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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이 시집
시詩, 행복과의 연좌緣坐를 위하여
- 이송우, 『신세기 타이밍』(2023, 애지)
김효은(시인, 문학평론가)
1. 유신維新의 기억, 유년을 삼킨 괴물에 관하여
인간은 무엇보다, 호모 로퀜스다. 즉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특징을 드러내는 학명으로 호모 루덴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호모 폴리티쿠스 등등의 다양한 지칭어들이 생겨났지만, 이들 역시도 언어에 ‘의한’ 인간의 정의에 해당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 놀이, 도구, 사유 모든 영역을 아울러 총괄하는 메타인지가 바로 언어에 의해 작동하고 기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또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예술 장르이다. 시는 시어의 의미, 소리, 이미지, 사유, 리듬, 음보, 행과 연의 배치와 여백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표현되는 고도의 언어 예술 장르이다. 그중 시어詩語와 시구詩句는 의미와 정동을 가장 강렬하게 함축, 전달한다. 그러므로 가령 당신이 어떤 시를 낭독하는 동안, 뇌파를 측정한다면, 특정한 단어 앞에서 당신은 특별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시는 당신의 가장 예민한 통점이자 기민한 성감대일 수 있다.
학과 선택이나 취업이
자유롭지 못함을 알았을 때
나는 불령선인이 되어
자식 앞길을 망쳤다며 아비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교조 출범을 앞두고
고등학생 시위를 기획하던 내게
너까지 이러면 나 죽는다,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자던
어머니의 오래된 탄식은
대학 진학 후에도 연좌했기에
김남주의 외침을 두려워한 것은
눈 하나를 감고
아침저녁으로 살기 위하여
눈 하나를 뜨고
나의 비겁을 벌하기 위하여
아니 늙어가는 어미를 핑계로
더 이상 연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 「유신의 기억 12-연좌」 부분
“불령선인”不逞鮮人, “연좌”緣坐, “유신”維新이라는 시어들을 읽고서도 보통의 독자라면 아무렇지 않게 대개는 시집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라면, 어려운 고어古語쯤으로 치부하고 책장을 넘기거나 혹여 어린 독자들 중에 일부는 궁금증이나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에 모바일로 네이버 사전을 뒤적여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 시어들이 마치 딱딱한 돌덩어리처럼 가슴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체증과 불안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 아니 그조차도 없이 오로지 조작에 의해 온갖 고문과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던 시절이 바로 저 유신 시대 아니었던가. 이토록 묵중하면서도 날카로운 칼날의 ‘말’들을 시에 새기기 위해, 뜨거운 것을 무수히 삼켰을 시인의 심장을 생각한다. 한없이 무거운 질량의 언어들을 수없이 담금질하고 무두질하며 하얗게 지새웠을 시인의 밤을 또한 짐작만 해 보는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처럼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타인의 통증과 표층적 고통을 다만 공부하는 마음으로 헤아려볼 뿐이다. 불가지不可知의 통증과 슬픔들,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시선의 두려움, 시인이 유년 시절부터 느껴왔던 이 모든 “콤플렉스”들이 독자들에게는 오로지 불투명하고 모호한 시적 콘텍스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 낙인과 감시와 검열에 평생을 시달렸을 시인과 시인의 가족이 받은 핍박과 피해를 생각해 보건대, 이송우 시인의 시편들은 시대와 역사로부터 겪은 우리 민중 모두의 트라우마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희생과 피 흘림이 있었기에, 척박한 땅에 그나마 지금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을 단연코 부인할 수 없다.
위의 텍스트는 이송우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노란 꽃들을 모릅니다』(실천문학, 2021)에 수록된 연작시 중 “연좌”라는 타이틀이 달린 시편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인혁당 조작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다행히 즉결 사형은 면했지만, “감옥살이 팔 년에/ 보호 관찰 십이 년”(「러브스토리」)의 세월은 촉망받던 한 인문학자의 미래는 물론, 세 아이가 있는 한 가정을 처참히 무너뜨리고 유린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자전적인 시편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학창 시절, 이미 “학과 선택이나 취업이” “자유롭지 못함을 알았을 때”에 시인은 스스로가 이미 “불령선인이 되어” 이 사회에 “낙인”찍혀 있음을, 자유와 인권과 행복을 국가로부터 박탈당했음을 자명하게 인식하고 좌절한다. 아버지에게 그 모든 책임과 원망을 떠넘기듯 따지고 분노를 표출하던 때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이는 시인의 아버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존경, 연민과 경외, 미안함과 고마움 등 양가감정에 의한 것임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학창 시절 윤동주, 이육사, 김남주, 김수영, 김지하를 자유롭게 탐독하면서 독서의 목록과 취향을 스스로 혹은 타인의 시선으로 검열(당)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송우 시인이라면, 어땠을까. “간첩으로 조작된 남편이 처형 될까 싶어” “밥상머리에서 울먹이는 어머니”(「1979.10.26.」)를 의식하는 아들의 시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고등학생이었던 그에게 누군가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을까. 「옐로우 콤플렉스」라는 시에서처럼, 누군가 다가와 불심검문처럼 장미 한 송이를 들이밀며 색깔을 묻는다면, “아니오 나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던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작업을 그의 시편들은 절제된 언어로 한 편 한 편 수행 해 나간다. 박탈과 억압을 일찌감치 경험한 시인의 유년과 청년기의 고통과 고뇌가 담긴 그의 자전적 시편들은 독자들에게는, 나아가 4·3이나 5·18 희생자들,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까지도 함께 상기시키고 있어, 깊고 넓은 존재의 파동을 일으키는 동시에 시대를 넘어선 슬픔의 연대까지도 경험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유채꽃은 산수유를 닮았고”, “나는 노란 꽃들을 결코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어와 역설의 수사를 빌려 말한다. “노란 꽃”을 “노란 꽃”이라고, 빨간 꽃을 빨간 꽃이라고 발화하고 도화지를 마음껏 채색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조로早老했을 어린 소년에게 군데군데 비어있는 크레파스와 물감은 세상에 대한 어떤 질료였을까. 이제 그는 시인이 되어 그토록 소원했던 “사소한 자유”들을 시를 통해 비로소 구현해 낸다. 그에게 시는 곧 되찾은 인권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마땅한 최소한의 “자유”自由인 동시에 “말할 수 있음”의 권리와 행복인 것을, 다음의 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낸다. 이처럼 시는 말할 수 없는 자의 입, 힘없는 자의 무기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위로와 안식, 치유를 주는 평화와 행복의 장르이기도 하다.
볼 수 있다
걸을 수 있다
이 사소한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인가
말할 수 있다 아니,
다르게 말할 수 있다
공기처럼 가벼운 이 자유가 얼마나 컸던 것인가
- 「사소한 자유」 부분
고대에서부터 수많은 사상가들과 문학가들이 행복을 정의하기 위해서 무수히 골몰해 왔다. 미셸 포쉐는 그의 저서 『행복의 역사』(2020, 이숲, 조재룡 역)에서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수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펼친 행복에 대한 논의들과 사유들을 통시적으로 개괄하여 정리하고 있다. 굳이 행복이라는 단어가 제목이나 본문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인문학 총서들, 신학과 철학, 예술 제반에 있어 궁극의 주제들이 결국 인간의 행복의 문제로 귀결되고 수렴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일단 인간에게 행복은 건강한 신체와 정신 그리고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될 때에 일차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시인이 위의 텍스트에서 강조한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자유”들은 사실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인간됨의 전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은 이른 나이에 뼈저린 경험을 통해 숙지하게 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자유”, 타인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공기처럼 가벼운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자유”이고 곧 ‘행복’인지는 그것을 박탈당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당연한 행복과 삶의 기본 조건들을 잃고 그것들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대적 억압과 구속과 강제와 폭력들이 자행되었는가에 대해, 시인은 첫 시집, 특히 “유신” 연작 시편들에서 절제된 파토스와 강단 있는 언어로 그것들을 고발하는 동시에 상처 입은 유년을 스스로 다독이는 등, 담담하고도 단단한 시 세계를 밀도 있게 펼쳐낸다.
시인은 여전히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자행되고 있는 국가 폭력의 부당함을 계속해서 고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시는 슬픔과 기쁨, 거짓과 진실, 어둠과 빛을 토로해 낸다. 시는 밝고 아름답고 희망차고 진실된 것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또한 시는 과거와도 미래와도 접속해 있는 동시적 장르이다. “모든 가슴 떨림은/ 그것이 오기 오래 전부터/ 시작하는 것”(「오래된 미래」)이라고 전언했던 시인은 어린 꼬마였을 때부터 지금의 시인과 슬픔과 떨림으로 접속해 있지 않았을까. 어쩌다 보니 첫 시집에 대한 얘기로 서론이 길어졌다. 이송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신세기 타이밍』에도 과거와 다르지 않은, ‘지금 여기’ 쓸쓸하고도 고독한 생태生態들,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소모되고 대체되고 폐기되는 부품과도 같은 우리들 존재의 모습들이 스냅사진처럼 차곡차곡 담겨 있다. 자, 슬라이드를 넘겨보자.
2. 이 시대의 모든 “아력산”들에게
하루 네 시간 수면 주당 백이십 시간 일하자는 칼잡이가 날개 돋아 신선이 되오매 신이 난 메듀사들이 나뭇잎으로 우주선을 띄우라 연금술을 외치자 메타버스와 NFT가 증강현실하는 21세기 대민귁 거리 함성에 끌려 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서둘러 신세기 타이밍 에스프레소 트리플샷을 받아든다 (중략) 콜록콜록 먼지 날리는 서가에 낡은 책 하나 다시 꺼낼 수 없는 다시 꺼내선 안 될 하얀 밤 까만 노동의 이야기 알렉스는 신기루 역도산인지도 모를 흑마법사 청년 아력산뎐 개봉
- 「청년 아력산뎐」 부분
위의 시는 이번 시집 『신세기 타이밍』의 서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왜 이토록 고전적인 제목을 단 시를 시집의 맨 앞에 배치했을까. “청년 아력산뎐”이라는 제목은 마치 ‘춘향뎐’이나 ‘홍길동뎐’처럼 고전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뎐’은, 원래 한자로는 ‘전’傳으로 표기하지만 원래 음가가 ‘뎐’이었고 구개음화에 의해, 지금은 ‘전’으로 표기와 음가가 변화되었다. “아력산”은 “알렉스”의 한자식 표현 이름이라고 한다. 국내에 들어와서 일하는 무수한 “알렉스”들의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열악한 노동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제목을 일부러 고전적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메타버스와 NFT가 증강현실하는 21세기 대민귁 거리”의 한복판에, 아직도 “하루 네 시간 수면 주당 백이십 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이 ‘지금 여기’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고증考證한다. 아마도 시인은 지금 “21세기 대민귁”의 노동 현실이 조선 시대 노비들의 그것과 비교해 (더하면 더 했지) 다르지 않다는 시대착오적 현실을 고전 어투를 빌려 비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처럼 계속해서 이송우 시인은 일상에서 마주한 불편한 진실들, 묵과해온 사회 현실과 현상들,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맞닥뜨리게 되는 부조리함을 그대로 시詩의 장場 안에 끌어다 놓는다. 시대와 세대는 달라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부조리와 불평등은 암암리에 더 양극화되었으며, 본질적인 변화와 개혁은 오히려 더 요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의 시편들에서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그의 시편들은 노예제도가 있던 상고시대는 물론, 19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도시화 시대 공장 노동자들의 삶까지도 ‘지금 여기’에 다시 되새기게 한다. 이송우의 시에서 공장 노동자의 열악한 시간성과 장소성은 ‘지금 여기’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도 겹쳐 고스란히 재현된다. 시집 제목에도 등장하지만, 위의 텍스트에 쓰인 “타이밍”이라는 시어는 원래 약 이름이다. 당시 여공들이 잔업을 위해 복용하던 각성제로,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에서 자체 공급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적 주체는 그 “타이밍”이 지금의 노동자들에게도 여전히 복용 되고 있으며, 다만 “에스프레소 트리플샷”이나 에너지 드링크, 공인된 흡연 정도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 없이 오히려 달콤하고 교묘해진 “마법”에 의한 노동 착취가 자행되고 있음을 진술을 통해 보여준다.
꼼꼼함은 배우기 쉽지 않은데
알렉스는 숫자에 꼼꼼하니
분석 업무와 잘 맞는 품성을 가졌네
맞는 품성이라는 말은
역도산만큼 힘이 세어서
토요일 일요일
스물네 시간 근무에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으니
최고 사원상
오토모티브 섹션장
해외 교육 출장
차례로 받고 나서 알게 된 진실
생각지도 못할 미장센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상
받아먹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두 눈 맞추고
조용히 건네는 칭찬 한마디에
종놈이 주인 되는 기적
제게 펼쳐지기를
다들 기다렸다는 것인데
어쩐 일인지
십 년이 지나도
힘센 마법은 풀리지 않네
- 「힘센 마법」 전문
시인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은 물론, 대기업에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삶 역시도 하층 노동자들의 삶과 거시적 관점에서, 즉 자본가의 시선에서는 그 효용 가치가 피차 다르지 않음을 또한 고발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식성과 몸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자본 시스템에서 노동력과 생산력은 언제든 게다가 기계로도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힘센 마법”이 지배한다. 상찬賞讚도 마치 연극이나 영화의 “미장센”처럼 계획, 배치되어 있다. 알다시피 “미장센”이란 “무대에 오른 등장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등 제반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시스템, 자본가와 재벌들은 감독이나 연출가보다도 더 치밀하고 완벽한 기획력으로, 보이지 않는 마법을 구현하고 행사하는데, 어쩌면 그들은 악마보다 힘이 쎈, 신神에 가까운 존재들이 아닐까. 그에 비하면 노동자들은 기껏 “유령”이나 원혼 정도밖에는 안 되는, 자본가들에게는 애초에 잘 보이지 않는 비루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자정이 지나면 유령처럼
한 명씩 사라지고 남았던
책상 위에 엎드린 남자 연구원
책상 바닥에 숨어든 여자 대리
(중략)
꿈과 젊음을 먹고
전설이 되고팠던 우리는
다시 임시 수면실을 향해
낮과 밤을 걸려야 했다
- 「신세기 타이밍」 부분
이상은 당신도 등장하는 영화 「신세기 타이밍」의 한 신이다. 적어도 주연이거나 조연을 맡은, 알고 보면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 당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은 “알렉스”이다. “미장센”이 특히 아름다운 영화, 영화는 오늘도 새롭게 재촬영, 재생산, 재상영된다. 구시대 배우들은 신진 배우들로 ‘대리보충’ 되고 그전의 배우들, 한때 “역도산”을 열연熱演했던 “알렉스”들은 가차 없이 용도 폐기되고 새로운 “알렉스”들이 이력서를 내고 줄을 서서 합격 통지를 기다리고 있다.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다하고 나면 소진되고 사라지는 “힘센 마법”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으며, 지금 여기 수세기에 걸쳐 반복된다. 당신이 등장하는 마술쇼의 현장, 더러는 각성제와 만병통치약도 판매하는, 대한민국의 (영구불변한) 현주소. 지금 여기.
3. 에필로그 : 시詩, 새로운 “타이밍”을 꿈꾸기와 누리기
궁금해요
어떤 풀들은 왜 밟히기 위해
태어나는 것일까요
- 「아를로뇩 호텔의 까레이스끼」 부분
이처럼 이송우 시인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밟히기 위해/ 태어나는” 풀은 없다고 우리는 누구나 존귀하고 고귀하다는 교육을 받고 천부인권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심심하면 밟고 뭉개고 짜서 거름과 기름으로 쓰려고 대량 재배하고 사육한 일회용 ‘잡초’는 아닐까? 이송우 시인은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하여 시인에게 시는 또한 강력한 “타이밍”으로 마약보다 더 중독성 있는 신비하고 효험 있는 ‘무엇’이 아닐까. 몽매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지속해서 고발하고 각성하게 하는 약, 시인으로 하여금 잠들지 않고 깨어 있게 하는 강력한 “타이밍”으로서의 시詩를 생각한다. 데리다의 파르마콘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는 그 자체로 이미 각성제인 동시에 안정제이고 독이면서 해독약인 다분히 이중적인 아이러니의 장르가 아니었던가.
이송우 시인이 두 권의 시집에서 연달아 일깨워준, 이토록 아이러니한 각성은 독자들의 정신을 번뜩 들게 한다. 실로 처절하고도 냉혹한 ‘식인 자본주의’의 현실을 그는 몸소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는다.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일상들을 그의 시집과 시편들은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춘다. 촘촘하고도 꼼꼼한, 고증적이고도 충분히 실증적인, 시인의 성실한 시편들은 아마도 객관도와 타당도, 신뢰도와 “크론바흐 알파값”(「계절을 검증하지 않듯」)까지도 추출하여 이미 여러 차례 검증하고 또 검증하여 오류를 최소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와 수치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는 삶의 피부들에, “생살을 벗겨내고/ 가죽을 새로 댔던”(「생살을 벗겨내고 가죽을 새로-배치완 형에게」) 그 두텁고도 얇고 차갑고도 뜨거웠던 환부들의 연대를, 그의 시편들이 섬세하게 쓰다듬고 기억하고 어루만지고 있음을 우리는 재차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그의 시집이 널리 들리고 읽혀 수많은 “알렉스”들과 이 시대의 “역도산”들에게 위로와 치유와 용기가 되기를, 향정신성의 “타이밍”이 아닌 진정한 다른 ‘각성’의 노래와 함성이 되어 점화點火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한다. 이제 이 시집 맨 끝장에 실린 그러나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고 다짐하는 시작始作의 시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필자 역시 기억과 애도의 길에 연대하기로 한다. 낙인과 고통의 연좌가 아닌, 시詩와의 행복한 연좌緣坐를 위하여 건배!
봄비처럼
사랑하는 이는 쉽게 떠나고
가을 서리처럼
새로운 이는 익숙해지기 어렵다지만
길이 끝나고
길이 시작되는
당신과 나를 기억하겠습니다
- 「진부령 종산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