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송강정에서 하룻밤
정철(鄭澈)
밝은 달은 빈 뜰에 내리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낙엽은 져서 사립문을 가리고
바람과 소나무가 밤 깊도록 이야기하네
宿松江亭舍(숙송강정사)
明月在空庭(명월재공정) 主人何處去(주인하처거)
落葉掩柴門(낙엽엄시문) 風松夜深語(풍송야심어)
[어휘풀이]
-宿松江亭舍(숙송강정사) : 송강정사에 묵다. 송강정은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자리한 정자이다. 앞에는 무등산에서 발원한 증임강이 흐른다. 정철이 말년에 「사미인곡」
, 「속미인곡」을 지으며 은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정자가 있기 이전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며 당시에는 초막으로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렸다 한다.
-柴門(시문) : 사립문
[역사이야기]
정철(鄭澈:1536~1593)은 조선 중기 때의 문인으로 호는 송강(松江)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은 강원도관찰사,좌의정 등을 역임했다. 이이, 성혼 등의 학자들과 교유했다. 송강은 한시뿐만 아니라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고산 윤선도의 시조와 함께 dnflaksf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한국 시가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작품으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네 편의 가사 외에도 1백 수 이상의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왕실의 인척으로 위세가 높았다. 그러나 명종 즉위 후 발생한 을사사화에 계림군을 비롯하여 부친과 그의 형이 연루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전라도 창평에 낙향해 10여 년을 지냈다. 이때 스승 기대승과 김인후, 유희춘 등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이이, 성혼 등과 고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명종 17년 과거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한 정철은 원칙과 소신을 자진 관료였다. 당시 조정이 동인과 서인의 갈들으로 동인들이 정철(당시 이조판서)을 탄핵해야 한다고 간청했을 때, 선조는 정철은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니 다만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다고 하면서 힘을 다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기엇한다며 그는 백관 주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고 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 이후 정철이 속한 서인은 조정에서 열세였다. 그때 반전의 기회가 왔는데, 정여립 옥사 사건이었다. 당시 정철은 심문을 주관하는 위간이었다. 정여립 옥사 사건으로 주도권을 잡은 정철과 서인 측에서는 전조 생존 시 세자책봉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거론 인물은 광해군이었다. 그런데 이산해가 약속을 배신한 후 오리혀 선조가 의중에 두고 있던 안빈 김씨 소생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를 선조까지 알게 되었따. 이로 인해 정철은 좌의정에서 면직되고 그의 정치 일생은 마감하게 된다.
기축옥사(己丑獄事)
기축사화라고도 한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
정여립은 원래 서인인 이이, 성혼 등과 가까이 교유했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으며 이이는 여러 차례 그를 천거하기도 했지만 그는 동인인 이발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이이가 죽은 뒤 공개적으로 이이와 성혼 등을 비판하며 서인들의 반감을 사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는 동인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나 벼슬을 그만 두고 전주로 내려가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며 대동계를 조직했다. 1587년 전주 부윤의 요청을 받고 대동계원들과 함께 전라도 도서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다.
그런데 1589년 황해감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춘간 등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선조에 고변했고, 체포령이 내려진 후 정여립은 죽도에서 갑자기 죽게 된다.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호로 삼기 위해 정여립 모반 사건을 확대했고, 그 뒤 2년 넘게 서인인 정철 주도 하에 수많은 동인 인물들이 탄압을 받게 된다. 이발, 이길, 이급 형제와 백유양 등 수많은 사람이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영의정 노수신, 우의정 정언신 등 동인의 핵심 인물들이 파직당하게 된다. 특히 조식의 문인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鞠問)은 3년 가까이 계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잡았던 동이들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서인들은 이산해와 류성룡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서인들의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옥사가 마무리되게 된다.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하였다고 확실히 드러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건이 서인으로부터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부터 제기되었다. 동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송익필과 정철의 음모로 날조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