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313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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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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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nw51RGZqOc
[서울대교구 김용주 마태오(구의동(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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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극적인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수많은 성인 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기구하고 특별한 생애를 보낸 분이 오늘 축일을 경축하는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입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한 요안나는 9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 6명의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내 역시 남편을 존경했습니다.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던 남편이 친구의 오발 사격으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병했지만, 안타깝게도 워낙 중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요안나의 상실감과 비통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뭐라 말을 잇지 못했고, 다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루 온 종일 방안에 칩거하던가, 깊은 산속에 가서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암울했던 요안나의 인생에 한 줄기 희망의 서광이 비추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 존재를 통해서였습니다. 33세 되던 그녀가 친정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갔었는데, 그곳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를 뵙는 순간, 요안나는 꽉 막혔던 물꼬가 갑자기 터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목표나 방향성을 이분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했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아주 지혜롭고 현명하게 요안나를 영적으로 동반했습니다. 지나친 육신의 고행을 자제하고 영적인 극기로 나아가도록 도왔습니다. 매일의 고통스러운 일상사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숨은 성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요안나는 소녀 시절 품고 있었던 수도생활에 대한 희망을 다시 지니게 되었고, 가르멜 수녀회 입회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조언에 따라 미망인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수녀원을 함께 창립하였습니다. 수녀회의 이름은 방문 수녀회입니다. 아직도 존속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진출해 있습니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표현이 차별적 언어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뜻을 보면 남편은 세상을 떠났으나 아직 따라 죽지 못한 부인이라는 뜻이니 그렇습니다. 과부라는 표현도 별로 좋은 표현이 아니라, 최근 서울시에서는 ‘고 아무개씨의 부인’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아무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부인들에게도 수도 성소의 길이 활짝 열리다 보니, 새로운 형태의 수녀회인 방문 수녀회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줄을 이었고, 요안나가 임종할 당시 분원수는 총 75개에 달했습니다.
요안나가 6명이나 되는 자녀의 어머니자, 수녀회 총원장으로서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했지만, 넘어서야 할 난관이 참 많았습니다. 큰 아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습니다. 딸 하나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든든한 영적 아버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도 먼저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사건 하나 하나가 요안나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수시로 다가오는 모든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들을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방문 수녀회의 본부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안시에 위치해 있는데, 한번은 페스트가 안시를 휩쓸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습니다. 요안나의 가족들은 빨리 안시를 벗어나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딸이요 자매 수녀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안시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수녀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거리로 나가 신음하며 죽어가는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간호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따뜻하고 극진했던지, 사람들은 요안나를 가르켜 위로의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인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부단히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성찰하고 헌신했던 요안나의 생애는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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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ecJv5-b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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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법>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마태 18,1)
우리 모두가 마음속 깊이 품고 사는 이 질문, ‘어떻게 하면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이 질문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세상이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배와 가장 위대한 선장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야겠습니다.
1912년, ‘신조차 침몰시킬 수 없다.’라고 불리던 배,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 배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당대 최고의 선장으로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선장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다고 하며 탈출하지 않고 끝까지 사람들을 구하려다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심하기는 해야 했습니다.
그는 ‘가장 빠르고 화려한 첫 항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달렸습니다. 항해 도중, 다른 배들로부터 최소 일곱 차례나 ‘빙산이 떠다니고 있다.’라는 ‘작은 경고’들이 무선 전신으로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경고들을 무시했습니다. 거대한 배, 화려한 승객들, 자신의 명성이라는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함’에 취해, 다가오는 ‘단 하나의 위험’을 외면한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의 위대함은 1,500명이 넘는 영혼과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는 정말 ‘큰 사람’이었을까요? 작은 것을 작게 보는 큰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처럼 겸손하여서 잃어버린 작은 양 한 마리도 결코 작게 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화 ‘아멜리에’에서 아멜리에는, 파리의 평범한 카페 종업원입니다. 그저 그런 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작은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기 집 욕실 벽 속에서 50년도 더 된 낡은 보물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상자의 주인인 ‘단 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수소문 끝에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상자의 주인을 찾아 몰래 상자를 돌려준 아멜리에는, 멀리서 그가 어린 시절의 추억에 눈물 흘리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충만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선행 속에서 가족과 같은 친구들이 생기고 남자 친구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아멜리에가 과연 ‘큰 사람’일까요, ‘작은 사람’일까요? 정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작은 들꽃과 같은 아름답고 큰 사람입니다. 그녀는 잊혀진 ‘단 한 사람’의 작은 행복을 찾아주는 일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학자나 부자가 아니라, ‘어린이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4)
어린이는 겸손합니다. 그 어린이와 같은 마음은 작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존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4)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우리가 ‘큰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일본 홋카이도의 아주 작은 시골 기차역 이야기입니다. 이용객이 없어 폐역 예정이었던 ‘구 시라타키’라는 간이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 그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여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철도 회사는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그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역을 유지하기로 한 것입니다. 3년 동안 기차는 아침 7시 15분과 오후 5시 8분, 하루에 단 두 번, 오직 그 소녀만을 위해 멈췄습니다. 수억 원의 손해를 감수하고, 거대한 철도 회사가 단 한 명의 아이를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마침내 소녀가 졸업식을 마친 2016년 3월 26일,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속에서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기차역도 비로소 소임을 다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하느님의 사랑의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철도 회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업’이 아닐까요?
우리 각자의 삶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가족일 수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일 수도,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소임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가 다스리게 될 고을의 수를 아는 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어느 한계까지 사랑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머리만 신경 쓰며 손발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시신 기증과 같은 것을 통해 자기 몸을 내어주어야만 한다면, 손끝 발끝까지 신경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중세 시대,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의 높은 첨탑 꼭대기에 놓일 천사 석상을 조각하던 한 석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천사의 등 뒤 날개까지 세밀하게 조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조수가 “스승님, 어차피 아무도 보지 못할 텐데 왜 보이지 않는 등 뒤까지 그렇게 공을 들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석공은 조각을 멈추고 조수를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보지 못하고, 자네도 보지 못하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시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일은 간단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콜카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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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혹시 예전에 조선 왕 이름 외우셨던 기억 있으신지요? “태정태세 문단세~” 하면서 외우던 왕의 이름들. 순서가 중요했습니다. 학교 다닐 땐 성적으로 등수가 매겨지고, 회사에 들어가면 실적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옆 사람도 그런 잣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혹은 “나는 왜 저만큼 못할까…” 그러다 보면 괜히 속이 상하고, 분하고, 질투가 생기기도 합니다. 나라 사이에도 순위가 있습니다. G7,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같은 말도 다 순위를 매긴 결과입니다. 세상은 늘 크기와 숫자, 능력과 실적으로 줄을 세우려고 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와 전체주의 시대에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습니다. 크고 강한 나라가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더 크게 이바지하기로 했습니다. 문화와 예술로 국가 간의 장벽을 무너트리기도 했습니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면서 이제 협력과 상생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국지적인 분쟁과 전쟁이 있지만 인류는 공동선을 위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습니다.
교회도 신앙도 크기와 규모로 순위를 정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미주 지역에 파견한 성당이 있는데 그중에 보좌 신부님이 있고, 교우가 많은 성당이 4곳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그 성당들을 ‘Big 4’라고 부릅니다. 워싱턴 DC 성 김대건 안드레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필라델피아 홀리 엔젤 성당입니다. 교구 사제 모임을 할 때도 4개 성당이 돌아가면서 준비합니다. 모임의 분담금도 4개 성당이 많이 부담합니다. 그만큼 재정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지만, 전에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 있었습니다. 미사 참례 인원과 재정은 달라스 성당보다 적지만 공동체는 가족처럼 기쁘게 지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의 기쁨은 공동체의 규모와 크기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고, 친교와 헌신이 있고, 나눔과 기도가 있다면 복음의 기쁨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방향을 다시 알려줍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친구라 불릴 만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홍해를 가르고,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그는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을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양보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조용히 한걸음 물러섭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었고, 참으로 겸손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말씀을 들으면, 왠지 마음에 찔리지 않으십니까? 어린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매사에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쉽게 웃고 쉽게 용서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수하고, 겸손하며,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말입니다.
요즘, 원망과 미움이 생기는지요? 아니면 분노와 질투가 생기는지요?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내 욕심과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내 마음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겨진다면 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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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명기 31―34장은 구약 성경 오경의 결론을 제시하며 여호수아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신명 31,2). 또한 여호수아를 앞에 세우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 된다”(31,8).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한 위대한 지도자인 예언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합니다. 그는 사십 년 광야 생활에 고통과 두려움, 의심과 번뇌를 겪었을 테지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은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까지였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에 서운해하거나 섭섭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까지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관한 논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마태 18,4), 다시 말해서 스스로 우쭐거리거나 자기 잘난 맛에 살기보다 회개하고 겸손한 이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아울러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18,14)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위대하며 길이 남을 것 같은 역할이나 업적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그저 초라하고 덧없으며 짧은 한때의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자연스러운 욕구이겠지요. 그런데 이 욕구 충족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은 영원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우리의 전부이시며 온전히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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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물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하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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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에서>
마태오 18,1-5.10.12-14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4-5)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낮은 이 품어
낮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높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낮은 이 밟아
높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낮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틔운
지금여기에서
작은 이 품어
작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커집니다
하늘나라 싹 틔운
지금여기에서
작은 이 밟아
커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작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이 품어
보잘것없어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돋보입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이 밟아
돋보이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보잘것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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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지만...>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1-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1)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5-6)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따라서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예수님 말씀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깨닫고 자신의 자리로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우쭐대는 사람은 교만을 버려야 하고, 그 자리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회개’와 ‘낮춤’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라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쪽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낮추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우선 먼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무턱대고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아서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그 깨달음 없이 그냥 낮추기만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 겸손이고, 많은 경우에 ‘비굴함’이 되기도 합니다.>
2)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5-7).”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6-17ㄷ).”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교만과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끝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고, ‘버림’과 ‘낮춤’을 실천하면, ‘하느님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의 집으로(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서 살게 될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작은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귀하고 소중한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고(또는 잊어버리고)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스스로 전락한 일입니다. 그랬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회개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그의 ‘아들 자격’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3) 하느님 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4)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되찾은 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되찾은 양’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냥 ‘잃은 양’으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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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윤호 요셉 신부님]
살다보면 무엇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어딘가에 잘 둔다고 한 것을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서랍 저 서랍, 여기저기 뒤지다가 나오지 않을 땐 남을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그 물건을 발견했을 때, 그 당혹감으로 인해 가슴을 칠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잘 보관하고서 다른 사람을 의심했구나.’ 물건 하나를 잃어버려도 이처럼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한국천주교회는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양적인 성장만큼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새로 교회에 발을 내딛는 신자들의 양만큼 쉬는 교우들. 그래서 교구마다 성당마다 쉬는 교우들을 다시 성당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매력을 느꼈던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나면 그 매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개신교 신자들은 따뜻한 난로인 반면 천주교 신자는 차가운 돌멩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요?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 교리교사의 주입식 교리가 쉬는 교우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다행히 교구마다 소공동체 모임이 활성화되고, 소공동체에서 예비자들과 함께 교리를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신선한 희망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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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나 어떠냐?”하셨답니다. 부활하셨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뵙는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12명 중에서 누가 제일 큰사람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도들의 서열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는 계급 순이고 또 다른 모임에는 나이순이던 직위 순이던 간에 어떤 서열이 정해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는 이것이 아주 뚜렷했고, 성전 내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대우를 받기를 좋아했고 모임이나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기가면 무엇으로 서열을 정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부터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일”을 예수님께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입니까? 생각이나 행동의, 한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추구해왔던 것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확실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중에도 착한 어린이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아니한 어린이도 있고, 또 어린이들도 다투고 속이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신체적 어린이를 말씀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냥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뽑아놓고 가까이 하시던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이름도 없고 몸집도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택되고, 내노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신체적으로 또 어떤 면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어린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성숙한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고 자신만만하지도 않는 작은 어린이, 이런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장한 사람이 다시 유아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이입니다. 이러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야 누가 현명하고, 뛰어나고, 자신만만하고, 성숙된 사람으로 자처하겠습니까. 보잘 것 없고 도움이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을 잘 알면서 높은 자리다툼을 하고, 큰사람 작은 사람 따지겠습니까?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도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해 질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지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 도우심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항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여럿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 “누가 더 큰사람이냐”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 29) 하시면서 스스로 겸손한 분,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 받고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이 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법칙으로 주신 “작은 사람이 큰사람이 되고, 큰사람이 작은 사람이 되는 법칙”은 세상 종말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결코 지키기 쉬운 법칙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고 또 저기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꼭 지켜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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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 찬미예수님
석사학위를 마치고 잠시 이태리에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저는 박사과정 등록을 위해 다른 외국어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박사과정 입학 조건이 이태리어와 모국어를 제외한 두 개의 외국어 자격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 고민 없이 스페인어를 선택했습니다. 스페인어는 이태리어와 매우 비슷하므로 적당히 방학을 즐기며 별다른 공부 없이도 충분히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수업을 들을수록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태리어와 많은 부분 비슷해 남들보다 더 배우기 쉬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다른 것 또한 만만치 않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비슷한 언어인 만큼, 오히려 애매하게 달라, 더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국에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저의 교만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마주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아는 길이라고 정보없이 가다가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고, 어느 정도 운전을 잘 한다고 생각했을 때 꼭 접촉 사고가 일어납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자녀와의 관계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내 건강을 스스로 잘 챙긴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책을 여러 권 읽은 사람보다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그리고 책 한 권 읽은 사람보다 목차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종종 지나치게 자신을 신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를 찾고 부모의 말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유년기가 지나고 나면,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딪혀 넘어지곤 합니다. 결국, 오늘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할 우리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가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많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의지하기 보다는 정작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에만 하느님을 찾고, 그제서야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한탄하곤 합니다.
하지만 결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고 아무 흠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은 겸손함을 갖추는 것, 일상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되 그 결과들을 곱씹으며 주님의 뜻과 위로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미사 중에 특별히 오늘 복음 환호송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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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8장은 ‘교회설교’ 혹은 ‘공동체설교’라 불립니다. 곧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설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사람,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가?’를 밝히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그러니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제시하셨습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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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주님!
제 마음과 영혼이 날로 자라나게 하소서!
몸은 자라나기를 멈추어도 마음과 영혼이 자라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작은이라 하여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고
작은이기에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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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처럼 낮아져야 하는 이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어린이를 주제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래야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다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서로는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가 어린이처럼 되어야 어린이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권력 숭배자가 힘없는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큰 것을 쫓는 자가 보잘것없는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어린이를 찾아 헤매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쓰겠습니까?
그렇지요. 어린이는 동전 하나도 소중하기에 찾기 위해 애쓰지만 돈이 많은 어른은 동전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것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짓을 결코 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다른 것은 말씀하시지 않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낮출 수도 낮출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미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나 높아지려는 사람이 낮출 필요도 있고 낮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왜 낮아져야 하는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 괜히 낮아지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높아지는 것도 힘들지만 낮아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낮아지는 것이 왜 힘듭니까?
그것은 오르막길을 걷는 것이 힘들지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힘듭니까?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힘들지 따라 흘러내리는 것은 쉽잖습니까?
높아지는 것이 힘든 것은 높이 오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지만 낮아지는 것이 힘든 것은 높이 오르고 싶은 우리 욕망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낮아지는 것은 높아지고 싶은 우리 욕망을 꺾는 것인데 왜 우리는 이 욕망을 꺾고 낮아져야 하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산과 우리 인간의 산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른에서 하느님 나라 어린이가 되는 그것과 같습니다.
어른을 넘어 늙은이가 되어가면서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노숙해져야 하는데 노추해지는 것은 아닌지.
나이 먹어 이제 힘도 없고 자연스레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하느님의 산으로 오를 생각은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는 않은지.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셨듯이
윗자리를 차지하거나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저를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는 글을 드리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 외국 신부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금 울산에 있는 한 자매님을 도와달라고.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외국 신부님들에게도 알려져 종종 도움 청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 같은 것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을 두고 있는 엄마인데 한쪽 눈은 이미 실명이고 나머지 눈마저 실명이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법 체류자이기에 의료 보험이 안 돼 검사도 받지 못하니 검사라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데 마땅히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도움을 청합니다.
울산 지역이면 더 좋겠지만 어디서라도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제 글을 읽는 분 가운데 안과 의사가 있어서 도와주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과 의사가 아니더라도 도울 길을 알고 계시면 제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제 전화 번호는 010-2340-5501(김찬선 레오나르도)입니다.
도움 청하는 김에 한 가족에 대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가족은 파키스탄 가족으로서 자녀와 손자들 함께 한국으로 종교 망명을 청한 사람들인데 망명이 불허된 분들입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어서 가톨릭을 믿는 것 때문 살해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그것을 피해 한국에 온 것이고 자기 동생은 이미 살해 당했다고 합니다.
이 가족 가운데 의료보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중에 손녀가 역시 시력을 잃어가고 있고, 의료 보험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백방으로 도울 길을 찾겠지만 혹시 도울 길을 알고 계신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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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작은 이들 가운데에 계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 18,1-5.10.12-14)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과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말씀과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18,1)
제자들의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들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작은 이들은 누구이며,
나는 얼마나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가?'
'어린이와 잃어버린 양에 비유되고 있는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
'죄인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이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멀리하고 있는 이들, ...'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작은 이들이고, 이들이 바로 우리가 다가가야 할 나의 이웃이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이 묵상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임마누엘이신 주님은 작은 이들 속에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들에게만 다가가지 말고, 원수처럼 다가오는, 그래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멀게 만 느껴지는 작은 이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힘과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로도 다가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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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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