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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교회의 문턱을 낮춥시다>
한 자원봉사자의 소중한 체험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을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활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보살펴 드릴 때면
‘이렇게 하면 우리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시겠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후원 물품을 전달하러 다닐 때
‘밝은 미소’와 ‘따뜻한 손길’ 없이 단순히 택배회사 직원 역할에만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숙희, ‘빈첸시안의 선물’ 참조)
저희 역시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도 드센 아이들에 ‘데여서’ 그런지
차츰 너무 속 썩이지 않는 아이들, 덜 뺀질거리는 아이들을 선호합니다.
때로 입소 절차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도움의 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또 다른 상처를 받고 또 다른 방황을 시작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별의 별 체험을 다 하게 되지요.
가정 경제의 파탄으로 다음끼니 걱정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절규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원통한 나머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으십니까?
본의 아닌 실수로 인해 공공의 적이 되어 집단적 따돌림을 당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교회가 지닌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가 개방성입니다.
세상에 대한 개방,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개방,
죄인들을 향한 개방,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개방.
교회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대문을 보다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본질상,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 상처입어 절뚝거리는 사람들,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 죄인들을
따뜻하고 기쁘게 맞아들이는 곳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역시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 세상을 떠돈 노숙인이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머리 둘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던 이방인이셨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사랑밖에 없었던 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는 일 밖에 없었던 분이셨습니다.
이토록 가난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들의 나눔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은
바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가 필요한 장애인들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의 사랑이 만나게 되는 교차로입니다.
결국 가난한 이웃들은 교회의 심장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은 교회의 핵심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은 예수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우리 교회의 최우선적 과제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련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신비 감각의 수련과 치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물건처럼 사고 팔립니다.
이 물화(物化)의 시대에 무엇보다 긴요한 게
‘일상의 복원’이요 ‘신비 감각의 복원’입니다.
무뎌져가는 신비 감각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새삼 신비 감각을 살리고 키우는 신비감각의 수련이 절실한 시대임을 깨닫습니다.
신비감각의 수련과 치유를 위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오늘은 ‘신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세상에 신비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연의 신비, 생명의 신비, 인간의 신비,
몸의 신비, 마음의 신비,
사랑의 신비, 믿음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
끝이 없습니다.
온통 신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모두가 신비라는 것은 모두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 같지만 대부분 모르는, 극히 작은 부분만 아는 우리들입니다.
이 신비 앞에 설 때 저절로 경외와 겸손입니다.
신비 중의 신비가, 모든 신비의 열쇠가 바로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모든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 이르고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아 가면서
인간의 신비, 세상의 신비를 깨달아가게 됩니다.
신비의 깨달음에 따르는 놀라움이요 새로움이며,
더불어 살아나는 신비 감각에 영적 감수성입니다.
이런 신비가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의무입니다.
신비가가 될 때
비로소 물화의 세상 속에서도 본연의 참 나의 자유인으로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하느님 신비 묵상이 참 고무적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감격한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고무적입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는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아 갈 때
저절로 겸손과 지혜요, 세상의 신비도 깨달아 알아가게 됩니다.
세상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는 이 말씀이
모든 신비의 답입니다.
하느님 안에 모든 경계의 벽은 사라지고
모두가 하느님의 무상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람 눈에 ‘잘난 이 못난 이’, ‘있는 이 없는 이’, ‘높은 이 낮은 이’이지
하느님 눈에는 모두의 벽이 철폐되고 모두가 당신 안에 사랑스런 피조물들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아 알 때
하느님을 닮아 자비와 연민이요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해 각별한 사랑을 쏟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신비에 정통한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요
특히 가난한 이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유유상종, 이해 관계를 떠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라 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져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을 돕는 것이며 하느님께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이런 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
신비 감각도 살아나며 하느님을 닮는 참 나도 회복됩니다.
이런 무욕의 순수한 나눔의 행복은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래야 텅 빈 허무가 아닌 텅 빈 충만의 행복을 삽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하느님의 사랑에, 신비에 정통한 신비가입니다.
기도 많이 해서 신비가가 아니라
사랑이 많아 신비가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이런 익명의 신비가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치유를 위해, 18번째의 희생자(자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숱한 의인들의 후원을 통해 와락 공동체를 만든 정신과 의사 정신혜 박사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와락’ 안아 줄 수 있는 환대와 보살핌을 강조한다는 뜻에서 와락 공동체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다음 그의 진정성 담긴 고백이 그대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은
일상의 기본인 밥을 먹는 것이다.
‘와락’에서는 따뜻하고 정갈한 밥을 늘 공급할 것이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주듯이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신비는 사람의 신비요,
사람의 신비는 ‘몸의 신비’이전에 ‘마음의 신비’입니다.
참 약한 마음에 마음의 상처와 좌절이 자살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도대체 어느 동물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합니까?
그토록 사람 마음이 약하고 섬세하여 상처 받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분의 고백입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다.
…마음의 상처는 내가 한두 번 이벤트처럼 상담해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지속적으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 어렵다.”
마침 며칠 전 어느 자매가 투병 중인 친구 분을 위해 성경말씀을 선물해 주고 싶다고
다음 말씀과 더불어 한지와 붓 펜을 갖고 왔기에 정성껏 써드렸습니다.
‘참으로 내가 너에게 건강을 되돌려 주고 너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
(예레 30,17ㄱ)
최고의 의사는 주님이십니다.
심신의 상처는 물론 신비 감각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래서 교회의 성사가, 특히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고맙고
매일의 성무일도가 고맙습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살아계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마음의 상처와 더불어 무뎌진 우리의 신비 감각도 치유해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시편 130,7)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제가 아침 운동을 하는 도로에서 항상 만나는 형제님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도로를 청소하시는 환경미화원 형제님이십니다.
이 형제님은 추워도 또 반대로 더워도 매번 그 시간이면 도로를 청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가 지나가며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언제나 밝게 웃으시며 인사를 받아주시지요.
너무나 이른 새벽부터 일하시기에 짜증을 낼 수도 있을 텐데,
인사를 받아주시는 그 모습에 감명을 받습니다.
또한 이렇게 궂은일을 한다고 불평불만에 쌓일 수도 있을 텐데,
항상 웃으시는 모습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제 쇼 프로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백댄서들과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인기 가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그들과 함께 하는 뒤에서 열심히 춤추는 백댄서들이 없다면 어떨까 싶더군요.
백댄서들을 통해 이 가수가 돋보이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춰도,
정작 무대에서 박수를 받는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뿐입니다.
이처럼 궂은 일, 힘든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렵다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거부하려고만 한다면 어떨까요?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큰 불편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있는 자리에 대한 불평불만은
나와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작 백 년도 못되는 짧은 삶을 살면서 괴로워하고 후회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또한 삶의 대부분을 우울해하고 괴로워한다면,
내게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제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의 자리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얼마나 기쁘게 잘 지내는지를 판단하고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상의 기준으로 힘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지 않지요.
이러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때 행복해질 것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의 기준만을 앞세운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기준을 앞세울 때에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한기철 신부님의 묵상글 *
<잊을 수 없는 국수잔치>
제 어머니는 국수를 참 잘 만드십니다.
특히 칼국수와 멸치국수는 일품입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국수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은 그릇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께 “아니 그 많은 국수를 누가 다 먹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친척들이 오실 거란다.”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것 같은데…” 하자
어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더 드실 분들이 있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전세를 사신 후 정말 간신히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집을 장만하시고 2년 후에 비로소 국수잔치로 집들이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붓한 마당에서 친척들이 국수를 얼추 다 드신 후
어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고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행인들에게 국수를 대접하셨습니다.
정말 다양한 분들이 들어오셔서 국수를 드시고 기쁘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 저희 가정에 복을 빌어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그런 국수잔치는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 젊은데 지금까지 참 다양한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잔치에 초대받을 때마다 어머니의 국수잔치가 그립습니다.
아마도 그 잔치가 제 기억 속에 가장 훌륭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보답 받을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행복할 거라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어느 누가 되었든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 순간을 함께할 때 사람, 사건, 상황들이
그 자체로 온전해지고 충만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잔치가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는 당신 사랑의 잔치에
세상의 모든 자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가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미리 구분해 놓습니다.
하늘나라 잔치의 주최자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듯
분명 땅에서 열린 천국의 잔치가 하느님 나라의 잔치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다 하겠습니다.
- 성바오로수도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보답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초대하지 말고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불우이웃 돕기를 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지 말고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친구가(이웃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옛날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었던 어떤 성당에
봉사 활동과 불우이웃 돕기를 무척 잘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매달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고,
폐지나 재활용품 같은 것을 모아서 기금을 만들고,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좋은 활동을 했는데,
그 단체의 구성원은 모두 사회 지도층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만 모인 단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 단체에 가입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좋은 목적으로 모여서 실제로 좋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자기들끼리만 어울린다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본당에서 고립되어 갔습니다.
또 다른 어떤 본당에서는 여성 단체 하나가 회비를 모아서 가난한 시골 본당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사회적으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모인 단체였고, 몹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단체로만 보여서
신자들이 그 단체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주눅 들어서 가입할 수도 없는 단체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단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공동체에 있는 가난한 사람은 주눅 들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자기들을 '베푸는 자'로, 남들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자'로 구분하고 격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한 사랑을,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랑이란 모두를 향해서 열려 있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인 목적이 아무리 '사랑 실천'이라고 해도...
사랑이란 모두를 향해서 열려 있는 것이고,
그 모두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과 같아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아지려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과 같아지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냥 한 끼 식사나 대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관한 명령은
단순한 '나눔' 실천에 관한 명령이 아니라
모두가 '한 몸'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시대 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때 신자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고,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습니다(사도 4,32-34).
궁핍한 사람도 없었지만
혼자서만 부유함을 누린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아진 것입니다.
함께 굶거나, 함께 배부르거나...
'함께 같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적선(선행)보다 더 차원이 높은 '일치'입니다.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고?
어려우니까 그만큼 더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쉬운 일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주 강조하셨겠습니까?)
자기가 먼저 먹고 남은 것을 주는 것과
먼저 주고 나서 남은 것을 자기가 먹는 것의 차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곧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마태 25,40).
예수님은 신앙인들에게는 가장 귀한 분이니
당연히 먼저 대접하고 나서 남은 것을 자기가 먹게 되겠지요.
사랑은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 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보이지 않는 보화>
영화 <미션>의 첫 장면에
십자가에 묶인 선교사가 강물에 떠내려오다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나온 그 폭포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있는 ‘이과수’ 폭포입니다.
유학 중 동료 신부님과 그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드가 위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폭포를 보는 순간 저희는 그 장엄함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가이드가 저희를 데리러 내려왔습니다.
가이드 경력 17년 동안 저희처럼 안 올라오는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40분에서 길어야 1시간을 보는데
저희는 거의 3시간이나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일주일씩 본다는 루브르 박물관을 2시간 만에 본 저희들이었는데,
폭포 하나를 3시간씩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저희는 사제들로서 그 웅장한 자연의 놀라움을 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창조의 위대함을 감상하고 찬미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누구나 ‘깊이에로의 강요’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뭐든지 깊이보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축성된 밀떡과 포도주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볼 수 없으면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감실이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계신 마리아로 보이고,
또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사제가 최후의 만찬 때의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을 지녔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만 보지 않고 그 깊히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아야만 참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마더 데레사도 나중에서야 누워있는 걸인이 ‘목마르다!’라고 할 때 그를 그리스도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 중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것도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기에
현세에서 자신들이 하는 선행에 대한 보답을 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말고,
가난하고 병들어 보답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보화로 대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지만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는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익명으로 된 선물을 받아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지 모를 때는
주위 많은 사람들이 그 익명의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익명으로 받는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도 그만큼 선물의 효과가 큰 것입니다.
또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대접한 것들은 오래지 않아 곧 잊게 되지만,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선행을 한 것들은
오래오래 가슴속에 남아서 깊은 만족감을 줍니다.
아마도 그들 대신으로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보화를 계속 넣어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혼자 욕심 부리고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재물을 사용하여 좋은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몰래 도와주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는
선행을 했으면서도 몰래 하여 보답이나 감사를 받지 못하는 이 사람을 보시며
당신께서 친히 보이지 않는 보화, 즉 성령의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인간의 감사는 곧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칭찬은 영혼 속에 깊이 남아 오랜 만족감을 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그 참된 행복의 보이지 않는 보화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잠시 묵상해 봅시다.
“주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모든 소망을 넘어서는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 수원교구 오산 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으로 족하라>
예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장애인,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할 것이다." (루카 14,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왕이면 마음에 드는 사람, 한 자리 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텐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만약 보답을 받고자 한다면 그 행동은 이미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매월 첫째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하고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한 정성을 모으고 있습니다.
십시일반입니다.
꾸준히 애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어려운 분들이 실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빈첸시오 회원들이 농사를 지어 희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 수고와 땀을 하느님께서 갚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누구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묵묵히 애쓰는 사랑의 마음이
하늘에 보화를 쌓고 있습니다.
선거철에 나타나는 색깔이 ‘생색’이랍니다.
생색내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 마음으로 투신하는 모든 이에게 기쁨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 (루카 6,32-33.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무엇을 베풀었다면 그로써 족한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 꽃피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소화 데레사)
그러므로 칭찬을 받으려 하지 않으며 보답을 받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그리하면 덤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성 이냐시오도 말씀하셨습니다.
“힘써 일하되 당신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아는 보수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후한 보수를 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상은 하느님께 맡겨두고 많이많이 사랑합시다.
많이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성모의 매괴 본당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의 위로와 성령 안에서의 친교>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관구 봉사자를 할 때 외국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혼자 나가 있는 형제들은 대부분 꿋꿋이 잘 사는데
둘이 나가 있는 형제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고 그 때문에 힘들어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둘이 있으면 힘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으니
서로 상대에게 털어놓고 상대가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힘을 주기를 바라는데
그 상대도 마찬가지이기에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아예 기대를 할 수 없기에
꿋꿋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헤쳐 나가며
오로지 성당에 가 주님께 하소연하고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부가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기에 그 만큼 티격태격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대와 의지는 아예 하지 않고
모든 위로와 격려를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필리비서에서 얘기하듯
성령 안에서 친교와 애정과 동정을 나누게 되고
한 마음, 한 생각, 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 <굿뉴스> '매일미사'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언젠가 시골 공소에 갔다가
도시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내려와 살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곧 서품 받을 아들을 두었다는 그 형제는
세속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분이었습니다.
우연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분이 취기가 약간 오르자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사제가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면 부자도 이해할 수 있지만,
부자를 먼저 이해하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가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부자의 영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부자들과 어울린다고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과 함께할 때 부자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만남이지만 그분의 말이 잊히지 않고 마음에 박혀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오늘날 교회는 이미 신자본주의의 물질적 우상이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 말에 따르면,
부자들만이 교회의 현실이 되고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을 때,
교회 안의 세속주의는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복음의 의미도 교회의 존재 이유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가까이하고 받아들일 때
부유한 이도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달리,
가난한 이들은 직접 찾아 나서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소유로 신분의 경계를 짓지만,
교회는 복음적 가치로 그 경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과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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