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은 나이에 그것도 가족 다 놔두고 혼자서 자전거로 제주도를 돌겠다는 발상을 한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떠나기 전에 몇 번은 망설였습니다. 자전거를 가져가겠다는 계획 때문에 준비가 만만치 않았고 정보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단 출발하자고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침 7시 30분 개포동에서 배낭을 메고 양재천을 따라 김포공항까지 자전거로 30여킬로미터, 9시 30분쯤 여객청사 1층 수하물 보관소에 도착.
앞바퀴, 안장 뽑고 헬멧을 안에 넣어서 포장을 완료했습니다. 포장비 1만5천원 지불.
까망 자전거 바지에 까망 T 입고 MP3 들으면서 우아하게 기내식 커피 마시고 제주공항에 도착했는데 사고가 생긴 겁니다.
포장 과정에서 앞바퀴를 고정하는 너트가 빠진 겁니다.(나의 실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민턴 치러 갔는데 가방 놓고 온 거랑 같습니다.)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 겁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는 버려둔 포장박스를 가져와 대충 자전거를 집어 넣고 택시를 탔습니다.(뒷좌석에 자전거가 들어갑니다.)
추가요금 지불하고 자전거수리점으로 갔습니다.
비싼 너트(5천원)를 구해 조립을 끝내고 오후 3시 넘어서 용두암에서 출발, 해안도로로 씽씽 라이딩.
협재에서 1박을 하려고 했는데 해가 좀 남아서 번잡한 곳을 지나 좀더 가서 쉬자고 했는데 그만 숙소가 없는 겁니다.
고산인가 하는 곳에 민박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들른 사람은 아주 지저분해서 묵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날은 저물었고 왕복 2차선 옆에 있는 좁은 인도 겸 자전거도로로 앞뒤 램프 켜고 아슬아슬하게 주행을 했습니다.
아마 야간 주행을 15킬로 이상 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모슬포(대정)에 도착하니까 이런저런 숙소가 보였습니다. 1박.
이튿날 모슬포를 지나다가 우연히 '섯알오름 학살지'라는 표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1950년 7월 예비검속에 걸린 제주도민 210여명이 아무런 절차도 없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 암매장된 장소였습니다. 유족들은 숨죽이며 살다가, 그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지 58년이 되는 올해 추모비를 세우고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를 지낸 겁니다. 제주도민들은 그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큰 소리로 외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슴 맺힌 한을 그 오름에 와서 토해놓고 가는 걸로 보였습니다. 또 그 주변에는 과거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의 방어진지로 하고자 만든 격납고, 비행장 등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여행하게 되면 이 곳을 꼭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주의 아픈 현대사가 압축된 곳이기에 제주의 새로운 면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중문에 가서는 빙빙 돌다가 자전거 대여족의 펑크를 때워준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시간 보내고 민망해 하고 서귀포로 향했습니다.
왼쪽 무릎 바깥쪽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5시 반, 어제 일이 생각나서 일찍 호텔에 투숙하고 식사(고등어조림 먹고 싶었는데 2인분만 판다고 해서 구이와 한라산 소주)하고 1박.(5층짜리 호텔 1인의 경우 대개 3만원 정도)
3일째, 고민이 들어갔습니다.
제주로 가서 숙소를 잡은 뒤 4일째(서울행 비행기 시간이 오후 5시 30분) 배낭을 맡기고 1100고지를 향해 뛰자고 결정하고는 제주시로 방향을 잡고 페달링.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주행거리 약 1백킬로.
제주시에 도착하니까 완전히 체력이 소진되어 다음날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11시 비행기로 예약을 변경하고 숙소를 잡은 후, 그냥 취침(참이슬 fresh).
다음날 무쟈게 맛없는 해장국 한 그릇 비운 뒤 공항으로 직행. 제주공항 여객청사 1층에 있는 수하물보관소에서 자전거 포장(포장비 동일)하고,, 수하물로 부치고 면세점 들러서 김포공항 도착.
택시로 갈까, 밴을 쓸까,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시 개포동까지 타고 가기에는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중에 삼성동까지 오는 공항 리무진버스가 떠올랐습니다. 기사가 잘 실어주더라구요. 버스요금 6천5백원을 내고 논스톱으로 삼성동 도착. 다시 조립해서 귀가.
다리에 확실한 알이 생겼고, 가족들은 저를 반겼습니다. 이상 간단한 후기를 회원동정란에 올립니다. 사진은 안들어가네요.
** TIP**
자전거 이동 방법 : MTB샵에 가면 자전거 가방이 있습니다. 앞바퀴(디스크 브레이크의 경우 브레이크 사이에 반드시 플라스틱 패드를 장착해야 유압이 유지됨), 안장, 페달만 분리한 뒤 공항버스로 이동하면 포장비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수하물을 부칠 때 자전거라고 말하면 'Fragile'이라는 붉은색 라벨을 붙여줍니다. 제주공항에서는 다른 짐들과 섞여 나오는데 김포에서는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별도로 가지고 내려옵니다. 기어부분이 걱정스러운 경우 충격방지포장지로 싸면 안전합니다.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마눌님의 한 말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 아니야?' 이 말에 다시 힘을 내서 시간이 되고 팀이 구성되면 제주도 산간도로 일주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체력을 더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 1백킬로를 타고도 다리가 거뜬할 정도가 되어야 할 듯. 그런데 가능할까요? 나이가 아무리 숫자에 불과하다 해도 말입니다.
첫댓글 먼서 실행한 선배님이 진정한 고수 입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엔 어디로?
저도 오토바이 팔고 자전거 살까 하는데...
파는거는 파는거고 요즘 왜 안 보이는겁니까?
저도 요즘 민턴운동을 못해서인지 하체가 영 부실해진 것 같은데... 짐자전거라도 끌고 합류해야 될 듯!
대단하십니다. 일단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경하드리고.....낮시간이야 어떻게 지냈는지 알겠는데 밤엔 뭐하셨수?? 그거이 궁금 ㅋㅋ
먼 말씀 하시려고 하는지 알겄는디여, 밥 먹으면서 한 쏘주 한 잔에 그냥 온몸이 풀려나갑니당. 주위에 술집이 있드만 사흘을 조용히 잤습니다.
다리에 학실한 알이? 정말 알찬 여행였군요. 구럼 이제부턴 "남녀 불문 니네들 다~ 죽었어~!" ?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마눌님의 한 말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 아니야?' 이 말에 다시 힘을 내서 시간이 되고 팀이 구성되면 제주도 산간도로 일주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체력을 더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 1백킬로를 타고도 다리가 거뜬할 정도가 되어야 할 듯. 그런데 가능할까요? 나이가 아무리 숫자에 불과하다 해도 말입니다.
그 용기가 부럽네요 바람님 저도 따라가고싶은데 자전거가 9만원짜리라 가능할지 몰라
바람님 글은 이곳에 있는 것이 잘 어울릴 것 같아 바람님 허락없이 글을 이동시켜 놨습니다. - 운영자 자격으로 -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동정란에서 날린 줄 알고. 그래봐야 뻔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저도 옮기려고 들어왔는데 마직님이 알아서 옮기셨군요. 감솨!!!
'바람'님, 드디어 이름처럼 사시는군요.....ㅎㅎ
글 제목도 '風流'가 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