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형상 있는 것들의 모습이 실제의 형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본 것이다…. 약견
제상비상하면… 제상비상이라…"
스님은 계속 중얼거리며 풀숲을 헤치면서 험로를 올랐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고 숨은
턱에 차 올랐으나 계속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수 십 리 무인지경인 여기서 쉬다가는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숲 속에서 꼼짝없이 노숙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해는 서산 마루를 비껴 가는가 싶더니 어느덧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골짜기마다 어둠
이 깃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칠흑 같은 암흑 속에 휩싸여 버렸다.
산 중의 밤은 이다지도 어둡단 말인가. 도저히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정도로 주의가 캄캄
해지자 스님은 길가 한쪽 편편한 바위에 좌정하고 앉아서 계속 이어져온 생각 속으로 다시
몰입해갔다.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 제상이 비상이라. 제상비상이라. 세상비상 제상비상…
그렇다면 모든 것들의 실제 모습이란 어떻다는 말인가! 무엇이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의 참모
습이란 말인가. 저 존재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알 듯 알 듯 하다가도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 듯 눈앞이 캄캄해진다. 가슴이 답답하
고 머리도 아프고 생각은 헝클어진 채 도대체 어찌 해볼 수가 없었다.
헝클어진 생각 속에서 마치 미로를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방황하는 "구도자"의 번민을 모르
는 듯 밤은 더욱 깊어갔다. 한기가 온몸을 엄습해 온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직 칠흑처럼 캄캄하여 한 걸음도 내디딜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냥 그대로 마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구름이 끼었는지 별들조차 전혀 모습
을 드러내지 않아 더욱더 어두운 것 같았다.
멀리 산등성 너머로부터 나직한 바람소리가 숲을 흔들며 두어 차례 지나가더니 잠시 후부
터 "후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덜어지기 시작했다. "눈 온 데다 서리 마저 내린다"
(雪上加霜)더니 꼼짝할 수 없는 판에 찬비마저 내려 스님을 더욱 곤욕스레 만든다.
스님은 과거 금강경 강의 시에 웬 스님이 홀연 나타나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문으로 가슴
을 저며놓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패배의 수치심과 함께 도를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집념이 되고 집념은 다시 구두의 열정을 부추겨 피나는 정진을 거듭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렀
건만 도의 성취는 아직 요원하기만 한 것 같았다. 어둠 속으로 스님의 눈동자는 오기와 구
도의 집념으로 더욱 활활 불타올랐다. 반드시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리라."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이제는 바람까지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빗소리, 불어난 계곡의 물
이 아우성치며 흘러가는 소리,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혼돈의 밤은 계속 깊어만 갔다.
계곡 물소리 비바람 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와중에서도 스님은 미동도 않고 오로지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글귀만 계속 반복하였다. 이제 스님은 그 소리가 자신이 소리
인지 물소리인지 빗소리인지 도저히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자주 되뇌
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렸을까? 빗줄기가 점점 엷어지더니 이내 그치고 바람도 잦아 들어갔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도 차츰차츰 줄어들더니 얼마 안가 새 소리처럼 맑게 졸졸졸 소리를 내
며 평정을 되찾았다.
자욱한 안개가 자꾸만 산등성이를 넘어 바삐 달아난다. 산 너머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
더니 이윽고 어둠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만물이 삽시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마침내 산등성 너머로 붉은 해가 찬연한 빛을 뿌리며 덩그라니 떠오른다. 산중의 초
록빛이 유난히 곱고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막 떠오른 해를 바라보는 순간, 한줄기 섬광이 아직도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마음
의 심지에 닿는가 싶더니 마침내 활활 타올라 바야흐로 우주는 광명을 되찾는다.
"아, 아! 이토록 눈부신 빛은 처음이로다. 정녕 우주는 이리도 밝은 것을. 모든 형상 있는
것(諸相)과 형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非相)의 모습은 다른 것 같지만 실상(實相)은 하나인
것을. 유상(有相)세계와 무상(無相)세계를 아울러 볼 때 우주의 광명은 비로소 내 마음 속
에 비치는 것을. 아아! 정녕 우주는 눈부시게 밝고녀."
스님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에 겨워 목놓아 울다가 더덩실 더덩실 어깨춤을 추며
숲 속을 맴돌았다.
"이리도 밝은 빛을 두고 왜 인간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 채 미로를 헤맨단 말인가"
다시 태어난 듯 몸과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상쾌하였다.
昨夜森林風雨惡 岩中開花川上山
苦海怒濤連天碧 叩頭鐵壁到別天
(간밤 숲 속에 비바람 거세더니
바위에 꽃피고 냇물은 산을 오르네.
고해의 성난 물결 하늘 맛닿아 푸르고
철벽에 머리 치매 별천지 보이네.)
스님은 뒷날 이 골짜기를 다시 찾아 냇가 거대한 바위에 그때 심중을 읊은 시 한 수를 새겨
놓았다. 그 뒤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음미하며 고개의 이름
을 오도재라고 불렀다.
×××
삼봉산 기슭을 접어들자 운룡은 옛 선사의 오도의 기쁨이 배어 있는 오도재의 유래를 생
각하며 묵묵히 걸었다. 아내와 큰 아이는 벌써 무척 지친 듯한 표정이다. 차츰 날도 저물어
가는 터여서 운룡은 멀리 보이는 인가를 가리켜 보이며 이제 다 왔으니 서둘러 가자고 재촉
했다.
너댓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오도재 조금 못 미쳐 위치한 이 마을은 살구쟁이
(杏亭)라고 하는 곳이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운룡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당장 저녁 끼니가 걱정이었다. 낯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잠자리 부탁하기도 미안한데 밥조
차 얻어먹는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때 마침 잘 영근 밤송이가 눈에 띄었다. "옳지, 오늘 저녁은 날밤으로 때우자." 운룡은
돌을 집어 밤송이를 향해 던졌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밤송이 몇 개가 떨어졌다. 이렇게 하
여 날밤을 까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저녁요기를 하고 마을로 들어가 한 집의 사립문에서 소
리를 질렀다. 집주인에게 하룻밤 유숙을 청하니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재워야드리겠습니다만 집안이 좁고 누추하니 그런 줄 아시고 저희와 함께 자도록
하시지요."
주인의 안내로 방안에 들어서 보니 방안은 의외로 비좁아 도저히 같이 잠을 잘 형편이 못
되었다. 운룡은 방에서 나와 그 집 헛간으로 가보았다. 마침 짚단이 여러 단 있었다. 주인의
한결 같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운룡은 살구쟁이의 첫밤을 가족과 함께 임노인의 헛간에서 보
냈다. 셋째 아이를 얻고 아내를 잃는 살구쟁이에서의 한 맺힌 5년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
이다.
삼가 일생대오(여백)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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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상담실
신의 이야기 (26-2) 삼봉산 살구쟁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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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4.2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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