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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밥뭇나
잉게마르 요한손 | 플로이드 패터슨 | |
국적 | 스웨덴 | 미국 |
연령 | 1932년생 (당시 27세) | 1935년생 (당시 30세) |
대전당시 전적 | 21승 무패 14KO | 35승 2패 26KO |
신장 | 184cm | 183cm |
체중 | ||
리치 | 183cm | 180 cm |
스텐스 | 오소독스 | 오소독스 (피커부) |
잉게마르 요한손 대 플로이드 페터슨 1960. 6. 20
7. 카를로스 사라테 대 윌프레도 고메즈 1978. 10. 28
사라테-고메즈전은 푸에르토리코의 산 후안에서 열렸다. 미국팬들을 이 경기를 보기위해 폐쇄회로 TV (케이블 PPV의 조상격)로 시청하거나 극장을 찾았다. 위의 티켓은 샌디에고 폭스극장에서 방영한 본 경기의 입장권이다. 가격은 10달러. 현재의 가치로는 약 37달러 정도가 된다.
알폰소 사모라와의 라이벌 관계를 깨끗한 KO승으로 정리한 사라테의 야심은 식을 줄 몰랐다. 사모라전 이후 불과 17개월만에 그는 무려 여섯경기를 더 뛰었고 어떤 상대에게도 경기 종료의 공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52전 52승 51KO라는 괴물같은 전적을 보유하게된 사라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상위체급을 향했다.
WBC 슈퍼벤텀급에는 윌프레도 고메즈라는 선수가 있었다. 1974년 세계 선수권 벤텀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프로로 전향한 고메즈는 데뷔전에서 어이없이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이후 무시무시한 KO행진을 시작했다. 77년 5월 이 선수는 15승 1무 15KO의 전적으로 WBC 슈퍼벤텀급 챔피언 염동균 선수에게 도전했다. 푸에르토 리코에서 치뤄진 이 원정방어전에서 염동균선수는 12회 KO패를 당하며 벨트를 풀었다. 고메즈는 78년 9월까지 다섯명의 도전자를 모조리 KO로 때려잡았고 78년 10월 28일 카를로스 사라테의 침공을 저지하러 나섰다. 당시전적은 21승 1무 21KO
사라테는 사모라라는 맹수를 냉철하게 사냥했다. Z-Boys의 대회전에서 사모라는 사납고 날렵했지만 조급했으며 패턴이 단순했다 그리고 사이즈가 사라테에 비해 확실히 작았다. 고메즈는 그러나 여유있고 침착한 스타일인데다가 사모라에 비해서는 다소 큰 선수였다. 사라테가 능숙한 사냥꾼이라면 고메즈는 야수의 제왕이었던 것.
윌프레도 고메즈 | 카를로스 사라테 | |
국적 | 푸에르토 리코 | 멕시코 |
연령 | 1956년생 (당시 22세) | 1951년생 (당시 27세) |
신장 | 165cm | 178cm |
체급 | 슈퍼벤텀급 | 슈퍼 벤텀급 |
리치 | 183cm | |
스텐스 | 오소독스 | 오소독스 |
윌프레도 고메즈 대 카를로스 사라테 WBC 슈퍼벤텀급 타이틀전 1978. 10. 28
8. 손오공 대 유명우 1985 09. 08
1983년 장정구가 WBC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일라리오사파타를 두번째 도전끝에 통렬한 3라운드KO로 무너뜨리고 끊어졌던 챔피언의 맥을 이었다. 그런데 83년에는 신생 복싱 기구 IBF가 출범했다. 불과 1년 6개월 사이에 박종팔을 비롯해 무려 여덟명의 국내선수가 IBF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팬들이 진정 원하는것은 그러나 WBA, WBC 양대기구의 정규타이틀이었다. 1985년, 국내 라이트(주니어) 플라이급에는 WBC 챔피언 장정구 말고도 두명의 유력한 타이틀 도전자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손오공과 유명우가 바로 그들이다. 손오공은 당시 19승 1패 9KO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그는 첫 9경기에서 모두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이후의 11경기에서는 10승 1패 9KO기록했다. 기량이 원숙해지면서 KO능력이 급상승 한 것이다. 유명우의 전적은 17승 무패 3KO, 유명우도 첫 13경기까지는 KO의 맛을 보지 못했고 첫 KO승을 경험한 이후의 4경기에서 3KO를 작성했다.
타이틀 도전권이 걸려있는 외나무 다리에서 두 선수는 살점이튀고 핏줄기가 솟아오르는 난투를 펼쳤다.
유명우 | 손오공 | |
연령 | 1964년생 (당시 21세) | 1962년생 (당시 23세) |
신장 | 163cm | |
체급 | 라이트 플라이급 (-49KG) | 라이트 플라이급 |
리치 | ||
스텐스 | 오소독스 | 오소독스 |
스타일 | 파이터 (복서-펀쳐) | 파이터 (슬러거) |
유명우 대 손오공 1985. 09. 08
9. 마빈 헤글러 대 토머스 헌즈 1985. 4.15
1973년 데뷔한 마빈 헤글러는 7년동안 50승 2패 2무 40KO를 기록했다. 그의 2패와 2무는 모두 편파적인 판정에 의해 당한 것이다. 그는 당시 챔피언들의 기피 대상 1호였으며 가장 저평가 받는 선수로 전문가들은 그를두고 매우 안타까워 했다. '스모킹' 조 프레이저는 헤글러를 만나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You have three strikes against you, "You're black, you're a southpaw, and you're good.
“자네를 괴롭히는 세가지 문제가 있네, 흑인이라는 점, 왼손잡이라는 부분, 그리고 너무 잘한다는 것이지’
헤글러는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55전째에 드디어 그는 두번쨰 타이틀 도전(첫번째는 어이없는 무승부)의 기회를 잡았다. 적지에서 영국인 챔피언을 3라운드만에 완벽하게 분쇄한 헤글러는 링위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채 두 팔을 들어올렸다. 헤글러를 아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을만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링위로는 분노한 영국관중들이 투척한 맥주잔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이날의 상황을 헤글러의 트레이너였던 구디 페트로넬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겨우 타이틀을 획득했지, 그렇지만 마치 좀도둑처럼 도망쳐야 했어…’
머나먼 길을 돌고돌아 겨우 타이틀을 손에 넣은 헤글러는 그것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후의 미들급은 강철의 턱과 사자의 심장이 지배하는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헤글러는 80년 2월부터 84년 10월 까지 10명의 도전자를 돌려세웠고 그들중 끝까지 서 있을수 있었던 선수는 위대한 4인방의 일원이었던 로베르토 듀란이 유일했다. 그 과정에서 헤글러는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기구의 타이틀을 싹쓸이 했으며 또한 82년 슈퍼스타 레너드가 은퇴한 이래 세계복싱의 중심도 헤글러의 미들급으로 이동해 있었다.1985년의 헤글러는 미들급의 불사신이자 그 시대의 흥행을 책임지는 거물 파이터였다.
7~80년대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공업의 메카'라는 과거의 명성을 서서히 잃어가던 중이었다. 유럽과 일본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면서 미국 자동차 산업은 위기를 향해가고 있었고 그러한 조류는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를 사정없이 다운시키고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에게는 그렇지만 토머스 헌즈가 있었다. '모토시티의 코브라' 라는 별명에서 느껴지듯, 그는 그 도시를 상징하는 '로컬 히어로(지역의 대표)'였다. 데뷔전부터 32연승 30KO라는 공포스런 기록을 작성하며 승승장구하던 헌즈는 81년 레너드와의 대전에서 전체적으로 앞서나가다 14라운드에 통한의 대역전 KO패를 당했다. 그날밤 기자회견에서 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명의 챔피언이 같은 체급에 있었습니다. 둘 중한명은 물러나야했습니다. 디트로이트여, 약속드립니다. 저는 돌아올것입니다"
레너드전이 있은 후 불과 3개월만에 약속대로 헌즈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85년까지 8연승을 내달렸다. 그의 8연승의 상대중에는 로베르토 듀란이 있었고 헌즈는 듀란을 2회에 처참한 KO로 눕혀버렸다. 83전을 싸워온 듀란이 그 악마적인 커리어중 최초로 경험하는 KO패 였다. 헤글러는 듀란과 판정까지 갔다. 하지만 헌즈는 그를 완벽하게 분쇄했다.
두 선수의 대결은 운명이었다. 1985년 4월 15일 시저스 팔라스의 특설링에서 이 역사적인 대결의 막이 올랐다.
마빈 헤글러 | 토머스 헌즈 | |
국적 | 미국 | 미국 |
연령 | 1954년생 (당시 30세) | 1958년생 (당시 26세) |
신장 | 177cm | 185cm |
체급 | 미들급 (-72.64 KG) | 미들급 |
리치 | 191cm | 199cm |
스탠스 | 엠바이덱스트로스 | 오소독스 |
마빈 헤글러 대 토머스 헌즈 1985. 4. 15. WBA,WBC,IBF,Ring 미들급 통합 타이틀전
10. 아투로 가티 대 윌슨 로드리게스 1996. 3. 23.
1995년 12월 아투로 가티는 IBF 슈퍼페더급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 전적은 24승 1패 20KO였다. 그의 1차방어전 도전자는 스페인에서 온 동체급 랭킹 2위 윌슨 로드리게스였다. 로드리게스는 44승 7패 3무 24KO를 기록하고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경험이 많고 테크닉과 파워의 벨런스가 좋은 선수였다. 신장은 가티에비해 다소 높았고 리치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그는 시합전 인터뷰에서 가티의 레프트를 조심하겠노라고 밝혔다.
아투로 가티 | 윌슨 로드리게스 | |
국적 | 캐나다(이탈리아계) | 스페인 |
연령 | 1972년생 (당시 25세) | 1970년생 (당시 27세) |
신장 | 171cm | 173cm |
체급 | 슈퍼페더급 (-59KG) | 슈퍼페더급 |
리치 | 178cm | 193cm |
스탠스 | 오소독스 | 오소독스 |
아투로 가티 대 윌슨 로드리게스 IBF 슈퍼 페더급 타이틀전 1996.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