 스테파노스는 이번에야 말로 아르메니아 수복을 성공시키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짰다.
스테파노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신으로 알렉스를 보냈는데 당시 드네스트르 강 유역을 안정시킨 포르피리오스가 다시 아나톨리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샤한샤가 보낸 핫산이 생각보다 유능해 페체네그족을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과 쿠만족을 상대로 잘 대항하자 포르피리오스는 페체네그족은 쿠만족에게 맡긴 뒤 아나톨리아 수복을 계속하고자 했다.
이는 포르피리오스 제위기에 계속 나타나는 특징인데, 포르피리오스는 야심과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정하는데 피로감을 자주 느끼고 쉽게 질려했다.
그렇기에 그의 관심은 스텝 초원, 레반트와 아나톨리아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했다.
이번엔 아나톨리아였지만 그의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사신으로 파견된 공작의 동생 알렉스는 교황을 구워삶았던 혓바닥으로 황제를 설득했다.
룸 셀주크와 휴전 중이던 포르피리오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알렉스는 비잔티움군이 직접 움직이는 대신 쿠만족 유목민들을 끌이들이자고 조언했다.
비잔티움 황제가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자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테파노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죽음이 눈앞에 놓이고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파다한 그의 아들 오토가 즉위할 준비를 하자 이번엔 아르메니아인들이 비잔티움 황제에게 충성할 것이라며 말을 뒤집었는데 그 증거로 자기 동생 알렉스를 볼모로 보냈다.
이듬해 정교도 족장 소칼이 이끄는 한무리의 쿠만족이 비잔티움의 배를 타고 시노페에 상륙했다.
투르크족의 영역으로 진입한 쿠만족은 칼데아를 비롯한 룸 셀주크의 북부 영토를 약탈하며 다녔다.
샤한샤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직접 쿠만족을 물리치러 가면서도 비잔티움 제국에 항의했는데 당연히 비잔티움 측에에선 쿠만족이 선원들을 직접 고용해 아나톨리아에 갔을 것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스테파노스가 예기치 못했던 행운도 일어났다.
룸 셀주크군이 대 아르메니아로 진입하기 위해선 메소포타미아 군관구와 트레비존드 사이에 잇는 에르주름(카린)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에르주름의 영주 알칸이 반역을 모의하다 발각된 것이었다.
곤란한 점은 알칸의 친척이 바로 페체네그족을 이끌고 있던 핫산이였던 것이었다.
졸지에 페체네그족 또한 역모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핫산은 술탄에게 소환 명령을 받았다.
술탄의 의도를 눈치챈 핫산이 핑계를 대면서 소환 명령에 시간을 끌었고 알칸은 카이세리로 끌려와 술탄의 처벌을 기다렸다.
술탄 샤한샤는 반역 모의에 머리를 싸매면서 쿠만족을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쿠만족은 현지 비잔티움계 주민들과 트레비존드의 가브라스 가문의 협조를 받으면서 술탄의 군대를 이리저리 잘 피해다니면서 약탈을 계속했다.
에르주름은 알칸의 부하들과 술탄이 새로 배치한 부대들 사이의 다툼이 여러번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에르주름의 알칸. 그가 정말 역모를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스테파노스는 1218년, 7년만에 다시 아르메니아 원정을 떠났다.
바스푸라칸과 아니 근처의 요새들을 지난번에 점령해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특히 도움이 되었는데, 아르타바즈드 파크라두니는 이 요새들 사이의 샛길을 이동해 바스푸라칸을 기습적으로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바스푸라칸 함락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샤한샤는 다시 한번 메소포타미아 공작의 영토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스테파노스는 방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에데사 서편에서 카르페르트(Khilat) 서북쪽을 둘러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지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의 요새들에 주둔한 상당한 병력들은 아르타셰스 예르반드의 지휘 하에서 투르크족이 강을 못건너오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설치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요새 배치도(퀄리티 허접)>
강을 건너기가 힘들게되자 샤한샤는 빠르게 도하를 포기하고 대 아르메니아로 진입하기 위해 에르주름으로 달렸다.
스테파노스는 이번엔 술탄을 피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군 역시 에르주름으로 나섰고 두 군대는 험난한 산중 한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아르타바즈드가 이끄는 군대가 기습적으로 에르주름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스테파노스에게 합류했다.
스테파노스는 처음부터 좁은 분지 지형에 자리 잡고 나오질 않았는데 투르크군으로 하여금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좁은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상대적으로 더많은 유목민 군대와 말을 가지고 있던 샤한샤는 스테파노스보다 군대 유지비가 많이 들어 부담스러웠고 소수의 아르메니아군 별동대가 대 아르메니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요새를 하나둘씩 함락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샤한샤는 군대를 진군시켜 스스로 불리한 지형로 들어가야만 했다.
아르메니아군은 길목을 막고 방어전을 펼쳤는데 투르크군의 화살과 기병 돌격을 버텨냈다.
며칠 동안의 전초전을 벌인 끝에 샤한샤는 전군을 쏟아 부어서라도 아르메니아군의 방어를 뚫으려고 시도했다.
투르크군의 필사적인 공격에 아르메니아군이 서서히 밀려났지만 스테파노스가 바라던 원군이 술탄의 후방에 나타났다.
바로 스테파노스에게 연락을 받은 소칼이 쿠만족을 이끌고 나타났다.
쿠만족을 발견한 샤한샤는 불리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났고 아르메니아군은 방어전을 성공시켰다.
쿠만족은 철수하는 투르크족을 기습하면서 약탈물을 취하려고 했고 제법 성과도 얻었다.
샤한샤가 대 아르메니아를 포기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아르메니아군은 아니와 로리를 점령했다.
대 아르메니아가 다시 아르메니아인의 지배를 받게되었고 스테파노스는 1045년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 그 어떤 아르메니아인도 누리지 못한 영광을 누릴 기회를 얻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옛수도 아니에서 아르메니아 왕국의 부활, 그리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타론으로 돌아왔다.
타론엔 동방 총대주교 사브리소 2세와 스테파노스의 장자 티그라네스와 굴시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각자의 영지에서 직접 와있었고 비잔티움 제국과 시리아 왕국에서도 특사를 보낸 상태였다.
동방 총대주교 사브리소 2세가 타론의 교회에서 스테파노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고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총대주교의 특사가 즉위를 인정하였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아르메니아 왕국을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1218년 9월 4일 스테파노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1218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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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르메니아 수복과 시리아 왕국 반란은 순서가 거꾸로인데 스토리를 짜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데헷!
이 글에서도 굴시 총대주교의 비중이 크지만 어찌되었든 스테파노스가 오랜만에 활약했네요.
으아, 몇십년만에 아르메니아 왕국 만든거여.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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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르메니아 왕국의 부활! 사실 비잔티움만 하는 저로서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이슬람에게 망하도록 기다렸다가 성전으로 땅먹곤 했는데...
여하튼 잘 봤습니다!
아르메니아인 역시 로마 제국의 시민이니 아르메니아도 로마 제국령인 건 당연한거죠.(롬뻔뻔)
실제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선 나라가 망하긴 했지만 동로마 군대와 정치계에서 활약, 황제도 여러번 해봤으니 그나마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