旌善全氏 臨河君派 應祖公后 祭壇碑文
世上이 急變하여 彝倫이 무너지고 崇祖 思想이 稀微해져 宗親間의 敦睦之情마저 옅어지는 炎涼世態 속에 살고 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활짝 피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 (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蕡其實)’ 우리 人間의 뿌리는 祖上이다. 이제 뿌리 깊고 자랑스러운 旌善全氏 臨河君派의 來歷을 簡單히 살펴보고 達城郡 嘉昌面 주동에 모신 先祖의 由來를 碑文에 記録하여 世傳코자 한다.
旌善全氏는 18分派 中始祖 全愃(八世)이 旌善君으로 封해져 貫으로 삼았다. 以後 世世로 賢英이 不絶하여 簮纓을 承襲하니 忠孝와 學問이 傳遞되었다. 愃의 九世孫이신 以甲과 義甲 兄弟가 高麗를 統合한 開國功臣이 되었다. 始祖로부터 41世 諱 應祖公이 臨河君派의 派祖이시다. 公은 乙巳黨禍를 피하여 不起하셨으나 贈 正憲大夫 户曹判書 臨河君으로 追封되셨다.
아들 諱 龍公은 字 汝見 號 石泉으로 龍蛇之亂을 당하여 宣祖 避難時 扈駕하던 중 宗廟의 社主를 모시고 오라는 命을 받들어 돌아오는 길에 倭軍에게 包圍되어 捨生取義의 精神으로 적을 擊殺하기에 이르렀으나 衆寡不敵으로 왼쪽 뺨이 잘리고 귀가 떨어져 이빨이 드러났으나 九死一生으로 行在所에 到達하였으니 그 忠節은 누구도 敢이 흉내 낼 수 없었다. 忠勤貞亮謁聖效節協策扈聖功臣 號를 받고 贈 資憲大夫 刑曹判書 石陵君에 封해지셨다.
公의 4子 大鵬公과 5子大鳳公 兄弟가 壬亂 때 星州로 移居하였다. 3代를 내려가서 昌寧에 계시던 諱 胤毫公(45世) 配 恩津宋氏의 두 분 先塋을 雲發公(46世)의 配 光州盧氏가 먼저 주동으로 移居하시어 그 아들 爾三公(47世)代에 와서 祖父母(胤毫公)님과 先親(雲發公)을 주동으로 緬禮하시니 公(爾三公)이 곧 주동에 터를 잡은 入鄉祖가 되신다. 公의 配는 金海金氏이시다.
마침 昌寧에서 모시고 올 때 胤毫公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土地 林野 等도 함께 整理해왔으니 오늘날 門中의 大小 經費를 調達함에 窮乏치 않음은 모두 이 때문이다. 이에 세 분의 先祖가 合葬으로 모셔져 있고 또다시 범바위골에 계신 載新公(48世)과 配 盆城金氏를 모셔와 合葬하여 祭壇을 設置하고 豎碑하여 胤毫公 後孫들의 聖地로 삼으려 한다.
特히 載新公은 正三品 堂上官인 通政大夫로 奉職하시면서 牧民에 힘을 쓰셔 德治를 베푸셨고 靑氈을 이어받아 家門을 일으키셨다. 門中일에 積極的이어서 주동 全씨가 지금처럼 蕃盛하게 된 것도 모두 公의 恩澤이다.
山川은 光彩 뿜고 松楸는 拜禮 하네
햇볕이 따스하니 祥瑞로운 地氣일세
안산의 精氣 모여 절태골 휘감으니
後孫들이 繁昌하고 萬歲無窮 하리라
二千二十參年 閏 3月 日
密城 朴和植 謹撰
[자료제공] 정선전씨 대종회 회장 전오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