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내리는 밤 / 김명기
마당 어귀, 잎 다진 대추나무 어린 가지 오들오들 떨며 우묵한 어둠을 끌어 덮는 밤. 끝단 해진 당신 작업복 늘어진 허리고무줄 같은 삶을 베고 돌아누운 아버지 끙끙 앓는 입내 소리처럼 연신 눈이 내린다. 시든 꽃무늬 벽지 위에 단단히 닻을 내린 채 오랫동안 유랑 중인 벽시계가 정교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남루한 밤을 대물림하는 시간 뒤란 작은 댓닢들이 물고 있던 바람을 뱉어 놓는다. 시간이란 이불 홑청을 한 땀 한 땀 기우는 바느질 같은 것이기에 서로 다른 길을 멀리 돌아가기도 하지만 당신이 고방 한구석에 벗어놓은 양말 속 수북한 살비듬이 이미 내게도 생겼으므로 결국 나는 가슴이 발등과 점점 가까워지는 속도를 닮아갈 것이다.
오래전 나를 지나 돌아누운 당신도 끝끝내 만나지 못할 지점을 향해 당신을 쫓아가는 나도 여전히 유랑 중인 벽시계를 따라 하염없이 저 눈 속으로 걸어가는 이 밤 뒷산 어디쯤에선가 고통의 근수를 견디지 못한 큰 나무들이 관절을 꺾으며 뚜둑뚜둑 비명을 지른다
- 김명기 시집 <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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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리얼리즘 정신과 시의 힘 - 이승하 시인
시가 상상력의 산물인가 체험의 산물인가를 놓고 수십 년에 걸쳐 시인들은 논쟁을 벌여왔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P. B. 셸리는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의 훌륭한 방편이다.”라고 말했고 존 키츠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두는 불사의 신” 이라며 시적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정신적인 후예는 아니지만 가스통 바슐라르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고 함으로써 상상과 몽상의 중요성을 환기하였다. 한편 릴케는 낭만주의자들의 감정 과잉을 비판하면서 체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 이미 넘쳐날 정도로 많이 썼을 것이 아닌가. 시란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낭만파 시인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워즈워드가 한 말 “시란 넘쳐흐르는 감정의 강한 발로”라는 것은 낭만주의자들의 선언문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릴케는 이에 맞서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간접체험이든 직접체험이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시가 잘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인데 김명기의 시를 읽으며 떠오른 것이 바로 릴케의 이 말이었다. 시인도 소설가처럼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초 리얼리즘의 대두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시집 앞머리에 놓여 있는 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막걸리집 이름이다 천상 막걸리 집을 위해 지어진 이름 같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흙 바른 천장, 자그마한 방들, 그 방 안에 녹아들어 취한 사내들
― 막걸리집 미자씨 부분
시의 제1연은 소설의 도입부처럼 ‘미자씨’라는 이름의 막걸리집을 묘사하고 있다. 혹은 영화처럼 카메라를 들이대어 막걸리집을 천천히 보여준다. 제2~4연에 가서 시인은 시적 화자를 등장시켜 내면의 의식구조를 하나둘씩 드러낸다. 며칠째 비가 내리는 날, 화자는 건너편 작은 창고 양철지붕 위로 탕탕 땡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푸르고 단단한 땡감들이지만 사는 게 얼마나 버거우면 양철지붕 위로 투신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든 단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오늘밤/잘 익은 술에 취해가는 것/취한 술에 내가 폭 익어가는 것”이라며 술로 풀어보려고 한다. 시적 화자는 며칠째 비가 내리는 날, 하릴없이 막걸리집에 앉아서 세상의 빠릿빠릿함에 대해 손사래를 치며 술에 취하고 싶을 뿐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감정이 물론 중요하지만 시인의 리얼리즘 정신은 이 시를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투박한 상태로 두게 한다. 투박한 상태라 함은, 시의 구성이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명기의 시는 서정시의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진종일 비 내리는 날’의 풍경화를 보자.
진종일 비 내리는 날 내내 꽃잎을 펼치지 못한 나팔꽃들이 체감을 나누듯 서로의 목을 꼭 껴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날 바람은 늙은 엄마의 관절 속으로 긴 혓바닥을 집어넣어 진 빠진 뼈를 핥아대기도 하고 홀연 생을 떠난 마당가 수북한 꽃 시신들은 아직 이탈하지 못한 영혼을 간직한 채 푸른 대궁 옆을 서성이기도 합니다
―비 내리는 날의 소사小事 전반부
이 시에서는 체험과 상상력의 조화가 절묘하게 이뤄져 있다. 비 내리는 날을 그린 풍경화이면서도 “이런 날 바람은/늙은 엄마의 관절 속으로 긴 혓바닥을 집어넣어/진 빠진 뼈를 핥아대기도 하고” 라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면서 꿈과 생각, 즉 상상과 현실 사이를 유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꿈이며 생각이란 것이 허공 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관찰기록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한 이틀, 비를 핑계 삼아 세상과 단절하고 그동안 그려놓은 추상들에 형상을 덧대면 지상에서 꾸는 꿈이란 거대하지 않아 창밖으로 몰려가는 세월처럼 찬찬히 낡아가는 것이기에 이승에 꿈이라는 게 있나 싶기도 합니다
―비 내리는 날의 소사小事 후반부
추상들에 형상을 덧댄다고 한다.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이것은 김명기의 중요한 시론이 아닌가 싶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지상에서 꾸는 꿈은 거대하지도 허황되지도 않고 찬찬히 낡아가는 것이다. 낡아가는 꿈을 아끼고, 꿈이 낡아감을 아쉬워하면서 일상의 이런 소소함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구성이 잘 되어 있는 시를 보자.
한쪽 다리 부러진 채 담벼락에 기댄 늙은 사다리 하나 있다
부러진다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는 것 차라리 노역이 아름다웠을 저 몸 부러진 채 얼마나 오랜 불구의 시간을 또 견뎠을까 쉼 없이 시공을 내딛는 것들은 언젠가 한번은 부러질 날을 향해 가는 것 그것들의 이면도 차마 저렇게 아름다울까 부러진 채 어딘가에 기대 오래도록 불구의 시간을 건널 수 있을까 낡은 이불처럼 숨죽은 저녁 한 무리 멧새들 그 노구 위에 가볍게 앉아 부러진다는 것은 쓸모의 다함이라 지절대다 진 빠진 옹이빛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독촉하듯 내리는 어둠의 언저리 볼품없는 제라륨 몇 송이만 더욱 붉다
―부러진 사다리가 있는 저녁 전문
일종의 사물시인 이 작품에서는 시인의 관찰력이 돋보인다. 낡은 사다리를 신체장애가 있는 늙은이에 빗댄 이 시에서 시인은 노년의 몸(노구)를 연민하지 않는다.
“한 무리 멧새들이 그 노구 위에 가볍게 앉아/부러진다는 것은 쓸모의 다함이라 지절대”지만 “그것들의 이면도 차마 저렇게 아름다울까” 하면서 불구의 노구를 상찬한 뒤에, 볼품없는 제라늄 몇 송이를 더욱 붉게 한다. “차라리 노역이 아름다웠을 저 몸” 앞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아울러 죄스러움이다. 이 시에서는 단 한 행도 불필요한 행이 없으며 단 한 개의 시어도 불필요한 것이 없다.
이와 같이 구성의 묘미를 보여주는 시는 그러나 그다지 많지 않다. 산문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몹시 아쉽다. 화자의 말이 많다는 것이 시에서 좋을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의 요소, 즉 체험의 요소들을 버릴 수 없어 하는 시인의 관찰력과 그에 따른 묘사력 때문에 시가 대다수 길어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시인은 낡은 사다리에 이어 늙은 개를 그린다. 늙은 개와 더불어 늙은 어머니를 그린다. <부러진 사다리가 있는 저녁>과 <늙은 개>는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일맥상통한다.
목줄을 풀어놓아도 좀체 집 밖을 나설 줄 모른다 이제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는 우체부가 다녀가도 더 이상 짖지 않는다 어쩌면 팽팽하게 목을 당기던 속박이 개를 살아 있게 한 열망인지 모른다, 늙어간다는 것은 푸른 열망으로부터 담담해진 이 스산한 계절 같은 것인가 낡은 경운기 발동소리 같은 바람이 불고 꽃사과나무 위로 별 한줌 후드득 쏟아지는 밤 더는 긴박할 것 없는 생의 결박을 풀어놓은 엄마 들창 모서리에 기댄 등 휜 달을 밴 채 건넛방에서 초저녁 잠이 들고 웅크리고 드러누운 저 늙은 개 엄마마냥 편안하시다 고요하시다
―늙은 개 부분
키우던 개가 늙으니까 짖지도 않을 뿐 아니라 목줄을 풀어놓아도 좀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런 늙은 개는 “더는 긴박할 것 없는 생의 결박을 풀어놓은 엄마”와 다를 바 없다. 웅크리고 드러누운 저 늙은 개가 엄마마냥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생명체의 생로병사를 자연의 순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소설 지나 마당 앞 감나무에선/ 진 빠진 잎들이 맥없이 떨어지”는데, 이것을 누가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세월이 간다는 것은 사람도 따라가는 것이다”라고 <석호石湖>에서 말하고 있다.
세월이 간다는 것은 사람도 따라가는 것이다 외로움도 오래 묵으면 양분이 될 수 있다는 걸 외조부모 벌써 떠나버린 빈집에 와서 수북하게 무릎 위로 자라난 쑥대를 보며 깨닫는다 견디다 견디다 외로움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집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냄새도 바뀌는 것이다 군불의 온기와 함께 빠져나간 밥 냄새와 찌개 잣는 냄새 토막 난 굴뚝 아래 씁쓸한 궁기의 냄새를 따라온 비루먹은 고양이들 눈빛만 처연하다
―석호 전반부
김명기의 농촌 소재 혹은 자연 친화의 시들은 전원시가 아니다. 농촌은 이제 피폐한 부재의 공간이다. 늙어감과 낡아감은, 견딤과 버팀은 인간의 외로움을 부추긴다. 황폐한 서경과 을씨년스런 서정의 조화가 완벽하다. 이런 것들을 잘 관찰하여 꼼꼼히 묘사하는 능력이 김명기에게는 있어 산문시의 무미건조함을 많이 상쇄시켜 준다. 시인의 체험이 십분 발휘된 시는 <오릭스 호에서의 일주일>과 <와카나이 항, 11월과 12월 사이>일 것이다. 이 시집에서 최고의 수작을 2편 꼽으라면 나는 이 시 2편을 꼽고 싶다. <오릭스 호에서의 일주일>은 러시아 선적 대게잡이 배에 조업감독관이 된 시인 자신의 경험담인 듯하다. 이 작품은 매력은 ‘힘’에 있다. 유약한 서정시 혹은 서정소곡들이 100년 우리 시문학사의 대표작으로 읽히고 있는데 이런 웅혼한 기백의 정서는 우리 시문학사 전체를 통해서도 예외에 속한다.
밤이면 바다 속 유령들이 선체를 뜯어먹던 소리 그 소리에 놀란 몸뚱인 관 짝 같은 침상 위를 떠올랐다 곤두박질치고 그럴 때면 지금은 이름도 가물한 늙은 러시아 선원이 다가와 쪼그라든 내 귀를 비벼주며 알지 못할 슬라브어를 불어넣곤 했는데 그 낯선 언어들이 나를 토닥여 잠재우면 어느새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곤 했다.
―오릭스호에서의 일주일 부분
이런 시는 상상력만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이라는 재료에 상상력이라는 양념을 충분히 친다. 대양으로 나간 화자는 공포와 전율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마다할 수 없다. 조업감독이라는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화자는 어부들의 무사 귀환과 수익 향상이라는 두 가지 일을 완수 해야만 한다.
가난에 몰려 편주片舟에 육신을 맡긴 그들에게 실익 없는 회항 回航이란 그만큼 가난의 길이가 늘어나므로 나는 그들이 먼 고향에 가난과 함께 두고 온 아내나 자식들에게 곤란한 짐이 되어 있었다. 회항에 불안은 간혹 통발 속 청어를 꿰던 사내의 짜증이 되기도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선장의 굵은 주름살이 되기도 했으나 누구 하나 내게 불만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차라리 배 밑창에 침잠한 등껍질 붉은 그들의 재화財貨였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오릭스호에서의 일주일 부분
이런 시구는 리얼리즘의 극치다. ‘나’는 그들이 진 가난이라는 짐을 가볍게 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시인은 추운 그곳에서 뜨거운 체험을, 어두운 그곳에서 눈부신 체험을 한다. 절망에 빠진 화자를 구원해준 것은 뱃사람들이었다. “때로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부풀어 황망한 날”, “사람만이 희망이었던 그때”, 시인은 보았던 것이다. “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칠흑같은 오호츠크 겨울 밤바다 위 시린 별이 더욱 서러울 때면 럭키스트라이크를 입에 물고 밤새 통발을 건져 올리던 사람다운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음을”. 흡사 <모비 딕> 같은 해양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방불케 하는 이 시는 21세기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문 리얼리즘의 승리로 기억되어야 한다. “오호츠크를 향해 끝없이 밀려가는 먹장구름은/그곳의 오랜 관습 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와카나이 항, 11월과 12월 사이에서>도 시인 자신의 체험이 없이는 결코 쓸 수 없는, 리얼한 시다.
어느 땐가 녹슨 뱃속에서 구역질처럼 튀어 나온 사내가 그의 내장을 덥혀주던 싸구려 보드카를 바다 위로 다 토해내고 기어이 그 자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므로 내린 눈들이 점점 부풀어 올라 솜이불 같던 저물녘 나는 그 속에 누워 내가 건너온 바다와 바다 위에 찍힌 숱한 발자국을 더듬다 어느 순간, 말없이 남겨 두고 온 것들이 와르르 밀려들 때면 비스듬히 바다 쪽을 향해 몸을 기울여 심하게 출렁거리기도 했다. 결국 남겨진 것은 나였으므로.
―와카나이 항, 11월과 12월 사이에서 부분
제목에 걸맞게 시어들이 만나 출렁거린다. 역동적이 된다. 시인은 서경과 서정을 조화롭게 융화시키며 체험과 상상력을 뒤섞어 맛깔스럽게 버무린다. 뱃사람의 거침과 시인의 날카로움이 또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 시에 가장 부족한 ‘힘’을 김명기 시인은 불어넣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 운율이 가미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제1부의 제일 뒤 4편의 시는 인간의 늙음과 병마와 죽음을 다룬, 무거운 시편이다. 그런데 이들 시편도 유약하지 않고 강건하다.
끝단 해진 당신 작업복 늘어진 허리고무줄 같은 삶을 베고 돌아누운 아버지 끙끙 앓는 입내 소리처럼 연신 눈이 내린다. 시든 꽃무늬 벽지 위에 단단히 닻을 내린 채 오랫동안 유랑중인 벽시계가 정교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남루한 밤을 대물림하는 시간 뒤란 작은 댓닢들이 물고 있던 바람을 뱉어 놓는다.
―폭설 내리는 밤 부분
이 시에서는 돌아누운 아버지는 비유의 대상일 뿐 직접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애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여실히 그려진다. 한마디로 이 시는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쓴 체험의 승화다. 물론 인용한 부분의 뒤쪽은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부분이지만 이 시는 폭설 내리는 밤을 그린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폭설을 못 이겨 큰 나무들조차 관절을 꺾으며 뚜둑뚜둑 비명을 지르는 이 밤에 화자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뒤의 시편들도 비록 늙음과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시인의 보폭은 넓고 걸음걸이도 당당하다. 거침이 없다. 시인은 분명히 낭만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자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시는 다분히 산문조로 흐르게 된 것이고, 남성적 체취를 물씬 풍긴다. 우리 시단에서 이런 건강미와 남성미는 찾아보기 어려운 덕목이다.
지금까지 제1부의 시를 여러 편 살펴보았는데 이것들을 통해 김명기의 시세계를 대충은 규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허용된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2, 3, 4부의 시는 표제작만 골라내어 감상을 써볼까 한다.
제2부는 제목 그대로, 시장에서의 추억을 더듬은 시편들이다. 시인은 시장 사람들의 애환을 다루기도 하고, 가난하지만 이웃사랑이 뭔지를 아는 그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행주질에도 더 이상 밀려나지 않는/오래 묵은 때들”<국밥집에서>이 상징하는 것은 시장 사람들의 가난이나 남루함이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이다. 생명력은 달리 말해 생활력이다.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외롭지 않다. 잡초는 모여 있으며, 정을 느끼고, 정을 베푼다.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場) 판 한 귀퉁이,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댔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므로……,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 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지막이 말해주었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전문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를 해방시킨 혁명가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화자는 북평 장날 보았다.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의 값을 물어보니 만 오천 원이라고 한다. 화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살 것을 망설이는데, 그러자 상인(초로의 여인)은 만 이천 원으로 깎아준다. 체 게바라는 서른아홉에 죽었는데 생각해보니 시인 자신의 나이와 동갑이 아닌가.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 인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옷값이나 깎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회와 자책감이 두루 섞여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돌아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한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시장사람들의 인심,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 가면서 느끼는 동류의식, 티셔츠에 그려진 체 게바라의 생애를 떠올리며 느낀 부끄러움 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에 기반하여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쉼표로 연결되는 2개의 긴 문장이 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쉽다.
제3부 ‘생각을 찍다’는 이웃사람들, 즉 이 땅 장삼이사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쓴 것이므로 역시 체험의 시요 리얼리즘의 시다.
가을 나들이 나선 할매들이 늙은 회화나무 앞에서 까르르 소녀처럼 웃으며 사진 찍는다 이빨 시리지 않은지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있는 힘껏 허리 펴고 몇 백 년을 산 나무그늘 속에서 그녀들 아직 어린아이다 그러고 보면 몸이란 생각이란 그늘에 묻혀 혼자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을 찍다 전반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회화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 할머니들 모습이 금방 뇌리에 그려진다. 김명기는 이와 같이 대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관념의 시가 아니라 구체성의 시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설명에 그치고 마는 약점을 노출하기도 하지만 이미지나 장면을 화폭에 담아 독자에게 보여준다. 독자는 상상하거나 유추할 필요 없이, 그 이미지나 장면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중반부 6행이 한 문장인 것이 불만스러운데, 아무튼 시는 이렇게 끝난다.
포즈가 바뀔 때마다 물드는 회화나무 품속 물먹은 가을빛이 무르익어가듯 바늘구멍 사진기 시간의 초점 속으로 더디게 자라나는 그녀들이 찍히고 있다
기가 막힌 표현이다. 할머니들의 몸은 노쇠하여 얼마 못 살겠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할머니들이 시간을 훌쩍 뛰어 넘는구나, 아이스크림까지 곁들인 이들의 천진난만한 가을 나들이 모습이 보기에 좋다…… 뭐 이런 말들을 시인은 하고 싶었던 것일 터인데, 이런 여러 가지 말을 숨기고서 위의 5행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장면을 보여준다는 것은 시인이 체험한 것을 들려준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김명기 시인은 가을 나들이 나온 할머니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사진 찍는 광경을 직접 본 것일까? 그것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진처럼 선명하게, 직접 찍어서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데, 시인은 그것을 행하였다.
제4부의 제목은 ‘슬픔의 기원’이고, 이 제목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혼자 먹은 저녁상을 물리고 한 개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씻고 한 쌍의 수저도 씻어놓고 혼자 잠들 자리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순간 눈알이 뜨끈해진다 미친 듯이 차들이 내달리는 도로 위 피투성인 채 축 늘어진 개 한 마리 입에 물고 아슬하게 서 있는 또 다른 개 한 마리, 필사적이다 두려움 없이 제 몸을 사지로 내몬 저 개 오히려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슬픔의 기원 전반부
언젠가 언론에 보도된 바 있는 어느 개의 동료애가 별다른 시적 장치 없이 그대로 기술된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바가 없어 아쉽지만 독자는 뇌리에 그 장면이 금방 떠올라 안심하고서 그 다음 행을 읽는다.
함께 밥을 먹고 거리를 배회하고 후미진 동네 구석에서 눈치껏 사랑을 나누던 곁이 사라진다는 것이 더 두려웠을 것이다 비칠비칠 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먹먹한 하중을 견디지 못한 가슴은 아슴하게 무너져 내리는데, 슬픔은 저렇듯 필사적인 몸부림에서 터져 나오는 것인지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을 잣는 일이란 누군가를 향한 끝없는 미망未亡이어서 결국 혼자서 나눌 수 없는 거다 오늘 내 가슴에 모서리가 없는 것도 이 순간 저 개들과 슬픔을 나눠가지며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기원 후반부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하면 시가 산문이 되고 마는데, 그런 약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인은 사실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야기한다. 이 시에는 그러니까 김명기 시인의 장점과 약점이 함께 드러나 있다. 길게 이야기하면서(“비칠비칠 개가 (……) 나눌 수 없는 거다”)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하는 동안 시적 긴장감은 잃어버리고 말지만 내 감정을 소상히, 보다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한 바나 느낀 바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정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통해서도 이는 가능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압축과 정제미를 통해서도 보여주기를 바란다. 시인의 다변은 달변이 아니라면 군소리가 되기 쉽다. 그리고 김명기의 시를 읽다보면 “~것이다”로 끝나는 문장을 간간이 만나게 되는데, 이 시에서는 “~하기 때문이다”까지 보게 되니까 더욱 산문이라는 느낌이 든다.
늦깎이로 등단하여 내는 이번 첫 시집은 시인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함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리얼리즘 정신과 시의 힘은 다른 시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김명기 시인만의 개성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적한 몇몇 약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시인은 앞으로 많이 고민해야 한다.
필자는 시인이 등단할 때 심사를 했던 사람인지라 몇 가지 지적도 아울러 해보았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그런 뜻에서 애정을 갖고 한 말이라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무운장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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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