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참선
참선하는 바른 자세, 바른 화두 참구 법을 익혀서 바르게 정립되면,
좌선(坐禪)에 국집(局執) 하지 말고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화두를 참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위산(潙山)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이러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각자 모양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항시 면전(面前)에 출입자재(出入自在) 하는데,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이를 보느냐?”
대중 가운데 한 청신녀(淸信女)가 이 법문을 듣고서,
‘사람마다 모양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일상생활 가운데 쓰고 있다는데,
나는 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고?’ 하는 분심(憤心)이 일어
오매불망(寤寐不忘) 의심하고 참구(參究)하고, 의심하고 참구(參究)했습니다.
이 보살은 세간살이 형편이 너무 어려워
시골 장터에서 빵을 구워 팔아서 생활을 꾸리며 살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화두 일념을 지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을 간절하게 골수에 사무치도록 공부한 결과,
하루는 빵을 굽는 도중에 홀연히 화두 관문(關門)이 타파되어 모양 없는 참사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빵 소쿠리를 팽개쳐 버리고 위산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께서 벌써 간파(看破)하시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것이 모양 없는 참사람이냐?”
그러자 보살이 송(頌)으로 답하기를,
삼두육비대력장(三頭六臂大力將)
일권격파태화산(一拳擊破泰和山)
분파화산천만중(分破和山千萬重)
만년유수부지춘(萬年流水不知春)
머리는 셋이요, 팔은 여섯 가진 대 장사가
한 주먹으로 태화산을 쳐부숨에
천 겹 만 겹의 태화산이 두 동강이 나니
만 년이나 흐르는 물은 봄을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깨달은 경지를 송(頌) 하자, 위산 선사께서 들으시고는,
“그대가 바로 알았느니라.” 하고 인가(印可)하셨습니다.
이 청신녀가 바로 유도바(有道婆) 보살입니다.
이렇듯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서 장사하면서 살아가는 여인네가
화두 관문을 뚫어 일대사(一大事)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참선 공부라는 것이 오로지 마음으로 지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속(僧俗), 남녀(男女), 어떠한 경계(境界), 그 어떠한 형상(形相)과도 무관한 것이 이 참선법입니다.
예전에 능행파(陵行婆), 대산바자(台山婆子), 영조(靈照), 그리고 지금 들어 보인
유도바(有道婆) 같은 분들은 모두 속인(俗人)이면서 여자인 몸으로 도(道)를 깨쳤는데,
그 기봉(機鋒)이 아주 날카롭고 자유자재했습니다.
예전 도인 스님들께서는 조용한 데서 공부를 익히는 것보다
시끄러운 가운데서 익히면 그 힘이 몇 배나 더 수승(殊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공부는 팔풍(八風: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이 불어닥칠 때,
죽음에 다다라 사지(四肢)가 찢어질 때 써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고요할 때만이 아니라
지극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순일(純一)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선방(參禪房)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른 법문을 듣고 바른 지도를 받아서 걸음걸음 화두를 놓지 않으면,
부엌이나 안방이나 사무실이나 만원 버스 등, 가는 곳마다 다 일등 선방입니다.
이러한 공부법을 익히지 않고,
앉아 있을 때는 화두가 있는 듯하다가 서면 달아나고 걸어가면 없어져 버리는,
그러한 공부를 짓는다면 백생(百生)을 하더라도 진리의 눈이 열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좌선법(坐禪法)을 익히는 것은,
앉아서 참구(參究)하는 것이 참선을 익힐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좌선(坐禪)에 익어지면 다음에는 동중(動中)에 무르익어져야 합니다.
가고 오고 말하고 일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익어져서,
화두 한 생각이 24시간, 365일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하는 여기에 실다운 정진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잠시라, 어느새 칠팔십이 되어 병고(病苦)가 닥쳐오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때 가서야 일생사(一生事)를 돌이켜 보고 “헛살았구나!” 하고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 후회해야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지금부터 한 시간 한 시간 화두 참구(參究)에 열(熱)과 성(誠)을 다해,
정진의 신심(信心)을 쌓고 쌓아서, 의심을 짓고 지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일념(一念)이 현전(現前)하여 지속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흐르는 여기에서,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면 활연(豁然)히 열리게 됩니다.
이 선법(禪法)은 천생 만생(千生 萬生) 인신(人身)을 받더라 해도
만나기가 어렵고, 바른 지도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인들께서도,
중생은 다겁생(多劫生)에 지어온 잘못된 습기에 중중(重重)으로 얽혀 있어서,
이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렇게 귀한 법을 만난 김에, 금생(今生)에 각고정진(刻苦精進)하여
나고 날 적마다 진리의 법 가운데서 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산승(山僧)이 공부하는 법에 대해서 법문을 했으니,
대중은 모두 벽을 향해 돌아앉아 각자 앉는 자세가 바른가, 바르지, 못 한가 점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제 조실 큰스님 법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