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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오솔길 하나 품고 살지 않나요? 강성희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보이지 않는데 까지 바라다 보았습니다. 프로스트의 이 시를 읽으면 나는 내가 가지 않았던 오래 전의 그 길이 떠오른다.
그 길도 오솔길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큰 길과는 달리 주변에 나무가 도열해 있거나 숲을 뚫고 좁고 원만하게 휘어진 구불한 길,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큰 나무나 큰 바위 등 장애가 되는 지형지물을 피해가며 지나다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좁다란 길. 그 오솔길에는 나무가 있고, 새소리가 있고, 길 섶에는 이름 모를 풀꽃도 피어 있다. 큰길에 내려 쪼이는 환한 햇빛과는 달리 오솔길에는 주변의 나뭇잎들을 비추고 남은 햇빛이 오솔길 너비만큼 새어 들어와 길을 비춘다. 그러면 소박하고 따뜻한 그 빛을 받고 키작은 길섶의 풀꽃들도 꽃을 피운다. 그렇게 오솔길을 아늑하고 포근한, 한 번 걸어가 보고 깊은 길로 만들어 준다. 내가 아는 그 오솔길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면......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만난 두 남자, 두 개의 오솔길, 좁고 구불구불하고 주변의 숲들로 인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두 길에서 나는 많이 망설였다. 이 길로 가야 할까? 저 길로 갈까?
한 길은 조금 더 넓고 화려한 꽃들과 잘 생긴 나무와 조금 더 먼 곳까지 내려다 보이는 환한, 그러나 휘어져 끝은 보이지 않는 오솔길이었다. 또 다른 한 길은 말 그대로 한 사람과 마주쳐 오면 내가 아니면 상대방이 길 한 켠으로 몸을 비켜주어야 지나갈 듯한 좁은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그 오솔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키작은 꽃들이 소박한 햇빛을 받고 옹기종기 따뜻한 기운을 만들고 있었다.
3학년 때 만난 한 남자 복학생 A는 내가 다니는 대학의 대학신문(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에는 각 대학마다 학교 신문을 친구에게 우편으로 보내주는 풍습이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에 게재한 내 글을 읽고 팬이라고 하며 다가온 K대 법대생이었다. H대 신문에 가끔 올라오는 나의 글을 읽고 관심있어 한다며 A의 옆집에 사는 같은 과 친구가 편지를 전해 주었다. 예의가 깎듯하며 절도있고 도시적인 남자. 소개해 준 친구 말에 의하면 집안도 꽤 괜찮은 지금의 시쳇말로 금수저에 버금가는 준수한 청년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찻집에서 쌩떽쥐베리를 이야기 하고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그 시절 우리들의 버전으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때로는 음악 감상실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해서 감상하고 감상문을 써서 서로 나누어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이상한 습관 하나가 늘 마음에 캥겼다.
4학년 오월 축제를 며칠 앞두고 나는 파트너가 필요한데 그는 몇 달 후에 있을 중요한 시험 때문에 우리의 만남도 잠시 보류한 채 두문불출, 공부에 빠져 있었다. 그의 조금 이상한 습관 때문에 A에게 향한 내 마음이 우정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가 권태로움울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 이상한 습관이란 헤어질 때 마다 나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큰 돈도 아니고 500원, 학생 버스비가 50원 정도였으니 큰돈은 아니어서 갑자기 필요한 곳이 생겼겠거니 하고 빌려 주었다. 그 당시에는 남녀 데이트 비용은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0:1, 10:3, 10:5 이렇게 묵시적인 기준이 있었는데 거의 A가 지불하곤 했으며 내가 지불할라치면 이런 건 남자가 해결하는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곤했었다. 그리고 그 이 후에도 헤어질 때 종종 또 500원을 빌려 갔다. 찻값, 밥값 계산을 하고 나니 버스비가 모자라나 하고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되던 이 행동들이 자주 반복이 되고 권태기에 이르니 조금 기분이 나쁘고 무시당하는 느낌도 들었다. ‘여자에게 돈을 빌리다니’ 나를 우습게보거나 예의가 없는 남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오솔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성긴 나무 숲 사이로 갈대가 자라고 길섶엔 보라색 구절초,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는 길, 아늑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손으로 갈대숲을 헤치며 길을 만들며 가야 할 듯이 좁은 길,
B를 통해서 보이는 길은 그런 오솔길이었다.
과 페스티발을 앞두고 파트너가 필요했던 우리과 친구들은 K대 치과대학 학생들과 단체 미팅을 했다. 나는 A를 생각했지만 큰 시험을 몇 달 앞두고 열공 모드로 사찰에 들어가 있겠다는 그 친구를 불러내기에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권태기라는 핑계도 있었다.
그 미팅에서 만난, 나보다 어깨 위만큼은 키가 큰 B는 키만큼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만나던 첫 무렵에는 늘 A가 우리 학교 교문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 (우리 학교는 대구에서 유일한 금남의 집이어서 학교 교정으로 남학생이 들어 올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자주 K교정 상경대학 건물 주변의 숲 속 삼각 벤치에 둘러 앉아 담론을 하거나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고, 사격장에서 총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늘이 파랗던 어느 초가을, 코스모스 보러 오라는 Y대 친구의 초대를 받아 버스를 타고나가 Y대의 그 넓은 코스모스 밭에서 사진도 찍었다. B는 남자 친구 대하듯 서슴없이 나를 대했으며 나도 그런 그가 편해서 다른 친구들과 단체로 어울려 당일치기 여행을 하기도 하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만나 같이 공부도 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미팅에서 만난 그 친구의 배경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언뜻 언뜻 묻어나는 경북 북부지방 억양이며 농촌의 가을을 이야기 하는 맥락에서 그가 농촌 출신이구나 하는 것만 겨우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가끔 가끔 이야기 속에 묻어 나오는, 나와는 조금 다른 억양이 정겹고, 만나면 활동적인 시간을 보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활 반경 속으로 내가 조금씩 더 가까이 발자국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즈음, A에게서 시험을 잘 보았노라고, 오랜만에 피자를 먹으러 가자며 전화가 왔다. 피자가 무엇인지 음식의 이름인지조차 모르는 친구가 많을 무렵이었다. 피자가 뭐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우리식으로 치면 부침개 같은 거, 말하자면 이태리 부침개’라고 설명해 줄 정도였다. 그만큼 도시적이고 세련된 그 친구는 왜 나에게 500원을 수시로 빌려달라고 할까? 그 전화가 올 때도 그는 나에게 500원을 빚지고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귀에 익은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별 생각없이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K대 근처에 있는 길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또 전화기 벨이 울렸다. 추워서 담요를 둘러쓰고 밤을 새며 기다렸다가 선착순으로 받았다고 하는 백색전화기......전화벨 소리가 얼마나 찌릉찌릉한지 다른 식구가 나올까 얼른 전화를 받으니 B의 목소리다. 주말에 첫눈 보러 태백가는 완행열차를 타잔다. 나는 방금 A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우선은 시간이 며칠 남았으니 일단 기다려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어릴 때 듣던 유행가 가사처럼 어디로 가야 하지? 하는 고민에 빠져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4학년 졸업을 앞둔,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혼기가 꽉 들어찬, 내가 살아온만큼의 세월은 나를 순수하지 못하고 현실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두 친구가 그냥 친구일 뿐 결혼 대상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두 길이 나에게 줄 미래를 비교했다. 그 즈음 들어 선을 보라고 재촉을 하시는 부모님의 성화가 나를 현실로 몰아간 탓도 있긴 했다.
A: 안정된 직장, 나와 비슷한 취향이나 새롭지 않음, 친구를 통해 여과없이 알 수 있는 가정의 정보, 차남
B: 안정된 직장, 나와 다른 취향이나 새로운 경험을 많이함. 농촌의 장남이라는 사실외에 가정의 정보없음.
나는 밤새워 두 길을 비교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며칠 후 나는 완행열차에 올랐다. 약속 전 날, A에게는 친구를 통해 사정이 생겨 약속에 못나간다는 전언을 했다. 약속 날 아침, 과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조건 나오라는,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하더라는......
그로부터 2년 후 나는 A도 B도 아닌 부모님께서 맞춤해서 찾아주신 C와 함께 미래를 향한, 빨간 주단 깔린 길을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달콤하고 경쾌한 행진곡에 발맞추어 걸어 나왔다.
두 갈래 길에서 한 쪽을 선택하여 지나가면 또 갈래 길이 나오고, 우리는 또 선택의 고민에 빠진다. 겨우 선택하여 지나온 길을 가다 보면 또 갈래 길이 나온다. 두 갈래, 세 갈래......
우리의 살아온 세월이 쌓일수록 그만큼 선택해야 할 길의 갈래도 오솔길도 큰길도 마주 하게 된다. 그래서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다고 했을까? 그러나 마지막 종착으로 가는 길은 하나라고 했으니, 선택에서 배제되었던 모든 인연, 사람이든, 사건이든, 사물이든, 내가 이 세상을 마치러 갈 때 만나게 되면 네가 있어 나 한 때 행복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참, 지금도 아주 가끔 생각나는 나의 지나간 오솔길 A, 빌려간 500원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500원 받은 바나 다름없는 기분좋은 갚음을 과 친구를 통해 받았다. 500원은 다음 만날 약속의 여지를 만드는 미끼였다고 A가 말해 주었단다. A는 그 날 길다방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에게 돌려줄 500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오솔길에서 다시 만난 새로운 두 갈래길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었을까? 내가 선택해서 걸어온 오솔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궁금하긴 하다. 만약 내가 그 때 다른 길로 갔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수많은 가지 않은 오솔길을 생각하며 미소짓는다. (끝) 2018.10.03
첫댓글 참 재미있습니다. 젊은 날 우리는 모두 그 만남의 오솔길 앞에서 많이 망설이고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선택은 많은 설렘중 다른 곳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게 아마 인연이고 내가 모르는 나의 오솔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의 오솔길들, 저마다 다른 갈래 길에 설레임과 망설임이 교차하던 추억의 오솔길을 한편의 드라마 같이 전개한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걸어오신 오솔길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글을 읽으며 A길로 갈실까, B길로 갈실까 계속 궁금헸는데 새로 등장한 C길로 가셨네요. 인생길은 알수가 없는게 늘 새로운 길을 만나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거 같아요. 다음에 만날 미끼로 500원을 빌렸던 A오솔길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괜히 의아해 했습니다.ㅎ ㅎ 화려한 시절의 스토리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안톤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라는 책을 나에게 준 사람이 생각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이었지요.글을 잘 쓰고 필체가 아주 훌륭했던 사람. 덕분에 40년도 더 지난일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추억을 생각하게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오솔길 A, 오솔길 B, 오솔길 C. 젊은 날의 추억담을 꺼내어 진솔하게 적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생의 오솔길은 동시에 두 갈래 길을 가볼 수가 없기에 항상 아쉬움과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선택에 있어 고심을 많이 하게 되지만, 최종 코스로 가는 오솔길이 운명과 인연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솔길 C는 극적인 운명의 반전을 보여주며 글맛을 감칠나게 해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내 의지와 다르게 선택되어지는 경우를 흔히 운명이니 사주팔자 탓이라고들 합니다. 타고난 운수 팔자소관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요. 그래서 인생의 오솔길이 오묘하고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요? 잠시 사주명리를 생각해봤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합니다. 지나고 보면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나 돌이켜보게 됩니다. 지금에 만족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만남과 인연을 선택해야 하는 길에 빚대어 청춘시절의 추억을 담아 주신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디아님은 대학시절부터 글을 쓰는 분이셨군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지만 인생은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지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솔길 A, B, C 중에서 가장 행복한 오솔길 C를 택하신것 같군요. 추억속의 오솔길은 미련이야 있겠지만 선생님의 지금과 같은 아름다운 삶은 담보되지 못했을것 같군요. 저도 꼭 가보고 싶은 나의 오솔길이 있었습니다만 끝내 갈 수 없는 오솔길이 있었습니다.
나의 졸작 =묵은 고백=
온밤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
가슴 밑바닥에 용암처럼 끓고 있던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입안에서만 맴돌던
‘보고 싶다’는 그 말 한마디
끝끝내 말 못 한 그 말 한마디
냉가슴에 가시 박혀 지낸
반백 년 세월
이젠
냉 가슴 쓰리고 아리어서
소리쳐 고백해야겠다
좋아했다∼
사랑했다∼
보고 싶었다∼고
죽암 선생님의 묵은 고백...결코 졸작이 아닌 듯 합니다. 우리 세대나 이전 선배님의 세대에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요즘 아이들은 말하지 못해 가슴에 묻어두고 반백년을 보낼 아이들은 없을 듯합니다.용암처럼 끓고 있는 그 한마디를 반백년을 품고 사시니 가슴에 가신들 박히지 않았을까요? 활화산처럼 타고 재가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요.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하면 죄사함을 받은 듯하여 성소에서 돌아 나오는 길, 발걸음이 가볍더이다. 감동적인 시, 감사합니다.
가슴에 오솔길 을 품고살면서 선택을 방황하는 그시절을 수채화 처럽 잘 펼쳐 보였습니다. 인연은 따로있지만 젊은날 가슴은 꿈길을 걷고삽니다. 학창시절부터 글을쓰시어 그런지 풍성한 사연 흐뭇하게 감상하며 잘 읽었습니다.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한편의 소설 같은 글입니다. 그리고 오솔길로 표현되는 두사람의 등장 인물에 대한 성격 묘사가 돋보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느끼는 갈등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갈등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글을 평 할 자격은 없지만 소재와 구성이 잘 어울린다 할까 독자의 입맛을 자극하는 좋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젊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쥔새보다 놓친새를 안타까워 합니다. 선생님께서 A도 B도 아닌 부모님께서 선택해 주신 길에 만족하시는 듯합니다. 결혼의 인연이란 나의 선택이 최후의 결정권이라고 생각도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제 3의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길이란 걸 저도 아들도 맺으준 인연이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