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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엔카 컴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瑞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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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들의 돈으로 귀족처럼 외교에 힘쓴다는 명목 하에"호의호식"하며"직함(대통령)에 맞게 생활하는 이승만, 그러나 교민들은 사탕수수 밭이나, 파인애플 공장에서 힘들게 벌어 기탁하고 강제로 채권과 공채를 사야만 했다.
그 돈은 몽땅 이승만의 주머니로 입금 됐으며 고생하는 교민들에 비해 아주"핸섬"한 젠틀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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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의 라디오 방송 의 효과 와 이용
1941년, 미국과 일본의"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패망하자, 이승만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 아무런 내막도 몰랐던 고국의 동포들에게 그의 일성은 희망을 넘은 열광의 기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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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의 사정을 알길 없는 고국의 동포들은 이승만의"라디오"소리에, 이승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구세주 인양 대단한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의 외교능력이 포장된 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우매한 국민들은 이승만을 너무 몰랐었다. 예나 지금이나"매스컴' 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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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승만을 우상화 하며 행적을 포장하는데 열을 올리는 친일사관에 젖은
노예집단들이 우리나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때 임정에선"총리"와 대통령직을 박탈하고"주미외교위원회"위원장에 위촉했으나,
그는"떠들지 말라"며 자칭"대통령직을 고수했다. 우리헌법 전문에"상해 임시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됐는데, 이때는"상해임시정부의 법은 절대적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고, 떠들지 말라"고 밀어 붙였다. 무법자 의 일방적 추태인데도, 오늘날 추종자들은 한술 더 떠 "헌법전문"마저 고치려 한다.
그 첫 번째 행태가 1948년을 건국절로 명명하고 이승만을"국조로 옹립, 임시정부 역사를 대한민국과 별개의 고난의 항쟁사로 묶어,"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세계적인 테러리스트"오사마 빈라덴"과 동격으로 비하시킴을 당연하다고 외치고 있다. "고려대" 한승조, 육사22기 紙 萬 圓, 박효성, 안병직, 류석춘, 복거일, 이명희 등 을사5적 과 같은 맥락의 인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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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맥아더"의 후광
해방 후 이승만의 귀국은 글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해방직후"신탁통치를 위해"미국에선"하지중장"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이므로 제일 높은 사람이"하지 중장'이었는데, 하지가 이승만에게 경례를 붙이자, 한국 사람들은 전부 놀랐다하지 보다 더 높은 사람, 이승만 ! 그것은 2차 대전의 영웅"맥아더 '에게 편지와 메모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로 인간적 교우를 다졌던 터에, 맥아더의 배려로 하지에게대통령의 예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와 이승만과의충분한 교감이 있은 직후의 일이라 이상할 것은 없는 사실이나 그때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고, 다만 라디오를 통해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열심히 애국한 애국자로 각인되어 있었기에 더욱 이승만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에 충분했다.
귀국한 이승만에게"러브콜"을 한 무리들은"친일파 들이었다."하지중장"의 입장에서도 통치의경험이 있는"친일파"들을 처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승승장구 남북단일 독립국이 아닌 남한단독정부에 열을 올려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여운형"도 암살되고, 김구도 제거하고, 동족상잔 의 비극 6.25, 장기집권에 최대난적 신익희의 돌연사, 조병옥의 위수술중 사망,"죽산 조봉암의 빨갱이 죄목으로 사형집행,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 시켰는가? 4.19혁명 중, 하와이로 도주, 망명, 죽은 후 시체로 귀국,
이분을"대한민국의 국조로 모신다니…….
국민이여, 지금은 눈을 부릅뜨고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때 입니다. 자칫하면, 맥아더도 제2의 국조로 섬겨질까 두려워 집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이득을 본 집단은"친일파"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대한민국"1%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국가의"명운"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역사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쳐, 마치 자신들이 애국의 선봉에 희생자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믿는"기독교"에 이런 무리들이
선발대라니…….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룟유다"의 후예들이란 사실 앞에 어이없어
목 놓아 울분의 기도만 할뿐입니다. 과연, 이들의 행위가"성경적"일까요?
의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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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없었다면…….
이승만이 쉽게, 또 빨리 귀국 할 수가 있었을까요? 또, 민족분단이 됐을까요?
친일파 의 득세가 가능 했을까요? 그리고 독재가 계속 됐을까요? 두려운 것은 맥아더를, 제 2의 국조로 섬길까 두렵습니다. 그는 한낱 전쟁"광"이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이 전쟁광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승만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많은 동상을 세워 국민들에게 우상대접을 받던 사람입니다. 이것은"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더더욱 성경적 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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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 걸 까요? 우리나라 역사에"3명의 장로"대통령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대통령 같습니다."이승만 때는"민족 분열로"동족상잔"의 6.25, "김영삼"때는 I M F 의 재앙, 이번"이명박 장로는 어떻습니까?"강부자 내각"광우병 소고기, 니므롯의 창조물"대운하"경제는 I M F 보다 더 심각합니다. 국가분위기는"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외교는"아부"자체 입니다. 어찌 우리의 문제를 미국에 매달립니까? 회개가 필요합니다. 내재한 개인의 욕망과"우상'을 떨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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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머리털 만 있는 카이로스, 뒷머리 털은 없습니다.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데 수평을 유지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등엔 균형에 마지않는 큰 날개와 양 발 뒤꿈치엔 조그만 날개가 있습니다. 커브나"턴"을 할 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까? 불안전한 기회는 기회가 아닙니다. 기회처럼 보이는 함정일 뿐 입니다.
오만과 독선의 독재와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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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사진은 3.15"정부통령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야당참관인을 내쫓고 투표함을 교체하여 개표를 하였는데, 여당 당선표가"유권자수"보다 많아 표를 줄이는"촌극"도 연출됐으며, 부정선거가 극명해 지자"마산서"부정선거"반대운동이 벌어진 후"행방불명된"김주열"군의 시신이"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발견됐다. 서울 종로에선"고려대"학생들을"정치깡패"들이 집단으로 폭행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동이 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름하여 4.19혁명 이다.
오른쪽 사진은 경무대(청와대)에서"이화장 으로 피신하는"이승만"일행의 사진이다.
당시 이 신문엔4.19 혁명을"데모"로 표기 했는데, 이때는 일시적"데모"로 간주하고
기사를 올렸지만,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성공적 혁명이 되었다.
그것도 자랑스러운, 독재를 몰아낸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엔"뉴라이트"가"혁명이 아닌"데모라고 비하 시킨다.
꼭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이시대로"회귀"하겠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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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혁명은 처절했다. 이때 본인은 학교를"땡땡이"치고"소공동"경남극장"에서"죤 웨인, 스잔헤아워드, 주연의 "징키스칸"영화를 1회 관람을 하고 시청 앞으로 나오다 혁명대와 휩쓸려 전차를 타고 효자동 경무대 앞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경험을 했다. 6.25전쟁 때도 경험 못한 극한의 경험이었다. 총에 맞아 튀는 피 ! 비명조차 못 내며 쓰러 지는 학생들 ! 당시 고교생 이던 나와 친구는 너무 놀라"눈알이 뒤집혔다는"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현장의 참상이 여러 날 꿈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밑에 사진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리(이)기붕이 그의 장남"육군소위"이강석'의 총에, 일가족 모두 사살되고"강석은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어찌 보면"이승만 보다는 자신들의 만행을 일찌감치 깨닫고 선택한 용단이라 하겠다."리기붕"의 가족은 이랬다, 父 이기붕, 妻 박 마리아,長 男 이강석, 次男 이강욱 이었다. 원래"이기붕"은"국일관 지배인 출신으로"부통령 재목이 아니었다.
항상, 허약한 체질에 용기보다는 YES MAN의 전형이었지만, 그의妻"박마리아"는
"놀부妻와 같은 기질의 여인으로 한때, 정계를 시끄럽게 한 그녀는"이승만"에게 자신의 長男인"이강석을 養子로 입적시키고 李起鵬 의 출세를 진두지휘 한 여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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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사진은"정치깡패' 두목,"이정재"다. 그는"경무대 곽영주"에게 발탁되어" 반공청년단, 화랑동지회, 등 반공이 들어가는 단체는 모두 연관됐으며, 주로"야당"탄압이 그 주목적이었다. 마치"이승만이"하와이'에서 펼쳤던 폭력테러 집단을, 그대로 계승한 것 같다. 옆의 사진은"경무대를 빠져나와"이화장'에서 주위동정을 살피는 이승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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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난 학생과 국민들은 이동상을 두들겨 부숴 버렸다.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뒹군다. 그런데"뉴라이트에선 다시"세종로 복판에 이 영감탱이 동상을 또 세운단다. 경제도 어려운데 그 돈을 헐벗은 서민들한테 사용 할 것이지,
옆의 사진은 사형직전의 경무대 의 작은 왕 "곽영주"의 사진이다.
이정재, 임화수, 등 깡패는 모두 사형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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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민이 쫓아낸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망친 후 그곳에서 도 교민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하와이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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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 이랄까? 온갖 만행을 저질렀어도"하와이 는 그를 대통령 의 발판을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인 것이다"그러나 교민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것은"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리고 기획 없는 통치철학을 통해 동족분열과 정적 제거,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 6.25 동란, 44,5입사건, 3.15부정선거, 12년간 그의 정치적 행태가 말해주듯, 철권통치의 교훈이었다. 정권연장에 급급하여 온갖 해선 안 될, 민주주의 의 역행하는 군주식"독재"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종당엔 하와이로 도망쳐 1962년 병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회상하며 1965년 시체가 된 뒤에야 조국 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그의 독재로 혼란에 빠졌던 우리민족과 정치적 후퇴를 생각 안할 수 없다. 더욱이 이분을 국조로 섬기기 위해 임정을 무시하고
"법"과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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