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의 대화
94세, 인생 마지막 영화 찍는 꿈 꾸죠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8호(2021.05.15)
신영균 치의학48-55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대담: 김인규(정치69-73) 경기대 총장· 본회 상임부회장
서울 명동에는 ‘호텔 28’이란 이름의 부티크호텔이 있다. 1928년생 신영균(치의학48-55 본회 고문) 한주홀딩스 코리아 명예회장이 자신의 생년으로 명명해 세운 호텔이다. 올해로 94세, 한국영화사 100년과 어깨가 나란한 그의 삶은 장편영화에 필적한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왔고, 연극배우를 꿈꾸다 치과의사가 됐다. 포기하지 않고 충무로에 입성,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 한 번’, ‘과부’ 등의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성실한 배우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다. 다작해 모은 수익으로 볼링장, 제과점, 부동산업과 호텔업 등을 연거푸 성공시켰다. 그렇게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10년 500억원이 넘는 사재를 쾌척해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세우고 영화 제작 지원과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문화예술계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재선 국회의원,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 등 각종 ‘감투’도 많이 썼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모범적인 생활 덕분이기도 했다. 특유의 남성미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스캔들 한 번 낸 적 없다. 증손주까지 4대에 걸쳐 화목한 가정을 가꿔 왔다.
그런 그가 자신 있게 ‘후회 없는 삶’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인생 역정을 풀어냈다. 5월 13일 소공동 더플라자호텔 메이플홀에서 진행된 본회 조찬 포럼에서다. 김인규(정치69-73 경기대 총장·본회 상임부회장) 본회 학습위원장이 묻고, 신 동문이 답하는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4관왕, 윤여정 배우의 여우조연상 수상 등 영화계 경사가 연거푸 일어났습니다. 같은 영화인으로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재작년에 영화 역사 100주년을 맞이했는데 내 나이가 90을 넘으니 영화 역사를 함께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영균문화예술재단을 만들어서 영화 공부하고 만드는 사람들 장학금을 주고 제작비를 지원했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연세대 다닐 때 작품(1994년작 백색인, 신영청소년영화제 장려상)을 잘 만들어 재단에서 지원했지요. 그 작품으로 시작해 오늘날의 봉준호 감독이 됐어요. 봉 감독이 우리 재단에 대해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여정씨는 그 동안 고생한 것에 보상을 받은 것 같아요.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했는데 그간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돌아왔으니 저도 한 번 만나서 축하해 주려고 합니다.
우리 영화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건 70년, 80년대부터 충무로에서 다지고 다져서 뿌리가 든든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대하시면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빨간 마후라’로 스타덤에 오르셨죠. 북한군과 공중전 장면에서 신상옥 감독이 실탄을 사용해서 깜짝 놀랐다고요.
“50~60년 전만 하더라도 특수촬영이 없었어요. 죽는 장면에 내 앞에서 실탄을 쏜다기에 겁이 났어요. 잘못 쏘면 가는 것 아닙니까(웃음). 그래서 10m 뒤에서 쏴 줬는데 유리가 뻥 뚫리더군요.
사실 배우는 영화 찍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 건 영광이다, 기억에 남을 거다’ 생각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군의관 근무하고 해군 대위로 제대했는데 ‘빨간 마후라’ 덕에 다들 공군 출신으로 압니다(웃음).”
-존경하는 영화인으로 ‘충무로의 아버지’ 고 김승호 배우를 꼽으셨어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마부’에서 부자간으로 출연했죠.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연극을 좋아했어요. 그 양반 연극을 보고 반해서 한번 같이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마침 배우가 돼서 ‘마부’를 촬영했어요. 마부 역할을 너무 자연스럽게 잘해서 물어봤더니 마부하고 한 달을 살았대요. 역시 실감나게 연기하려면 그렇게 공부해야 한다 생각했죠. 나한테 ‘영화배우는 영화 제작하는 거 아니다, 다 망한다’ 해서 귀담아 들었는데, 정작 자신은 서너 편 제작했다가 망했습니다. 빚쟁이한테 쫓기다 60에 돌아가셨어요. 참 아까운 사람입니다.”
-여배우 중에는 윤정희씨를 눈 여겨 봤다고요.
“어떤 여배우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지만 혹시나 와전될까 봐 답을 못 합니다(웃음). 가장 작품 많이 하고, 호흡이 잘 맞는 사람에 대해선 답할 수 있지요. 윤정희씨는 저와 작품을 많이 한 편이에요. 한번은 파리의 윤정희씨 집에 초대받아 갔어요. 화려하게 살 줄 알았더니 침대와 피아노만 있더군요.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서 행복하다고 했어요. 항상 ‘신 선생님, 서울 가면 마지막으로 영화 한 편 찍어요.’ 얘기했는데…… 이제는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연기자를 꿈꾸면서 치대에 들어간 이유는 뭐였습니까.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안 가겠다고 선언했어요. 어머니가 난리가 났죠. ‘공부 시키려 황해도에서 여섯 살 배기를 데리고 서울로 왔는데, 딴따라가 되려느냐’ 야단맞고 도망쳐서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2년 따라다녀 보니 너무 고생스러워요. 트럭에 세트를 싣고 그 위에 배우와 배우 가족을 태우고 다녔어요. 겨울날 트럭이 쓰러져서 아이들이 깔렸습니다. 그걸 보고 ‘당분간 연극은 접고 안전한 직업을 선택해야겠다’ 싶어 치대에 들어갔죠.
치대에서도 연극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당시 치대 연극부가 굉장히 셌습니다. 작품을 하려니 인원이 부족해서 서울대 전체 연극부를 만들었죠.”
치대 졸업 후 재수 끝에 국가고시에 합격한 그는 서울에 동남치과를 개업한다. 사그라들지 않는 연기 열망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야기는 신 동문의 영화 데뷔작 ‘과부’로 이어졌다.
“당시 한창 영화 제작이 시작될 때였어요. 연극하는 걸 보고 조긍하 감독과 제작자가 우리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영화 한 번 안 하겠느냐’해서 작품만 좋으면 하겠다 했죠. 황순원 원작의 ‘과부’를 가져왔어요. 다 좋은데 머슴 역할이라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겁니다. ‘의사가 머리를 깎아도 되나’ 고민하다가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머리를 깎고 촬영했죠. 신문에 ‘서울대 나온 치과의사가 배우가 돼 멋있게 연기했다’고 호평이 났어요. 당시 배우 중에 공부한 사람이 많이 없으니 좋게 봐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다닌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내셨죠.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배우협회와 영화인협회 회장, 예총 회장까지 하다 보니 문화계 발전을 위해 정책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첫 번째는 선거 운동하다 정치는 할 게 아닌 것 같아 그만뒀고, 다음 선거에 등 떠밀려 출마했다가 큰돈을 쓰고 600표 차로 졌습니다. 아들 집에서 나왔는데 ‘세컨드 집에서 나왔다’고 모략을 해서(웃음)…… 정치 안 하겠다고 단념했다가 기회가 생겨서 전국구 비례대표로 시작했지요.”
-70년대 초에 볼링장을 차리셨어요.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볼링장이 없었어요. 대만에 촬영 갔더니 볼링장이 꽉꽉 차는 겁니다. 이거 되겠다 싶더군요. 자재를 수입해서 다 준비해 놓고 처음엔 ‘우리나라에선 볼링장 안 된다’며 허가가 나지 않아 굉장히 고생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명동 경찰병원 자리 500평 건물에 세를 얻어서 볼링장을 시작했어요. 처음 생긴 거고 영화배우들도 많이 오니까 소문이 나서 잘됐어요. 덕분에 그 빌딩을 사게 됐죠.”
-94세까지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보고 사셨는데, 마지막 꿈이 있습니까. 윤정희씨와 ‘노인과 바다’ 같은 작품을 찍고 싶다고도 하셨는데요.
“‘미나리’ 제작비가 20억입니다. 영화라는 게 꼭 돈만 갖고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좋아야 해요. 누가 작품만 잘 써주면 제주도에서 마지막 작품 하나 하고 싶어요. 90이 넘으니 사는 동안 건강관리 잘 해서 잘 마무리하자 생각합니다.”
-40대에 당뇨병이 생기고도 50년간 철저하게 관리해 오셨지요. 젊었을 적 레슬링으로 체력을 다지셨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골프를 치시고요.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침엔 사무실에 나와 시간 보내고, 점심 먹고 바로 헬스클럽에 가서 두어 시간 운동합니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오늘처럼 많이 신경 쓰고 머리 아픈 일은 될 수 있으면 안 합니다. 배우로 살다 보니 시나리오가 없으면 얘기를 못해요(웃음). 그런데 오늘 와서 이렇게 동문 만나니까 정말 보람 있고, 내가 정말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인규 학습위원장은 외부 강연을 잘 하지 않는 신 동문이 특강 제의를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거듭 설득한 끝에 모셨다며 감사를 표했다.
예정에 없던 청중 질의까지 이어졌다. ‘신 회장님처럼 매력적인 분에겐 유혹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스캔들이 없었냐’고 짓궂은 질문이 나오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배우가 될 때 아내가 ‘치과의사라서 결혼했지, 배우면 결혼 안 했을 것’이라면서 극구 반대했어요. ‘배우를 하더라도 절대 스캔들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평생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배우는 스캔들 생기면 끝’이라고 교육 받기도 했고요.”
‘37년생 안소니 홉킨스처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도전해보는 건 어떠냐’는 질문엔 ‘이제 늦었다’면서도 ‘혹시 아카데미 고문상이면 모르겠다’고 너스레로 응답해 박수를 받았다. ‘내년 치대 개교 100주년 행사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해 달라’는 한성희 치대동창회장의 부탁도 받았다.
이날 행사는 신 동문의 변함없이 젠틀한 매너로 더욱 빛이 났다. 최근 출간한 회고록 ‘엔딩 크레딧’에 일일이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고 사인해 참석자들에게 증정했다. 행사가 끝나고도 동문들의 요청에 함께 사진을 찍으며 팬미팅을 방불케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