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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오탁번 시인 추모특집
<시인의 약력 >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사 교수부(1971-1974)와 수도여사대(74-78)를 거쳐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재직다가 2008년 퇴직했다. 1966년 《동아일보》에 동화, 1967년 《중앙일보》에 시, 1969년 《대한일보》에 소설로 등단했다. 1998년에 시 전문지 《시안》을 창간하여 2013년, 통권 61권을 발간하였으며, 시인협회 회장을 엮임하고(2008-2010), 2020년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됐다.
창작집으로 『처형의 땅』(일지사,1974) 『내가 만난 여신』(물결,1977) 『새와 십자가』(고려원, 1978) 『절망과 기교』(예성, 1981) 『저녁연기』(정음사, 1985) 『혼례』(고려원, 1987)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문학사상사, 1988) 및 재출간한 『오탁번 소설』 전6권(태학사, 2018) 등이 있다.
시집으로 『아침의 예언』(조광, 1973)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청하, 1985) 『생각나지 않는 꿈』(미학사, 1991) 『겨울강』(세계사, 1994) 『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9)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오탁번 시전집』(태학사, 2003) 『손님』(황금알, 2006) 『우리 동네』(시안, 2010)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 『알요강』(현대시학, 2019) 『비백』(문학세계사, 2022)이 있다. 문학선 『순은의 아침』(나남, 1992)과 시선집으로 『사랑하고 싶은 날』(시월, 2009) 『밥 냄새』(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눈 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이 있다.
산문집으로 『현대문학산고』(고려대출판부, 1976) 『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고려대 민연, 1988) 『현대시의 이해』(청하, 1990) 『시인과 개똥참외』(작가정신, 1991) 『오탁번 시화』(나남, 1998) 『헛똑똑이의 시읽기』(고려대출판부, 2008) 『작가수업-병아리시인』(다산북스, 2015) 『두루마리』(태학사, 2020)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협상(2003) 김삿갓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2011) 목월문학상(2020) 등을 받았다.
2023년 2월 14일 오후 9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별세. 향년 80세.
절명시
이승훈이 세상 떠났다는 소식에
세브란스 장례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문상을 하고
박의상과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애도의 방식은
언어가 아니고 침묵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미망인이 말했다
- 그이가 숨 거둘 때
‘이제 알겠어!’라고 하더군요
(‘알겠어’ 다음의 느낌표!는
극적 효과를 위해 내가 찍은 거다
마지막 숨 쉬며 한 말이니까
‘알겠어’ 다음에는
종종이……를 찍어야 될 테지만)
승훈이 마지막 말
-이제 알겠어……
아아
비백飛白의 절명시絶命詩여
- 시집 『비백飛白』(문학세계사, 2022) 중에서
오탁번을 보내며
서종택(고려대 명예교수)
나는 그를 종종 탁버니라 썼다, 그도 가끔 나를 종태기라 쓰기도 한다. 물론 새로 나온 책을 줄 때는 서종택교수 혹은 오탁번 형이라 서로 예를 갖춰 서명을 하기도 하고 요즘 어찌 지내시나, 제천은 지금 설국이다 하는 식으로 존대 반 하대 반을 섞어 쓰기도 한다. 그래도 종택이보다는 종태기가 좋을 때가 많다. 격식은 갖추면 서먹하고, 무시하면 정겹다더니, 어느 해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십여 명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오랜만이라 다소 과장되게 반갑고 시끌짝하게 악수하고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마침 그 모임에 오탁번 한용환도 함께였는데 오도 한도 만난 지 서너 달은 되던 때였다. 대학 시절이야 시도 때도 없이 만나 떠들고 했지만 선생들이 되고부터는 일 년에 서너 번 볼까 말까 하던 즈음이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박 모 시인이 당신들은 악수 안 해? 한마디 했다. 순간 우리는 그런가? 하고 웃고 말았다. 한용환과는 고2 때 진눈깨비 내리던 광주역에서 처음 만나 서툰 악수를 했었고 오와는 대학 입학 당년의 문과대학 강의실 복도에서였을 것이다. 이후 우리는 악수 따위는 하지 않았다. 중고 시절 우리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허기진 전후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 활동 무대가 학생잡지 『학원』의 독자 문예란이었다,
소싯적 문학소년들이 제천과 아산만과 탐진강변에서 서울로 유학왔지만 1960년대의 한국 사회는 최루가스만 자욱했다, 대학은 우리에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고 문학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나는 여전히 문학에 열병을 앓았지만 신춘문예는 번번이 낙방이고 중세국어는 F가 나왔다. 문청의 자존심이 서서히 누추해지기 시작했다. 과의 친구들은 휘문이나 동두천상고 교사로 팔려 갔고,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던 나는 이내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그러므로 나의 결단의 소산이라기보다는 허송해버린 학부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혹은 시간 끌기의 어정쩡한 선택인 셈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간 다음 해에 오탁번과 한용환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오탁번은 이미 자신만의 구도에 따라 차근차근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오랜 친구로서 그의 현란한 질주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일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굴뚝소제부」 「라라에 관하여」 같은 명품 시를 발표하던 70년대 초는 그가 영미시와 연애에 빠져 있을 때였고. 김승옥을 읽고 내가 절망에 빠지자 그는 「처형의 땅」이라는 단편을 들고나왔다. 처형의 땅은 작중인물을 ‘우리들 중의 하나’로 계속하여 호명하는 것을 두고 현대소설의 익명성 어쩌구 하는 나의 비평적 언술에 그는 그런가? 하고 무심히 받아넘겼다. 당시 그가 만나던 ‘그녀’가 얼마나 미인인가를 내가 설명해 주었을 때에도 그렇게 생기면 미인인 거니? 하고 되묻던 기억, 그는 그런 포즈로 무심히 자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다음 해에 나는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월간 문예지의 신인상 당선통지를 받고 등단의 의식을 마쳤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미 논문에 각주를 달고 있었으며 문학 텍스트는 서서히 하나의 인식의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인문적 관점과 사회적 질료에 의해 해부되고 분해되는 과정은 재미있었지만 공허감은 커지기만 했다. 대학원 세미나에는 동서고금의 문사철 유령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이 길게 줄을 섰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싸움은 승부 없이 계속되었다.
오탁번은 동화 시 소설을 연달아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문재를 과시했고 옆에 있는 친구들을 주눅 들게 했다. 1968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부상인 tv를 준다고 해서 양보 없이 나와 응모했으나 최종 3편 결선에서 우리가 졌다. 그리고 다음 해였던가 그가 연말 늦은 시간에 전화했다. 어디 연락 오는 데 없냐고 묻고는 “없는데.” 대답하니 곧이어 그가 “난 대한일보.” 한마디 했다. 소설만큼은 내가 먼저 등단하겠다는 욕심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오탁번의 경쟁자가 아니라 응원자가 되어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 어느 날 모 여류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마나 막막하세요. 둘이서 그리 잘 지내시더니… 어쩌구 위로했다.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난 평생을 그 친구 응원만 하면서 지냈어요. 그라운드에서 뛰는 그를 벤치에서 응원했지요. 근데 오탁번한테는 내 배가 안 아팠던 게 이상하지요? 그녀가 킬킬 웃었다. 사실로 말하자면 언제부턴가 더 아플 배가 없어졌고 그를 응원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았던 것 같다. 상을 많이 받아서 시상식에는 안 가는 때가 전부이고 시인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는 거기도 무슨 법인카드도 나오냐고 농담조로 묻는 정도이고, 예술원 회원이 되었을 때는 그런 단체는 없어져야 하는 건데, 어쩌구 시비나 걸곤 했다.
오탁번은 그러나 문인단체나 무슨 협회도 잡음 없이 잘 이끌어가는 능력을 보였고, 그가 『시안』이라는 계간지를 창간했을 때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문학 경영자로서의 능력과 조직력을 과시했다. 잡지가 몇 년이나 갈까 걱정했는데 오랜동안 시단의 중심 잡지로 키워내고 있었다.
그가 펼치는 문학 담론들은 다분히 원론적인 것이어서 쟁점 될 것은 없었고, 그가 창간한 『시안』 또한 특별한 문학적 이념이나 가치를 따로 주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다원주의는 선명성과 운동성을 강조하는 한국의 문단 풍토나 사조에 부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문학적 이념이나 가치가 재능이나 가능성으로 폄훼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정치나 이념에 복무하는 문학을 거부한 자이다.
보기 좋네. 큰집 형님 기일에 참례한 종태기 모습 눈에 선하다. 여기는 완전 설국이다.
지난 연말 제천에서 광주로 보내온 문자에 오랜만에 ‘종태기’를 호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검진 결과가 안 좋다고,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식 알리듯 무심히 말했고 용환에게 니 안부 전하겠다고 하여 나를 서늘케 했다.
오탁번은 좀 이기적으로 우리 곁을 떠난 것 같다. 간병이나 문병의 기회도 없이 그렇게 총총히 떠나는 건 또 무언지. 세간의 성취도 허무도 그리고 죽음마저도 나보다 먼저 학습해버린 친구, 그러나 오탁번의 시간들은 늘 시적 영감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한국 문단의 멀티플레이어였다.*
비백飛白의 시인, 오탁번 선생님을 추모하며
박수현(시인)
지난 3월 15일 제천 “개나리 가족묘지공원”을 다시 찾았다. 별세하신 지 꼭 한 달 만에 선생의 시인협회 회장 시절 함께 일을 도왔던 시인들 7명이 영원한 안식처에 드신 선생을 뵈러 간 것이다. 삼대三代가 안치된 봉안 묘소 앞에 꽃다발과 술 한 잔을 올리자니 믿기지 않았던 선생의 별세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원서헌에도 들렀다. 마늘밭엔 선생이 손수 심었을 만년필 촉 같은 새싹들이 뾰족이 고개를 내밀고 있고 뜰엔 봄빛이 완연했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불쑥, 에헴! 하시며 나타나실 것 같은 주인장의 모습 대신 선생이 날마다 들꽃을 꽂고 등불을 밝히던 어머니 조상彫像만이 우리를 맞아주어 마음이 아릿해 왔다.
선생이 작고하시기 이틀 전 새벽 4시경이었다. 갑자기 쨍그렁,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잠결에 소리가 난 서재로 달려갔다. 액자 한 점이 떨어져 유리며 액자 틀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내 글씨 개성적이고 낙관을 무려 6개나 찍었으니 나 죽고 나면 값 좀 나갈 거야!”라시며 나의 세 번째 시집 표제작인 「샌드 페인팅」의 일부를 선생께서 써 주신 액자였다. 마지막 때 “치료를 받는 것보다 고통을 더는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며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던 문자가 떠올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전화도 문자에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 시간 선생은 버슨분홍 꽃잎 날릴 때까지 견디시지 못하고 “봄날은 그냥 가네 / 그냥 가네”(「버슨분홍」)하시며 바삐 천둥산 박달재 너머로 걸음을 재촉하셨을 것이다. 선생의 병세를 안 것은 1월 초순이었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며 몇 번 통화와 문자를 주고 받았지만 그리 홀연히 떠나실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우리 문학사의 큰 산맥이신 선생은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 3관왕의 타이틀을 지니셨다. 2019년 재발간한 『처형의 땅』 등 6권의 소설 전집과 첫 시집 『아침의 예언』부터 작년에 발간한 『비백飛白』 까지 11권의 시집 그리고 『헛똑똑이의 시 읽기』 등 6권의 산문집을 남기셨다.
선생께서 이룩한 업적을 감히 되짚어본다. 먼저 선생의 부지런한 손과 정성으로 경작해 살려낸 오묘하고 감칠맛 나는 토박이말들에 대한 헌신을 얘기하고 싶다. ‘하동지동, 욜랑욜랑, 닁큼, 녈비, 지난결, 거먕빛, 쥐코밥상” 등 살가운 토박이말과 두렷하고 웅숭깊은 고유어를 마치 더운 밥숟갈 위에 잘 삭힌 젓갈 한 점 놓듯 적재적소에 부리셨다. 그다음 시치미 떼고 넌지시 던지는 선생의 ‘해학’이지 싶다. 명시 「굴비」, 「폭설」처럼 항간의 가담항설이나 음담패설을 시 속으로 데려와 질퍽한 생의 현장을 윤기 있게 빚어 올리는 솜씨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알아보는 안목과 식견’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계간시지 『시안詩眼』을 98년에 창간하고 통권 61호, 2013년 가을호로 종간까지 시詩의 위의威儀와 품격品格을 새기며 걸어가는 50여 명의 시인과 비평가를 배출하신 것도 선생이 문단에 남기신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 분교’를 리모델링한 원서헌도 선생의 업적 중 하나다. 야생화가 벌, 나비를 불러들이던 그곳은 때론 고향 동네 사랑방으로, 전국 각처 문인들의 열린 문학 공간이 되었으니, 이 또한 선생의 문학을 향한 애정과 열망을 오롯이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제36대(2008·4~ 2010·3)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국보사랑 운동’ 사업을 펼치신 것도 선생의 문학 사랑이 대승적 영역으로 확장된 뜻깊은 실례이다. 중요 국보 100점을 시로 승화시켜 방짜 징에다 새겨 국립중앙박물관 및 여러 곳에 전시와 낭송 행사를 열고 국보사랑 시집 『불멸이여 순결한 가슴이여』를 발간해 우리 문화재에 관한 관심을 고취시키셨다.
개인적으로 선생과의 인연은 2003년 가을, 원서헌 개관식 때 신인으로 등단했으니 올해 꼭 이십 년이 된다. 등단 후 시인협회 총무 간사로, 또 『시안詩眼』의 편집장으로 적지 않은 시간 선생의 곁에 머물렀던 시간을 되돌아본다. 선생은 일에는 빈틈없고 엄격하셨지만 시와 일상에서 유머가 넘치시는 분이셨다. 한번은 느닷없이 콧구멍 안으로 가는 줄을 끼고 코에 붕대를 댄 선생의 사진 한 장이 수신되었다. ‘유두종’ 제거 수술을 받고 셀카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퇴원 후 떡하니 젊은 날 치기를 부리며 ‘유두주’를 마신 죗값이라며 자기반성을 건강한 성적 요소와 은근짜 버무린 시 「봄날」을 발표하셨다. 시 「할아버지」 경우는 어릴 때 젖배를 곯아 고속도로 휴게소 수유실 팻말을 보면 들어가고 싶다고 쓴 것이다.(실제 사무실 냉장고에 ‘앱솔루트 분유’를 두고 타 드심) 원서헌에 협궤열차를 곧 놓겠다거나 ‘원처, 별처’라 칭하는 여성 시인이 많다며 허풍선(?)을 자주 떠셨지만 그것 또한 주위의 이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나도 끝내 선생이 그 시절 희떱게 약속한 인도네시아 화산이나 제천의 야산 5,000평을 등기 이전해 받지 못했고 같이 맞추자던 커플링도 받지 못했다.
비백飛白의 붓자취를 남기시듯 선생이 내게 주신 것은 많다. 간직하라며 주신 시안詩眼 제호 도장 한 점, 세 번째 시집의 표4와 기념 액자, 당신이 쓰시던 여름 모자 등이다. 작년 팔순 기념잔치 후 그때 걸었던 플래카드, 손수 지은 감자와 마늘 한 접을 택배로 부쳐 주시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편집장 시절, 내가 미국 갈 때 거금의 달러 봉투를, 아들 결혼 때도 상당한 축의금을 하사(?)하셨다. 또 다쳐 무릎 수술받은 후 빨리 회복하라며 맛있는 밥도 사 주셨으니 선생께서 베풀어주신 배려와 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문학에 대해 ‘알불’처럼 타오르던 선생의 열정과 엄정한 자세를 배울 수 있던 시간이 내게는 온전히 행운이었고 지복至福이었다. 티베트, 미얀마, 튀르키에를 함께 여행했던 일도 잊지 못할 선생과의 추억이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시구절처럼 이 모든 기억들이 안타깝기만 한 내게 ‘사람 사는 일이 다 이러루하니’ 그만 슬퍼하라고 선생은 내 어깨를 토닥이신다. 선생의 형형한 눈빛과 원서헌 건너편 400년 아름드리 느티나무 같은 낙낙한 그 품은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작은 거인이신 오탁번 선생님, 부디 순은純銀이 빛나는 그곳에서 편히 영면하십시오.
나의 스승, 오탁번 선생님
정경애(예일여자고등학교 교사)
“자네들은 지금까지 학교 선생님을 ‘교사님’이라 불렀나? 나는 직업이 교수일 뿐 자네들에겐 언제나 선생인 사람이네.”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대시의 이해. 1학년 과목 중 몇 안 되는 전공수업이었다. 첫 수업의 인사도 없이 선생님은 대뜸 ‘제주에서 온 소식을 접시 위에 올려놓고/ 붓방아만 찧고 있다’라고 칠판에 쓰시고 ‘제주에서 온 소식’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선생님의 큰 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학생들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이제 막 불혹에 접어든 젊고 힘찬 눈빛.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마음 약한 누군가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라고 대답했다. 갈라지고 쥐어짠 목소리였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앞으론 당신을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 것과 어떤 상황에서든 눈치 보고 주눅 들지 말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시에는 알고 모르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며 시를 보고 느낀 그대로가 곧 시의 이해이니 이미 시를 느낄 수 있는 학생은 종강까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다. 창조, 폐허, 장미촌…. 시문학파, 생명파, 청록파…. 문학을 달달 외워온 우리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갈이었다. 쩡, 쩡…. 3월인데도 날이 추워서 강의실 라디에이터 물 돌아가는 소리가 깊고 먼 산에서 나무 쓰러지듯 울렸다.
현대시의 이해는 기말시험도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은 시 세 편을 주시더니 그것으로 50분 동안 소설을 써내라고 하셨다. 덧붙여 등장인물은 더 없이 개성적이어야 하고 갈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낙제라는 친절한 힌트까지 주셨다. 패기 넘치는 용장의 모습으로 아직 시가 뭔지도 모르는 오합지졸 졸개들에게 B4용지를 하나, 하나 나눠주시던 선생님. 문학의 이름으로 권능을 주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최면을 거는 주술사처럼 엄숙하고 거룩했다.
사전 안내는커녕 귀띔 한마디 없이 시험장에 갇힌 우리는 애처로이 잦아드는 여러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몇몇은 볼펜을 물어뜯었고 몇몇은 책상을 노려봤으며 또 몇몇은 도중에 뛰쳐나갔다. 아무튼 그날 우리는 끝까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일생에 기억될 50분을 함께 보낸 동지가 되었다. 지금도 학과 친구들의 의견을 분분하게 가르는 일화이다. 부르르 몸을 떨면서 그 황당한 시간을 통해 시와 소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뜨겁게 체험했노라는 간증 형 긍정주의자도 있고, 문제로 나온 시도 모르는데 그것으로 소설을 쓰라는 말에 공포를 느꼈으며 자신의 재능 없음에 자존감이 붕괴되어 종국에는 문학에 대한 울렁증까지 생겼다는 비관주의자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선생님 수업을 싫어하지 않았고 어찌어찌 따라갔었다.
내가 선생님과 가까워진 계기는 너무나 사소해서 누군가 물으면 민망해진다. 선생님은 가끔 학생들에게 고향과 본관을 물으셨다. 그리고 늘, 당신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 꿈이라 나중에 천등산과 박달재쯤 어느 골짜기에 움막 하나 지어두고 전국을 떠돌면서 오늘은 해남으로 가서 김 씨 제자와 한 잔, 내일은 합천으로 가서 송 씨 제자와 한 잔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의기양양하셨다. 제자들이 각지에 있어 멀리까지 찾아가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하며 더구나 그 제자들과 더불어 글과 술로 조촐한 잔치를 벌일 수 있다면 그 또한 더욱 즐겁지 않겠냐며 웃던 선생님. 공자께서도 생각지 못한 맞춤형 서비스라고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상상만으로도 행복한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곤 하셨다.
선생님은 내 본향이 옥천이고 정지용 시인과 같은 연일 정 씨 문중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를 기억해 주셨다. 십수 년간 석사에 이어 박사까지, 정지용 시인을 주제로 한 공부를 막 끝냈던 터라 다소 감상적이셨던 것 같다. 제천과 옥천은 지척이라 너랑은 만날 일 없다 하시면서도 오랫동안 당신을 고생시킨 시인의 후손이니 연구실로 찾아오면 차 한 잔 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과 차를 마신 건 강릉에서였다. 여름방학 중, 학과 친구들과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오색약수까지 한 통씩 메고 강릉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재재바르며 걷던 우리 곁으로 쌩하고 지나갔던 노란색 포니 한 대가 후진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땀과 먼지에 찌들어 반은 거지꼴인 우리를 지금은 씨마크 호텔로 변신한 관광호텔 커피숍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처음 와본 호텔에 쭈뼛거리는 우리에게 비엔나커피를 시켜주셨다.
근처 숙소에서 두 번째 시집을 마무리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잠시 나온 길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친구 하나가 신경쇠약엔 오색약수가 직방이라는 흰소리를 했다. 누구보다 몸이 날래고 행동력 최강이던 선생님은 당장 시험해보자며 일어나셨고 우리는 그길로 선생님 숙소로 우르르 몰려가 약수로 지은 밥과 약수 김치찌개로 소주를 마셨다. 선생님은 이렇게 제자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함께하는 순간을 즐거워하셨다.
“맘 편하게 먹는 게 강해지는 거야. 너무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라. 세월은 그냥 가더라. 너는 늘 현명하게 다 잘 이겨낼 거다.”
남동생을 잃고 힘들어하던 내게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이다. 선생님은 항상 나를 믿고 지지해 주셨다. 시가 뭔지도 모른 채, 시 비슷하게 흉내 냈을 때에도 잘 썼다고 칭찬해주셨고 재주가 없어 시인은 못 되겠다고 했을 때에도 잘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내가 요즘 영 죽을 맛이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지낸다. 을지로 냉면 생각이 나는구나.”
뻔뻔하게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것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즐겨 드시던 냉면집이 없어졌다며 서운해하셨는데 이제는 선생님까지 안 계시니 송구한 마음 전할 길이 없다. 기이하게도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그 밤, 나는 오색약수 친구와 씨마크 호텔에 있었다. 호텔은 여러 번 개축을 거쳤지만 커피숍 자리는 그대로였다. 그때의 선생님보다 훨씬 늙어버린 우리는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봄이 와서 강릉에 꽃이 피면 선생님 모시고 다시 오자고, 꼭 그러자고 또다시 헛된 약속을 하고 있었다.
아! 어쩌면 그 순간, 선생님은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처럼,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으로 호젓이’ 우리에게 다녀가셨던 게 아닐까. “요놈! 내가 한 번 속지, 또 속을까 보냐.” 웃으시며 꾸중하러 오셨던 게 아닐까. 선생님, 그립습니다.
* 정지용 ‘장수산Ⅰ’, 김종길 ‘성탄제’ 이미지 차용
* 오탁번 ‘비백’ 인용
봄꽃으로 기억되는 은사님
서재원(인하공전 교수)
내가 오탁번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현대시 수업 시간이었다. 나에게 현대시 수업은 대학 수업이 고등학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경험해보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소월과 미당을 가장 많이 언급하셨는데, 내가 소월의 「산유화」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네”의 꽃이 비단 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수업을 들었을 때가 봄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월의 진달래가 겹쳐서인지, 오탁번 교수님은 내게 봄꽃으로 기억된다.
그 수업이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 은사시나뭇잎을 찾아오라는 과제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나무라고는 소나무 정도의 이름만 알고 있는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생소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도대체 시를 공부하는 시간에 나뭇잎이라나, 하는 반감을 갖고 투덜거렸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펼쳐서 은사시나뭇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았다. “은사시나뭇잎은 가장자리가 불규칙한 이빨 모양의 톱니이다. 앞면은 짙은 녹색이며 털이 없지만 뒷면은 백색 털이 있다가 점차 없어진다”라는 정보를 얻어 학교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나뭇잎을 조사하고 다녔지만, 내 눈에는 이 나무가 저 나무 같아 도저히 구분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은사시나뭇잎 찾기를 하느라 며칠을 허비했지만 실패하였고 은사시나뭇잎을 붙이지 못한 채 미완성 과제를 제출하였다. 그래서일까? 대학에 들어온 내게 시詩는 ‘나뭇잎 찾기’로 각인되어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60년대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배고픔처럼 현기증처럼
개나리가 제일 먼저 피었다
그다음에 진달래와 철쭉이 피고
개교기념일이 가까우면
라일락과 흰 목련이 피었다.
짙은 자목련도 피었다
몇 해 전부터는 꽃들이 멋대로 핀다
목련이 먼저 피고
진달래가 뒤이어서 피고
뒤죽박죽 순서로 피었다 진다
매일밤 아름다운 꿈을 꾸던
옛날의 꿈도 다 잊어버리고
꿈꾸지 않고 살아가는
요즘의 나를 뒤죽박죽
혼란에 빠뜨린다
이상하다
「꽃이 피는 순서」 중
은사님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맞이하는 봄, 내가 재직하는 인천의 교정에도 어김없이 봄꽃이 피어 있다. 점심을 먹고 나면 혼자 학교 교정을 산책하는데 제일 먼저 봄을 알린 것은 매화나무에 피기 시작한 매화였다. 연이어 개나리와 목련과 벚꽃이 피어났다 지고 있다. 봄이 되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오탁번의 「꽃이 피는 순서」가 떠오르고 올해는 어떤 순서로 봄꽃이 피는지 나도 모르게 헤아리게 된다.
꽃에는 무지한 내가 매화와 벚꽃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르다는 것도 은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매화는 꽃받침이 붉고 가지에 바짝 붙어서 핀다. 매화가 질 무렵 벚꽃이 터지는데, 벚꽃은 꽃잎에 작은 홈이 있고 꽃대가 길다. 또한 매화에 비해 꽃잎이 둥글지 않고 꽃잎 끝이 갈라져 있으며 꽃잎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 아래 긴 꽃자루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꽃이 만개했을 때도 매화는 꽃이 듬성듬성해 보이는 반면, 벚꽃은 훨씬 무리 지어 촘촘하게 피어 있다.
나는 소설을 전공했지만 교수님의 연구실에 책상을 두고 공부하던 시절에는 시를 더 많이 읽었고 시인이 되려고 습작을 하기도 했다. 시인도 되지 못하고 문학에 대한 내 재능에 절망하여 박사과정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이른 봄날 은사님을 찾아뵈었다. 그런 나에게 은사님은 아름다운 시를 선물로 주셨다.
제자가 하나 찾아와서는
5월달에 결혼한다고 한다
눈가에 이슬이 조금 맺히는 듯
바람 이는 강기슭에 홀로 서 있는
슬픔은 슬픔끼리
기쁨은 기쁨끼리
저기 마포 어디쯤 방을 얻어서
사랑의 모금자리를 틀 무렵
천둥소리 요란한 여름밤에도
그 너머너머에서 다가오는
찬란한 무지개를 보는 듯
아침이슬 빛나는 새끼손톱 보는 듯
네가 이고 가는 하늘 그림자
그 아래로 숨쉬는 나무와 풀
저기 마포 어디쯤 방을 얻어서
옷깃 풀어서 밤을 밝힐 때
아직은 알 수 없는
너의 슬픔과 기쁨
기쁜 아기를 슬프게 낳을까
슬픈 아기를 기쁘게 낳을까
개강을 앞둔 이른 봄날
제자가 하나 찾아와서는
5월달에 결혼한다고 한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꽃망울인 듯
오탁번, 「이른 봄날」 전문
2023년 새해 벽두에 나는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며 119가 오기 전까지 아버지의 심폐소생술을 직접 하였지만, 아버지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끝내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2월에 은사님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육체의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연이어 잃었다. 사실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두 분 모두 금방이라도 미소지으며 나타나실 것 같다. 매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을 보면, 나는 “아아 봄이다 기막히는 봄이 또 왔다
아, 오탁번
- 芝川 吳鐸藩(1943-2023)
이동재(시인)
선생님이 가셨다
40년 인연을 뒤로하고, 향년 80
사형師兄인 고형진 선배 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농담처럼 돌아가셨다
하고 싶은 일 다 하시고
되고 싶은 것도 다 돼보고
미투도 건너뛰고
술도 마시고 싶은 만큼 다 마셔서
여한이 없을 듯하나
마지막으로 부러운 거 하나,
청마 시인 하관 시 관구덩이에 뛰어들던 묘령의 여인
어디 없으랴, 싶어 굳이
선생님 고향 제천 천등산 박달재 너머
개나리 추모공원까지 따라가 본다
평소 성격대로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한 유골
아뿔싸, 납골함 입구가 너무 좁아
뛰어들 수도 없구나
천연스러운 하늘, 돌아서는 사람들
술도 문학도 선생님에게서 배웠으니
나도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쓸 만큼 쓰고 어느 날 문득 돌아가련다
다짐하는 계묘년 2월의 오후,
안암동 인사동 도곡동 술 있는 골목골목
원서헌 앞마당 뒷마당 다 비우고
선생님이, 영∼ 가셨다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긴 이별이었으니,
뒤돌아보지 말고 잘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