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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현대시〉작품상 수상작
가장자리/외2편
김소연
바로 오늘이야
라고 읊조리며 가느다란 눈매로 먼 데를 한참 보았을 사무라이의 표정을 떠올려 본다
수평선이 눈앞에 있고 여기까지 왔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 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 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
이제 막 사람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준비해 간 말들은 입술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되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머리통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의 가장자리가 젖어갔을 때
눈앞에 있는 냅킨을 접었다 접고 다시 접었다
모서리에 모서리를 대고 또 접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 서 있는 걸까 오늘은 무슨 요일일까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스프링클러의 물방울처럼 번지고 있다 빛이 퍼지는 각도로 비둘기가 날고 있다 검은 연인이 그늘 속에서 어깨를 기대고 낮잠을 잔다
여긴 어디에요? 공손하게 질문을 던진다
바디랭귀지를 하니 춤을 추는 기분이 든다 다 왔구나 싶어진다 여기가 어디든 간에
머리말
잊을 만하면 루시가 찾아왔다 우편함에 숨어 있다가 내가 우편물을 꺼내려 할 때 내 손을 꽉 잡고 기어 나오곤 했다
이번엔 달랐다 현관문에 쪽지를 끼워두었다 옥상에서 기다릴게 ⸻루시 오래 뜸하더니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척척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옥상 철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생일 축하해 루시는 파피루스가 담긴 수반을 내게 내밀었다
생일 아닌 거 알아, 네 생일에 올 수 없으니 내가 오는 날에 태어나주렴
루시는 치아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루시에게 수반을 건네받았다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시를 쓰지 마 루시는 팔짱을 끼며 눈을 흘겨보았다
그럼 나는 무엇에 대해 시를 쓰지? 옥상에 대해? 파피루스에 대해? 팔짱에 대해? 생일에 대해?
네가 사라지고 나면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생겨나고 분양 문의 플래카드가 창문마다 나부끼고 있어도 아무도 입주하지 않고 텅 빈 건물 복도에서 텅 빈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고 시멘트 냄새가 나고 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가 듣고 아무도 살지 않지만 누군가가 살았으면 하고
루시에 대해서 시를 쓸 때마다 그나마 음악도 들었고 약도 챙겨먹었는데 오늘은 루시가 왔는데 나는 태어날 수 있었는데
루시를 위해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자고 가라고 말했다 루시는 우편함에서 자겠다고 그곳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야겠다 루시가 다음에 또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이미 루시는 잠들었고 나는 루시 몰래 시를 쓰러 갔다
토마토 소바
넓지 않은 내부이지만 테이블과 제면실과 주방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답답하지 않은 건 커다란 창문 때문이다 이곳에 규칙을 지키러 온다
얼음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 젓가락을 오른편에 나란히 놓는다
움직임은 간결하게 물수건으로 두 손을 닦고 창 바깥을 보는 척하면서 제면실을 바라본다
그가 몇 걸음을 옮겨 냉장고의 문을 열고 토마토를 씻는 소리를 듣고 나무 도마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이어 듣는다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이 한 발짝 들어와 그의 등을 스쳐 다가온다 목덜미가 서늘해질 때
테이블에 박혀 있는 옹이와 눈 맞추기 해가 질 때에 여느 사물들처럼 황금빛 테두리를 갖기
이제 소바를 먹게 된다 더워도 추워서
젓가락은 들고 고개는 숙이고 무즙과 와사비를 감사합니다
⭐수상작 10편 중 3편을 소개합니다.
*월간 《현대시》 2020년 5월호 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