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이자 작사가인 노엘 카워드의 모노드라마 ‘오늘 저녁 8시30분’의 ‘스틸 라이프(Still Life)’를 카워드 본인이 각색한 <밀회; Brief Encounter>는 TIMES에서 뽑은 ‘로맨스영화 베스트20’중 하나로 제1회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황금종려상)를 수상했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로라의 플래시백과 일인칭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콰이강의 다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데이비드 린의 걸작을 떠올려 본다면, 그가 이 간질간질한 로맨스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상상하기가 짐짓 어렵다. 그러나 <밀회>는 그가 위의 영화들에서 보여주던 완벽함에 섬세함이라는 덕목이 더해진 초기 데이비드 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영화다. 특히 로라의 독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치밀한 심리적 묘사는 성적 긴장감을 드러내던 <인도로 가는 길> 같은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거기에 흑백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우아함은 영화 전체를 마치 그림엽서를 보듯 매혹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데, 특히 밀포드 승강장을 포착하는 린의 카메라는 뤼미에르 형제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준 충격에 버금갈 만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주인은 바로 노엘 카워드다. 그는 극작가로 그리고 작사가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우울한 노년을 보낸 인물이다. 사실 완벽한 이성애 로맨스 영화인 <밀회>에서 카워드의 동성애적 감성을 찾기란 늘 분홍색 벨벳가운을 입고 집필했다는 일화 등을 제외하고는 표면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스크린’ 誌의 필진인 앤디 매드허스트가 밝히고 있듯 <밀회>는 카워드의 동성애적 감수성이 깊게 배어있는 텍스트다. ‘그 특별한 흥분(That Special Thril)’이라는 글에서 매드허스트는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밀회>라는 텍스트에서 카워드가 지워지게 된 과정을 살핀다. <밀회>는 영국 저널인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베스트 10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매드허스트는 <밀회>가 가진 폭탄 멜로의 동인이란 바로 달콤 쌉싸름함(bitter sweetness)이라고 했다. 즉, 욕망하기의 달콤함과 그 욕망의 이루어질 수 없음이 가져오는 비애가 바로 <밀회>의 정서적 동인이라는 말인데, 매드허스트는 이를 남성 동성애자들이 가지는 특별한 정서적 양태와 닿아있음을 제기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견해는 다분히 근원주의적 발상으로 보이지만,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유부남 유부녀의 정서를 마치 바늘로 후비듯 정확하게 폭로하는 카워드의 대사는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동성애적 감수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런던 교외 밀포드역 구내다방. 말없이 조용히 차를 마시는 중년 남녀. 수다스런 한 여인이 나타난다. 깨어지는 두 사람의 분위기. 이윽고 남자는 자리를 뜨고 기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창백한 표정의 여인은 한참 만에 일어나 다방을 나간다. 집으로 돌아온 여인, 그리고 여전히 크로스워드 퍼즐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 여인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흐마니노프의 <제2번 콘체르토>를 들으면서 반 방심상태로 생각에 잠긴다.
"나, 로라는 선량한 샐러리맨의 아냅니다. 어머니로서 주부로서 평화로운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밀포드를 다녀옵니다. 쇼핑하고 영화보고 저녁에 기차로 돌아옵니다. 나에게 유일한 낙입니다. 6주전의 일입니다. 기차를 기다리다 눈에 석탄재가 들어갔습니다. 어느 낯모르는 의사 한 분이 친절하게 눈을 닦아 주었습니다. 다음 목요일 나는 그와 우연히 또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목요일 나는 그와 레스토랑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알렉. 그는 내 집의 반대방향에 살면서 매주 목요일마다 밀포드 병원으로 환자를 보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병원에 안 가고 나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 이야기를, 나는 남편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목요일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운한 한편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목요일, 가을 햇살을 가득히 안으면서 우리는 식물원을 걷고 보트를 타고 그리고 서로의 격렬한 사랑을 고백하며 식물원 나무그늘에서 서로의 입술을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 로라는 알렉을 따라 그의 친구 아파트로 갔지만 갑자기 친구가 돌아오자 아파트를 뛰쳐나와 거리를 방황하다 역에서 그에게 이별편지를 씁니다. 그때 나타나는 알렉, 그 역시 죄책감 끝에 자기 자신을 되찾고 2주일 후 아프리카 병원으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역구내다방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 또 그 수다쟁이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나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날 용서해주시오. 만나는 것도 미안하고 헤어지는 것도 미안하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기차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습니다. 혹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난 급행열차에 뛰어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습니다. 멀어져 가는 기차의 테일 라이트를 쳐다보면서 나는 슬펐습니다. 남편은 나의 이상함을 눈치 챈 것 같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만 했습니다.
<밀회>의 시작은 어느 기차역에서 입니다.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난 곳이 기차역이고 마지막으로 헤어진 장소 역시 기차역입니다. <부베의 연인>이나 <남과 여> 같은 작품이 남녀의 관계와 기차와의 묘사를 잘 사용한 작품들입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유부남과 유부녀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다가온 사랑의 감정에 흔들립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가정과 아이들을 버리고 탈선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도 아닙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사랑에 빠진 유부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서 마치 고해를 하듯이 영화를 전개합니다. 그래서 스토리의 영화가 아닌 표현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불륜 영화에서와는 달리 겉으로는 뜨겁고 격정적이지 않습니다. 불륜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거부감과 통속적인 느낌은 영화 속 영상에서 펼쳐지지 않고, 두 주인공이 벌이는 행동도 지극히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1940년대 영화란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로라가 고백해 나가는 알렉과의 사랑은 중년의 격정적인 불륜의 느낌보다는 첫 사랑을 맞이하는 소녀의 설레임과 같이 다가옵니다. <밀회>에서 벌어진 사건은 요즘의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바람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정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불륜을 벌이는 것은 아닙니다. <밀회>는 그런 욕구불만 속에서 벌어진 탈선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가슴에서 우러나는 벅찬 사랑의 감정을 몇 주간의 이야기 속에서 다룬 영화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감정이 솟아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방향이나 도덕적 관념과는 무관한 감정,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아파하고 번민합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이성이라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 사랑의 감정만큼 이성으로 조절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밀회> 주인공들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배우자에게조차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연들이 어느 누구의 가슴속에 속속들이 새겨져 있을지 그 누가 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