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이 반도체 투자자에서 공장주로의 변신을 노린다. 아랍에미리트(UAE) 같은 석유 강국들이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할 뿐 아니라 자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기지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3일 삼성전자와 TSMC가 UAE에 대규모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UAE 정부와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TSMC 최고경영진과 삼성전자 고위 간부가 각각 UAE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은 이 프로젝트가 1000억달러(약 14조3585억엔) 규모로 UAE 정부계 펀드인 무바달라가 자금 조달을 맡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중앙일보 문의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답했고, TSMC는 블룸버그에 "지금 밝힐 수 있는 새로운 투자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 '큰손'에서 '제조'로 옮겨가나
그동안 중동은 AI나 반도체 같은 첨단기술의 큰손이었다. AI를 석유의 다음 수익원으로 삼으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샘 알트만 오픈AI CEO의 '엔비디아를 대체할 AI 반도체' 구상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마다 자금줄로 이름이 올랐다. UAE 국영 AI기업 G42는 미국 AI 반도체 스타트업 셀러브리티러스와,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기업 아람코는 미국 글록과 대형 AI 인프라 구축 계약을 맺었다. 지난주 UAE의 기술 전문 투자사 MGX는 블랙록,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1000억달러를 조달해 AI 인프라에 투자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국 내 반도체 제조기지를 설립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됐다. 무바달라는 세계 5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미국 글로벌 파운드리즈의 최대주주이지만 이 회사의 제조기지는 미국에 있다. 무바달라는 글로벌파운드리스 주식 85%를 보유하고 있지만 올 들어 이 회사 주식 1조2000억원 상당을 처분했다.
◇ 삼성이 중동에서 반도체를?
중동은 기후와 산업 특성상 반도체 제조기지로 크게 고려되지 않았던 지역이다.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다량의 산업용수와 엔지니어를 현지에서 확보하기 어렵고 기존 반도체 공급망과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오일머니'의 자금 동원력과 가격이 저렴한 전기요금은 강점으로 꼽힌다.
반도체 업계에서 주목하는 것은 AI 서비스와 인프라의 결합이다. 중동 부유국들이 주요 AI 소프트웨어 기업에도 막대한 투자를 해왔기 때문에 반도체와 같은 인프라와 AI 서비스를 결합해 'AI 대중화'를 견인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무바달라는 오픈AI의 대항마로 꼽히는 앤솔로픽 주식 5억달러 상당을 보유하고 있으며 오픈AI와도 투자를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중국의 뒷문' 미국 의심 풀어야
걸림돌은 '중동이 중국으로 AI·반도체가 흘러가는 뒷문이 아니냐'는 미국의 의심이다. 오는 23일 무함마드 UAE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을 만나는데, 이 자리에서 양국의 AI와 기술 협력이 주로 다뤄질 전망이라고 UAE 언론은 보도했다. G42는 지난 4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15억 달러의 투자와 경영 참여를 받아들였는데, 미국의 의심을 씻고 AI·반도체에서 미국과 밀접 협력하기 위해서다.
◇ 제조업체 해외전략 고심
삼성, TSMC, 인텔의 해외 전략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 등 각국의 반도체 국내 생산 기조에 따라 보조금을 받아 해외 제조기지를 설립하고 있지만 인력과 자금 확보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난을 겪는 인텔은 지난주 사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하고 독일 폴란드 말레이시아의 제조기지 건설을 중단했다.
각 회사는 시장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효율성은 높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에 대형 반도체 팹을 만드는 TSMC는 양질의 제조인력 수급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싶은 대만의 젊은 직원들을 대거 파견해 이를 해결하는 중이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TSMC 애리조나 공장 직원 2000명 중 1000명은 대만 본사에서 파견했으며 이들의 가정에서 2년 동안 200명 이상의 신생아를 출산했다. 아이를 미국에서 낳아 영주권을 얻으려는 대만인 직원들의 자원으로 미국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