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인되어야 할 성구>
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1:13)
2)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3:24)
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3)
4) 인자의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본문 설교>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이렇게 매 주일 아침이 새로운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하신 은혜임을 알기는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기뻐 춤을 출수 있는것인줄 믿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예배를 드릴수 있는 특권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헬라어 원전의 '카타 루칸(누가에 의한)'이라는 원래의 제목에 '기쁜 소식'을 뜻하는 단어가 덧붙여져서 영어 성경은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한글 개혁 성경은 '누가복음'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바울의 동역자로서(행16:10-17; 20:5-15), 바울의 2,3차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던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누가입니다. 누가복음서는 예수께서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심을 증거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건을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부활 이후에 대한 기록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 각각 20절에 그치는 반면, 누가복음은 두 배가 념는 53절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하여야 할 것은 제자들과의 고별과 승천을 다룬 마지막 부분이 누가복음의 종결로서가 아니라, 연속 저작물인 사도행전과의 연결을 위해 기록된 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 후의 현현을 예루살렘 지역에 국한시키고, 예루살렘에 거하라는 명령대로 늘 성전에 모여 찬송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도행전의 시작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행 2:46). 이처럼 누가는 자신의 연작물인 사도행전을 전제로하여, 열린 종결 (Open Ending) 의 형태로 자신의 복음서를 마무리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서의 메시지를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복음의 역사성 (Historicity)
사복음서 저자 중 누가의 두드러진 특징과 공헌점은 그가 본서를 현실 역사와 밀접히 관련시켜 기술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는 예수님의 베들레햄 탄생이나 세례 요한의 등장 등, 예수님의 공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밀접히 연관시키며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가 당시 세계사의 배경 속에서 본서를 전개하는 목적은, 복음이 역사적 사실(事實)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 복음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았다면 신화(神話)나 미신(迷信)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의 역사성은 곧 복음의 확실성(Certainty)과 신빙성(Credibility)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2. 인종과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원의 보편성(Universality)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상향식 (Bottom-Up) 족보 (3: 23-38) 는 마태복음처럼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멈추지 않고 아담 및 하나님에게까지 이릅니다. 시므온의 노래에는 아기 예수님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며 (2: 32), 예수께서도 자신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시는 시점에 이방인인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경우를 언급하십니다(4 : 26.27). 또 예수께서는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13 : 29). 따라서 이 모든것들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같은 특정 민족만을 위한 구주가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의 구주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인종과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 만민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3.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구원의 보편성
누가복음은 여인들, 어린아이, 가난한자, 과부, 세리, 죄인, 사마리아인, 회당장, 이방인 백부장, 소경, 문둥병자, 중풍병자 등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체험하는 사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인종과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모든 계층(階層)과 신분의 차이를 역시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4. 복음 사역과 성령의 역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 전반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여 성령의 복음서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의 출생에서부터 성령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으며(1:15.35.41.67.80), 세례 받으셨을 때에 성령이 강림하셨고(3:21.22),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기 전에도 성령으로 충만하셨음이 기록되고 있습니다(4:1). 특히 시험을 마치신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In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갈릴리에서 공생애 사역을 공식 개시하셨음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4:14).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전반을 성령의 역할과 밀접히 연관시키는 누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것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위로부터의 능력을 덧입어야만,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는 것입니다(24:49; 행1:8). 이 시대의 복음 사역자들이 가장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약속하신 바 성령인 것입니다.
5. 기도의 중요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빈번하게 제시하고 있으며(3:21; 5:16; 6:12; 9:18 , 28.29; 10:21.22; 11:1; 22:32,41; 23:34,46), 이 중에 일곱 차례는 누가만의 고유한 기록입니다. 물론 누가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 역시 기록하고 있지만, 이처럼 실제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빈번하게 제시함으로써, 기도의 중요성(Importance of Prayer)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 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많은 일을 행하는 분주함 속에서나,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맞는 순간에서나, 또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순종할 힘을 덧입어야 할 때, 그리고 최후의 숨을 쉬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위로와 능력을 맛보며 그분의 품에서 영혼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복음의 수용성과 가난한 자들의 복(福)
누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복음서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으며 (4:18), 마태복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 에게 복을 선언하는 것에 비해(마 5:3),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 에게 복을 선언하고 있습니다(6:20). 또한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7:22). 물론 가난을 경건의 표지로, 부를 탐욕과 타락의 표지로 단순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이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쉽게 수용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에서의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약속하기에, 이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자들에게보다는 결핍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7. 복음의 수용성과 부자들의 화
복음의 수용성과 관련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선언된 것은 뒤집어보면, 부자들이 빠질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과 함께, 부자들에 대한 화를 대비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6:24). 누가복음 고유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16:19-31)는 부자들이 빠질 위험을 잘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부(富) 자체가 타락의 표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문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정도로 좁은 문(Narrow Door)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문을 통과하기에 부는 너무나 부피가 큰 짐이 될 수 있으며, 그 짐을 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약대가 바늘 귀를 통과하려는 것보다 어려운 것입니다(18:25).
8.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샤랑
누가복음은 소외된 자 (the Outcast) 들을 위한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목적이 곧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밝히셨으며(19:10), 그 잃은 자의 범주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포함되었습니다(15장).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시 찾아야 하는 자들로 여기고 영접하셨기에,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어느덧 가진 자들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웅장한 교회 건물,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 세련되고 지적인 계층들을 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은, 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로 하여금 감히, 교회 문안으로 들어올 용기를 잃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왜 그의 교회에서는 신분이 천하고 낮은 자들이 높은 벽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요? 세리와 죄인같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이 환영받으며, 기꺼이 몰려들 수 있는 곳이 될 때,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지향하신 그런 모습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9. 한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인종과 계층을 초월한 위대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양상은 단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거대한 ‘운동(Movement)’ 차원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자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 개개인, 곧 낮고 천한 남자와 여자들의 삶에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시고, 문둥병자들의 절박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길 잃은 한 세리를 구원하시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회개하는 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사람’의 구원을 소중히 여긴 사역이었다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 없이, 예배당이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10. 하나님 나라의 개방성과 폐쇄성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選民) 의식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을 경고하시고(13:28), 동서 남북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와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에게 ‘큰 잔치 비유’를 통해,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서 배제될 것을 시사하셨습니다(14:15-24). 또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18:17).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에게는 개방적이지만, 반대로 자기를 높이고 의롭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폐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11.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과 미래성(末來性)
예수께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기도 하시고, 미래성을 강조하기도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메시아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17:20-21),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오해하여 그 나라가 당장 임할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19: 11-27).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初臨)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 긴장(Tension)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과 이 긴장 속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교훈하시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고 맛보면서도, 미래에 있을 그 나라의 완성을 갈망하며 기도에 힘쓰며,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2. 인내, 소망, 영적 각성-진정한 종말 신앙의 요소들
21:5-28은 감람산 강화로서, 마태복음 24장 및 마가복음 13장과 병행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멸망 및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이 복합적으로 주어지고 있는데, 예언의 궁극적 목적은 ‘미래 알아맞추기’ 식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신앙으로 살도록 권면하는 데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종말의 특정 시기에 집착하기보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현재의 삶에서 신앙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Perseverance)와 소망(Hope)과 영적 각성(Spiritual Awakening)이야말로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종말 신앙의 참된 요소들인 것입니다.
13.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거듭 밝힘으로써(18:31; 20:17; 22:37; 24:26.27.44.46)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열린 종결 (open ending) 의 형태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가 계속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국면(局面)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제시한다면, 그의 연작(連作)인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구속 사역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들에 의해 계승되고 확장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24:47-49; 행1:8; 2:1-3).
그러면 누가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의사 이자,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이 아주 뛰어난 역사가 였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탁월한 통찰력을 통해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은 신약성경의 1/4을 차지하는 많은 분량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고 부르는 두권의 셩경책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실상 두권의 책이라기보다는 같은 책의 전.후편, 혹은 1권과 2권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누가복음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함이로라"(1:3,4)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차례대로 써 보낸다'는 말이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 시대를 이어, 예수님 시대를 통해 이어지며, 더 나아가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교회 시대를 통해 계속 완성되어 간다는 구속사관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를 통해 이 세상 수많은 사건의 중심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인 교회를 통해,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예수님을 묘사할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놀라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며,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누가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성령과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고(11:13),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도하는 예수님을 모델로서 잘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온 세상에 이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이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성령충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삶은 곧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삶입니다. 이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가가 보여주는 좋은 성도의 모습에 각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할것입니다.
결 론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의 의의 종이 된 성도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교훈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믿는 이웃에게 선한 신앙의 모범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며, 주님을 본받아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생활을 하고, 항상 겸손한 신앙 자세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달리 충성을 잘했거나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공로를 세웠어도, 자랑하거나 공로주의에 빠지는 일을 피하고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이행한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서는 주님과 교회에 충성하는 일도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 없이는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길을 열어주시고 모든 힘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기에 충성도 공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로 여기고 겸손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겸손의 자세를 상실하고 자기 공로주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많은 오류를 범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했기에 회개의 생활도 하지 못했습니다(녹 7:29 , 30). 겸손하지 못했기에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도 무시하고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겸손하지 못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실상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십니다(잠16:18).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주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에게 어느날 제자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세째도 겸손이다. 너희는 너희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죄인임을 항상 인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고, 겸손해야 올바른 간구를 할 수 있으며, 겸손해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유지시켜 주는 것은 겸손한 마음가짐과 자세라는 사실을 늘 유념합시다. 우리는 늘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말고 오직 주님만 높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 두란노아카데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