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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교사들의 결국
유다 1:11-16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12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 1:11-16 / 그자들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들은 동생을 죽인 가인을 본받고 있습니다. 발람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거침없이 해치웁니다. 그들은 고라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죄로 저주받아 죽을 것입니다. 12)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애써 차린 사랑의 식탁에 끼어 든다면 악취를 풍기게 될 뿐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면서 먹어댑니다. 그들은 마치 메마른 땅에 비 한 방울 내려 주지 못하고 바람에 밀려 다니는 구름과 같아서 약속은 많이 하지만 실행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수확철이 되어도 열매 하나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한 번만 아니라 이중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결국 뿌리째 뽑혀서 불에 태워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3) 그들이 뒤에 남겨 놓는 것은 모두가 해변에 밀려든 거센 파도가 남기고 간 더러운 찌꺼기와 같은 수치와 불명예뿐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별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갈 길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영원한 어둠과 암흑입니다. 14) 아담의 7대손이었던 ㄱ) 에녹은 이미 이런 자들이 있을 줄 알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께서 수백만의 거룩한 자들을 거느리고 오셔서 (ㄱ. 에녹1서 1:9, 5:4, 60:8) 15)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앞에 세우고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무서운 반역 행위가 밝혀지고 또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온갖 불손한 말이 백일하에 드러나 그들은 응분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16) 이런 자들은 언제나 불평만을 늘어 놓을뿐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악한 일이라도 태연하게 해내며 큰소리를 치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때라곤 무엇인가 얻으려는 속셈이 있을 때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패역한 죄악을 범하여 멸망을 당한 가인과 발람과 고라처럼 행하다가 결국 주님의 재림 날에 정죄를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11-13)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패역한 죄악과 타락한 영적 상태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생을 죽인 가인처럼 무자비하게 형제를 파멸시키며, 발람처럼 불의한 삯을 위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죄악으로 이끌었으며, 고라의 무리처럼 당을 지어 하나님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대적하여, 육과 영이 이미 멸망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거리낌없이 성도들의 애찬에 동참하여 먹으나 선박을 파손하는 암초처럼 형제들을 파멸로 이끌며, 목자 행세를 하나 자기 배만 불리고, 겉모습으로는 농사철에 비를 뿌려주는 반가운 구름처럼 기대를 부풀게 하지만 실상은 전혀 비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메마른 상태이며, 뿌리까지 뽑혀버려 열매 맺을 수 없는 나무와 같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바다의 물결이 온갖 더러운 것들을 해변으로 가져와 거품과 함께 쏟아 내듯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수치러운 죄악뿐이며 궤도를 이탈하여 잠깐 빛을 발하는 유성처럼 현재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빛을 잃고 영원한 흑암으로 떨어질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 교사들은 외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실은 각종 패역한 죄악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주께서 뭇 사람을 심판하사(14-16) 주님께서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셔서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24:31; 살전 3:13). 15절의 뭇 사람들이란 곧 이어 언급되는 모든 경건하지 않는 자를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함께 임하셔서, 거짓 교사들을 비롯하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와 완악한 말을 근거로 정죄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원망과 불만과 자랑과 아첨, 그리고 정욕으로 행하는 모든 말과 행위 등이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16). 그뿐 아닙니다. 그들이 행한 모든 행위, 모든 은밀한 일까지도 심판을 받을 것이며(전 12:14; 롬 2:16), 결국 그들은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나는 혹시 거짓 교사들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죄악으로 물들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 심지어는 모든 은밀한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시며, 선악 간에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오늘 하루도 늘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도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면 어떨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화려한 언변과 행동과 지식을 내세우는 것이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지혜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약속할지라도 뿌리 없는 나무, 바다의 물결, 유리하는 별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열매없는 가을나무
유다서 1:10-13 / 엄기호 목사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나무로 많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든지,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등으로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유익하고도 귀중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나무들이라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저 밭의 땅만 차지하고 서있다면 땔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제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 포도가 웬일인고”(사 5:1-7)하며 나쁜 열매를 맺은 유다를 향해 탄식했고, 누가복음에는 3년 동안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13:6-9). 또한 성경에는 시장하신 예수님이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가 나무를 보시고 저주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1:18-22).
한편 오늘 본문의 저자인 유다도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가을나무’의 예로 역사적 교훈으로 악명 높은 세 사람, 곧 가인, 발람, 고라를 언급하면서 믿음을 지키지 않는 자, 거짓 선지자의 최후가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12, 13절).
이에 본문에 나오는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은 이 세 사람을 통해 현재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보고, 열매 맺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가인
가인과 아벨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입니다. 세월이 지나 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첫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야웨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였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4장). 이 일로 아벨을 질투한 가인은 결국 분노와 시기심,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은 가인의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 3:12). 성경은 인간이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7)고 했습니다. 가인의 악한 행실이 결국 그를 죄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가인은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성의 없고, 준비가 부족하며, 믿음도 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즉 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이며, 피와 상관없는 제사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주 독선적이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교만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히 11:4). 아벨은 바로 피 흘림의 제사, 겸손과 희생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드리는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도 아벨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인과 같은 마음의 자세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과 기도를 열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선택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찾아내는 성도,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발람
발람은 모압 왕 발락에게 매수되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속이고, 욕심을 부려, 삯꾼의 길을 걸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케 했습니다(계 2:1 ; 민 31: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놓은 올무에 미혹되어 모압 여자들과 음란하게 간음을 했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에게 절을 하며 숭배하는 등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질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이용하고, 배반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인권을 유린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또한 탐욕의 철저한 포로가 된 사람들은 임금착취, 부정한 뇌물을 받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손쉽게 부를 축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악의 길, 거짓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했던 발람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유다는 “하나님의 화가 이르리라”고 말하며, 이들이 돌아갈 곳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13절)일 뿐이라고 단언합니다(13절).
지금 우리 시대도 온통 거짓과 아첨과 기만으로 뒤범벅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 거짓 조언과 가르침으로 안내하는 발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성도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발람과 같은 사람들, 거짓 교사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듣기 좋은 말로 미혹하며 그릇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사람들을 분별하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 고라
어떤 단체나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그것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미래의 꿈을 심어주느냐, 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집단의 분위기가 크게 좌우됩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겠지만, 위기를 당할 때 지도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 집단의 향방과 미래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6장에 보면,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야웨의 종인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대항하고, 우리도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면서 성직을 탐하고 시기 질투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라’와 ‘다단’과 ‘온’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당을 짓고 지도자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할 일은 그 당시 고라는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고 이름이 알려지면, 더 높은 위치에 서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위치에 오르기 전에 먼저 준비가 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무시하고 교만히 행하며, 반역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확연히 보여줍니다(민 16:31-33).
그러므로 평신도이든, 교역자이든, 직책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께 위임받은 그 위치에 바로 서있는 사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 만족하는 사람인 것을 깨닫고 작은 일이도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와 같은 삶을 산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만과 오만을 행하며,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뿌리까지 뽑힌 나무같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야생 올리브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유사 올리브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하나만 제외하면 실제의 올리브 나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야생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까?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열매는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영적 과수원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햇빛과 흙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올리브, 열매 없는 가을나무가 아닌지 반성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전도의 열매, 성령의 열매, 삶의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열심히 일을 하여, 많이 추수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신앙생활의 3대 암초
유다서 1:11-13 / 강문호 목사
두 주 전에 나는 300여명과 함께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고 이탈리아 크루즈 여행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여행객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 55개국에서 2천명 정도였습니다. 한 사람당 여행비가 대략 500만원이었으니 한번 크루즈가 도는데 100억이나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78,500 톤 선박입니다. 승무원이 770명이었습니다. 배 길이가 280 m였습니다. 63빌딩이 239m입니다. 63빌딩 뉘워 놓은 것보다 40m가 길고 높이는 11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배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암초입니다. 아무리 큰 배라고 암초에 부딪치면 치명적입니다.
항해하는 선박은 암초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도 3가지 암초가 있음을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암초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필라스라고 하는데 이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암초인 바위가 배를 파괴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의 암초는 신앙생활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3대 암초는 무엇입니까?
본문이 정확하게 그 정체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화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11)
본문은 가인을 파멸로 이끈 암초와 발람을 멸망시킨 암초와 고라를 죽게한 암초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파멸시키는 암초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가인의 길의 암초
가인의 길의 암초는 무엇이었습니까?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목축을 하면서 가장 좋은 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때 가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좋은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신앙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같은 암초입니다.
어떤 집에서 염소와 나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염소보다 나귀를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을 안 염소는 시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해칠 계략을 꾸몄습니다. 기회만 보고 있던 어느 날 주인이 나귀를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귀야! 네게 대한 주인의 태도가 너무 경박해! 무거운 짐만 싣고 일만시키고 어쩌다가 한번 잘못 하면 때리기만 하니 억울하지? 그렇지만 주인의 태도를 고칠 방법이 있다. 짐을 싣고 개천을 건널 때 피곤한 것처럼 하면서 넘어져 버려. 그러면 주인은 네게 무거운 짐을 싣지 않을 거야.>
이 말을 들은 나귀는 정말 개천을 지날 때에 피곤한 척하면서 일부러 넘어졌습니다. 주인은 처음당하는 일이라 당황해하며 수의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수의사는 진찰하더니 다리가 좀 상하였는데 염소간의 피를 바르면 나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인은 곧 집으로 돌아와서 염소를 잡아 간의 피를 나귀에게 발라주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신을 파괴시키는 암초입니다. 가인과 같이 시기와 질투의 길을 가는 자는 암초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동네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둘이 다 마라톤 시합에 나갔습니다. 한 친구가 1등을 하여 금메달을 탔습니다. 동네를 빛낸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프랭카드를 걸었습니다. 동상도 세웠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 동상을 바라보며 친구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사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동상이 쓰러지도록 조금씩 팠습니다. 어느 날 밤 또 동상밑을 파내려갔습니다. 그날밤 동상이 무너지면서 그 동상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파멸로 이끄는 신앙생활의 암초입니다.
남이 잘 하는 것은 시기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도전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아니할 때에 다음에는 더 잘 하리라는 다짐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가인은 더 좋은 결과를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인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남이 잘 되면 그 분의 비결을 배워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남이 성공하면 축하하여 주면서 그 분의 비법을 배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적 자세입니다.
▶ 가인의 길과 반대되는 길이 있습니다.
바나바의 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를 튼 교회로 부흥시킨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부흥시킨 교회의 지도자를 자기보다 못 한 바울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뒷바라지하여 주었습니다. 바울을 바울로 만든 숨은 공로자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없는 바울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성경 최대의 목회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밑에서 보조하여 주었습니다.
가인의 길과 반대되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2. 발람의 길의 암초
신앙생활에 두번째 암초가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입니다. 돈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황금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발람은 이방왕 발락이 돈을 많이 준다고 유혹하자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고 음행에 빠지게 한 거짓 선지자입니다(민31:16-19)
자신에게 돈이 들어온다면 남은 피해를 보아도 좋다는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만 부자가 된다면 민족은 망하여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자기고 있는 자입니다. 선지자면서 돈만 아는 이였습니다. 돈만 주면 민족을 저주하는 기도까지 한 이입니다.
돈이 신앙생활의 암초입니다.
돈에 얽매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생활을 게을리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이면 다다.>
돈 제일주의로 살아 온 가치관의 주인공이 발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결국은 물질을 아까워 하다가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를 본 시몬이 돈을 가지고 와서 말했습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8:19)
시몬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다고 여기는 황금만능주의자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행 8:21-22)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할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40년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예수 이름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은과 금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가 신앙생활의 암초입니다.
■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자고 약속한 세 명의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길을 가다가 금덩어리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약속은 순식간에 그리고 무언중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 명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두 명이 하나가 되어 다른 한 명을 물에 빠뜨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 명을 죽이고 술을 마시며 말했습니다. <우리 둘만의 분배를 위하여.> 두 강도는 배에서 내려 호젓한 길을 가다가 집 한 채를 발견하였습니다. 한 명이 집안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오겠다 들어갔습니다. 조금 후 그는 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다른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조금 후 그도 싸늘한 시체로 길거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밖에 있던 한 명이 흑심을 품고 식사 후 먹을 물에 독약을 타두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돈 제일주의가 일으킨 사건입니다.
▶ 그러나 반대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스러운 부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노인부부가 동반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남편 리챠드 브라운은 79세였는데 관절염에 걸렸습니다. 부인 헬렌 여사는 76세로 알츠하이머 병에 걸렸습니다. 둘이는 53년간 살면서 80억원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자살하면서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최고로 치료받을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여생을 마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게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돈이 세계의 어린이와 도움이 필요한 젊은 이들에게 쓰여지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자라서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을 벌고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그런데 물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물질을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물질을 벌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길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는 돈의 암초였습니다. 우리도 걸리기 쉬운 암초입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 광고를 보니까 <솔직히 나는 돈이 좋다>는 책이 있었습니다. 오숙희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돈은 좋은 것입니다.
복권이 유행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복권이란 <최저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남기려는 수단>입니다. 가장 손쉽게 떼돈을 벌어 보겠다는 시도입니다.
최근 조사를 보니 직장인 39%가 로또 복권을 샀다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율은 814만분의 1입니다. 사람이 비오는 날 벼락 맞아 죽을 확율은 60만분의 1입니다. 그런데 날벼락을 맞을 확율은 200만분의 1입니다. 비오지도 않는 날 벼락맞는 것을 날벼락이라고 합니다. 비오지도 않는 날 날벼락을 하루에 네 번 맞는다는 것은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이런 확율을 믿고 복권을 사는 것은 정말 언어 도단입니다.
우리는 사행심을 바라는 복권을 사지 말아야 합니다.
■ 대조적인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두 명다 돈을 엄청나게 번 미국의 부자입니다. 한 명은 하워드 휴즈라는 부자이고 다른 한 명은 코닥 칼라를 만든 죠지 이스트만(Geoge Eastman)입니다. 먼저 하워드 휴즈를 소개합니다. 그의 목표는 오직 돈이었습니다. 악착스럽게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이름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977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20억불 그러니까 약 2조원 가량을 남겼습니다. 그는 라스베가스에 호텔, 유흥장. 비행기 회사, 영화사, 방송국등 50여개 업체를 경영하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은 것입니다. 당시 미인 여배우 에바 가드너와 살기도 하였습니다. 헐리우드의 수많은 여배우들과 지냈습니다. 돈과 여자와 명예를 원없이 소유하였던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10년전부터는 폐결핵으로 유리로 차단된 벽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자기를 죽이고 자기 재산을 빼앗으려고 음식에 독을 넣어 죽이려한다는 피해망상증에 걸려 음식을 먹지 못하여 몸은 오징어처럼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병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자가용 비행기로 병원으로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비행기가 지금 남아 있는데 나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돈을 하워즈처럼 많이 벌었으나 돈이 목적이 아니라 선교가 목적이었던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코닥 칼라를 만든 죠지 이스트만입니다. 그는 한 빈민촌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그 날 그 날 먹고 살면서 근근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죠지의 어머니는 늘 아들이 자기 전에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것이 버릇이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죠지가 훌륭히 자라 이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어머니는 늘 침상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세멘트 바닥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여자이지만 남자들처럼 힘든 노동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죠지는 어머니가 기도하고 나가시면 자기도 늘 기도하고 잠에 들었습니다. <내 어머니의 기도가 헛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크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죠지는 사진관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기술을 배웠습니다. 친절하고 사진찍는 기술이 좋아 소문이 났습니다. 그는 조그만 가게를 내어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편한 휴대용 필림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상품이 폭팔적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공장을 짖고 생산라인을 증설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갑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죠지 이스트만은 코닥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돈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축복하시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발람의 암초가 우리의 암초입니다.
3. 고라의 길의 암초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악당입니다. 같은 레위 자손으로서 자기들도 제사장의 명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민16:1-35)
명예주의자들이었습니다.
명예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암초가 고라의 암초입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교회가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러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 할 우리가 받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 어떤 저명한 한 사람이 봉사하겠다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봉사직이 주어지자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으로부터 저를 끌어내어 주십시오. 저의 의무를 행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 있는 저를 낮추어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겸손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얼마나 겸손하고 섬기려는 자세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라는 자기들도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명예주의가 신앙생활의 방해물입니다. 섬기려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는 암초입니다.
이같이 유다는 신앙생활의 암초를 세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1. 가인의 길의 암초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2. 발람의 길의 암초는 황금 즉 돈이었습니다.
3. 고라의 길의 암초는 명예였습니다.
이같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있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유다는 재미있게 6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품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함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12-13)
이같이 가인의 길을 가고, 발람의 길을 행하고, 고라와 같이 일하는 자는 애찬의 암초입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애찬을 즐기고 있는 데 암초입니다. 참 기쁨과 참 교제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사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과 같은 이입니다. 이는 허위와 거짓만 있는 자입니다. 가식만 있는 자입니다. 알맹이가 없는 자입니다. 고무풍선과 같은 자입니다.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나무같은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참된 생명이 역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을이 되었으나 열매가 없습니다. 말만 많지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품는 바다의 거친 물결같은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불평만 하는 사람입니다. 거품만 품어댑니다. 이런 사람을 좋아할 이가 없습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함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저주와 멸망받을 사람입니다.
이렇게 암초가 있는 길을 가는 사람은 어디에 가나 사람도 싫어하고 하나님도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3대 암초를 제거하여야 합니다.
진실된 믿음이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을 바에야 이렇게 믿고 싶어 어제 설교문을 쓰다가 울었습니다.
■ 만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공산단이 총을 겨누며 들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예배중인 교인들을 한쪽 구석을 몰아 세우더니 예수님의 초상화를 땅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너희들 중에 살고 싶은 놈들은 이 예수님 초상화를 발로 밟아라. 그리고 침을 뱉아라. 그러면 밖으로 나가도 좋다! 그렇지 않은 놈들은 살아서 교회 문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서로 눈치만 살피며 침묵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침묵이 깨졌습니다. 한 명이 예수님 사진 앞으로 나가더니 발로 밟고 침을 뱉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어서 용기없던 이들이 한 명 두 명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공산당이 겨누는 총구앞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범벅이 되고 침으로 더러워진 예수님의 초상화를 자기 옷을 닦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부질없는 목숨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깜짝 놀란 대장이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놈들아! 예수를 믿으려면 이 사람처럼 믿어라.> 그리고 잠시 후 교회 마당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전도사님이 나가보니 온 교인들을 사살하고 공산당은 사라졌습니다. 전도사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장례를 혼자서 다 치루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이같이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을 가는 자는 늘 남에게 독만 뿌리는 이라는 것이 유다의 외침입니다. 시기와 질투, 돈, 명예는 암초가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암초는 결국은 마귀가 주는 것들입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서 신앙생활의 암초를 제가하고 시온의 대로가 열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망 불평의 죄
유다서 1:15-16 / 김홍도 목사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큰 죄가 아닌 줄 알지만 멸망과 불행을 가져오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2주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다가 불평하던 사람들이 다 죽은 다음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녀를 합치면 약 1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15절에 보면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거스려 불평하고 원망한 강퍅한 말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출애굽 해 나왔는데도 앞에 홍해가 가로 막히고 뒤에 애굽 군사가 쫓아온다고 금방 울부짖으며 원망하기를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겠노라”고 악한 말을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있어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찌니라”하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 때 홍해가 갈라지며 육지가 되어 그 가운데로 건너가 구원을 받고 애굽 군사는 뒤따라오다가 모두 바다에 수장 지내고 말았습니다.
▶ 또 민수기 11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또 원망하고 불평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애굽 군사들이 병거와 함께 수장 지낸 것을 보았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보면서도 그리고 아침마다 맛있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으면서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11장 4-6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고 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만나는 갓씨와도 같고 진주와 같이 생겼으며 기름 섞은 과자맛 같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맛있겠나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감사는 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주어 먹게 한 다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 또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 사람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는 모두 백성 앞에 불신앙적인 말,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성읍은 견고하고 아낙 자손들은 얼마나 대장부들인지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 새끼와 같다고 보고하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다(민수기 14장 1절)고 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불평 원망 했습니다.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한 그 말대로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면서 다 죽게 한 다음 불평 대신 믿음의 말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원망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도 복을 받지 못하고 가정을 불화케 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다른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며 현재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욕심, 탐심을 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나 친척들 중에 원망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하고 불행해지고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평소에 하는 말 원망과 불평의 말도 다 들으시는 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망 불평은 전염성이 강해서 유행병처럼 퍼져나갑니다. 처음에 “섞여 사는 무리”가 불평하기 시작하니까(민수기 11장 4절) 온 백성에게 퍼져서 온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원망 불평하는 자를 극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열두 정탐꾼 중에 10명이 불평의 말을 하니까 온 백성이 밤새도록 곡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직분을 맡기지 않을 뿐 아니라 내쫒아 버립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나아가서 교회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는 용서할 수 있으나 이런 분자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1. 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원망과 불평은 사탄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입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에게 불평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를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하면서 소 떼, 양 떼 모두 다 도적맞고 불타 죽고, 자녀 10남매가 대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입으로 원망의 말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장 22절)고 했습니다. 마귀는 욥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오게 하려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갖다 주었지만 실패하고 도망갔습니다. 온몸에 악창이 나고 구더기가 버글버글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결코 그 입술로 범죄 치 않았습니다. 결국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평이 자꾸 나올 때는 내가 기도가 부족하고 은혜가 떨어져서 마귀가 나를 시험하는구나하고 빨리 회개하고 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2. 원망,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할 때, 그들은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하는 말은 요사이 말로 “예수 안믿을 때가 더 좋았다. 천당이구 뭣이구 다 귀찮다. “에이, 교회 그만두자”하는 말과 같습니다. 마귀의 종노릇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때가 더 좋았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실 말입니까.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말, 불평의 말을 다 들으시는 분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을 쫓아낸 것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쇠고랑을 찼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쁨으로 찬송하고 기도했더니 쇠고랑이 풀려져 나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옥사장과 그 가정을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불평할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하면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더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밖에 있는 자유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더구나 저주 받고 지옥에나 가야 마땅한 사람이 구원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으로 감사는 하지 않고 불평이나 하고 원망하는 말이나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해 하시고 괴씸히 여기시겠습니까? 불평, 원망은 축복을 도망가게 하고, 마귀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3. 원망과 불평은 모든 행복과 건강을 빼앗아 갑니다.
불평마귀에 잡힌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의복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도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끌어들이는데 행복합니까? N.V.Peale 박사의 글에 보면 어떤 여자가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반지를 끼고 기차를 탓는데,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시켜놓고는 음식 맛이 없다느니 종업원이 불친절하다느니 기차는 왜 이렇게 더럽냐느니 등등 계속불평만 늘어놓더랍니다. N.Peale 박사는 그 여자를 “불평 만드는 공장”이라고 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평 원망하는 사람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자신도 결국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거나 죽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신경쇠약이나 노이로제나 위장병, 불면증 등에 걸려 건강한 생활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했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징 13절)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장 6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망, 불평 대신에 기도에 힘씁시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네가 불평거리를 광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상품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나는 구두가 없는 것을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사람들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