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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과 기도
유다 1:17-25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 1:17-25 / [경고와 교훈]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여러분에게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18)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같이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삶의 목적이 오직 온갖 악을 저지르는 데 있는 것처럼 설칠 것이라고 사도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19)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세상의 악한 일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속에는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20)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만은 거룩한 믿음의 터전 위에 여러분을 한층 더 튼튼하게 세우십시오. 성령의 힘과 능력을 받아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21)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22) 여러분의 믿음을 의심하여 논쟁을 벌이는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하고 도와주십시오. 23) 악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끄집어 내듯이 구원해주십시오. 그리고 친절을 베풀어 그들이 주님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죄 가운데 끌려 들어가지 마십시오. 죄인인 그 사람은 동정하더라도 죄 그 자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미워하십시오. 24-25) [찬양과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함께 하소서. 정녕 찬란한 광채와 위엄과 모든 능력과 권위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키시고 죄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들어 영원한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소서. 아멘.
유다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권면하는 말을 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짧은 송영으로 서신서를 맺습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17-19)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의 말씀은 예수와 여러 사도들에 의해서 이미 경고되었던 말씀입니다(마 24:11-24; 고후 11:13-15; 벧후 3:2-3). 성도들은 이런 사도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일 때 거짓 교사에 대해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의 특징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경건치 않은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조롱하고 비웃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벧후 3:3). 그들은 당을 지어 성도들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지 않기에 육에 속한 자로 살아갑니다(고전 2:14). 성도들은 이런 거짓 교사들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20-23) 유다는 영적 지도자로서 성도들에게 마지막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권면입니다. 무엇보다도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령으로 기도하고 영생을 얻기까지 그리스도의 긍휼을 바라고 기다리라고도 권면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의심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여기 의심하는 자로 표현된 사람은 미혹을 받아 흔들리는 연약한 신앙을 가진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죄하기보다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의심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은 불 가운데서 끌어내듯 구원하라고 명령합니다. 마지막으로 죄악된 생활에 깊이 빠져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구원의 소망이 끊어진 것이 아니기에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즉, 긍휼히 여기지만 죄악된 삶에 오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24-25) 유다는 서신의 마지막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짧은 송영으로 맺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를 보호하사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유다는 유일하신 구주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과 경배는 성도의 삶에 있어 필수입니다.
적용: 이단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 어떻게 힘써야 할지 생각해보고 한두 가지라도 꾸준히 실천하십시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과 구별되는 삶을 열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참된 교사로부터 배운 성경적 교리와 신앙의 뿌리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삶 가운데 있어야 하고 거짓을 분별하여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경험함으로 교회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바라보라
유다서 1:17-25 / 장석환 목사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내가 울고 있는 이유, 웃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기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웁니다. 철이 들면서 우는 이유가 다양해지는데 그래도 대부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철이 조금 더 들면 부모 때문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모가 되면 많이 달라집니다. 자신보다 자녀 때문에 울고 웃는 시간들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진짜 철이 들어야 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유다서 18, NKRV) 유다는 사도들의 말대로 자신의 시대에 ‘조롱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때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유다의 시대도 종말이고 우리의 시대도 종말입니다. 역시 오늘날에도 ‘조롱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조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선한 것을 조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선한 삶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무시합니다. 선한 삶이 자신들의 영원한 삶에 영원토록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대놓고 조롱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웃는 말을 합니다. 또한 내적으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조롱하는 말을 하지 않으나 실제로는 무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러한 모든 것을 모두 조롱이라고 말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선한 삶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신들의 정욕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롱합니다. 그들애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정욕’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합니다.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을 따라갑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짧은지, 그 감정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그들의 생각에 하고싶은대로 그들의 감정의 기쁨을 좇아 행합니다. 그 정욕을 오늘 본문은 ‘경건하지 않은’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경건은 ‘두려움’이 기본의미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 감정에 따라 삽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경건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하루,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간들은 우리의 삶을 불경건으로 이끌 것입니다.
더욱더 문제는 그러한 불경건을 불경건인지도 모르고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도 불평과 조롱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생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가벼이 여기고 조롱하거나 불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습니다.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참으로 영광스럽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 영광을 모르고 불평과 조롱으로 가득한 것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경건한 사람
유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20–21, NKRV) 이 두 구절은 헬라어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동사는 21절의 ‘지키다’입니다. 이 단어는 1절, 6절 등에도 나오는 단어로 유다서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키십니다. 어떤 누구도 흔들 수 없게 지키십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으로 그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도록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인식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을 확신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음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붙잡기 위해 필요한 3가지(헬라어 분사로 되어 있음)를 말합니다.
1. ‘믿음 위에 (너희들을) 세워가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자신을’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믿음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이것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세워라’는 것은 건물을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교회에서 서로서로를 격려하면서 믿음위에 믿음의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위에 주님의 성전을 함께 세워가고 있습니다. 늘 누군가의 믿음을 위해 섬기고 도우십시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믿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는 믿음을 위해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즉 경건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합니다. 의무보다 특권으로 기도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왜 의무입니까? 특권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십시오. 물론 잘 모를 때는 의무로서 해야 하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해보아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알면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을 압니다. 당연히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존재인 성령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부단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단히 믿음과 지혜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공부하고, 성령으로 직장을 다니며, 성령으로 가정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인정하지 않는 경건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뤄하는 경건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따스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여정은 행복하지만 또한 매우 연약하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그러하며 또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망’입니다. 주님 오시면 그 연약한 사랑도 풍성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연약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힘을 다하여 자신과 이웃이 그 사랑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사랑이라 할지라도 주님 오실 때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랑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사랑이겠습니까? 그래서 소망을 가지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소망을 품고 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더욱더 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가장 존귀한 분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들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물이 멋들어지게 세워지게 하십시오. 구체적으로 지어져 가는 일에 자신의 마음을 쏟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바른 삶을 살자
유다서 1:17 / 이원근 목사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신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대도시에서 길이 메워지도록 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 분주한 시장에서 들끓는 사람들, 소란한 기계소리가 들려오는 공장의 기술자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 각종선거에 뛰어든 정치인들, 머리를 싸매는 학자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정확하게 대답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도리어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의미한 삶을 보내는 것이 현대인들의 생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자세히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삶의 형태가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세상의 것 즉 땅위의 것만을 위주로 하는 현실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무덤 저편 즉 위엣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기다리는 소망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형제 유다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짓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성도의 바른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사도들이 이미 일러준 말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유다는 사도들이 말세에 일어날 이단에 대하여 미리 말한 그 말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은 특히 이단이 오리라고 한 말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말이었습니다. 이는 결코 사도 개인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를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도들의 말을 기억하라는 말은 베드로후서 3:1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0, 디모데후서 3:2에 말씀에도 요 2:8의 말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들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되신 구주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하시는 주님의 말씀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바울의 말을 바울 자신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받는 현명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첫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말씀입니다(신 10:11).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의 양식입니다(요 6: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성도의 바른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건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집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2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느냐” 고 하였으며, 베드로전서 2:5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사도들이 닦아 둔 터 위에서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지 조심할지니 짚이나 풀로 나무로 짓지 말고 은이나 금으로 지어 공덕을 나타내어도 타지 않는 것으로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집을 짓는 자이므로 언제나 그 건축이 완성도록 살아야 합니다. 건축자는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합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기초로 하고 위에서 세워져 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좋은 재료를 써야 합니다. 짚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이나 금이나 보석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순종이요 복음이요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령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집을 짓되 무슨 집을 지어야 합니까? 주님을 모실 신령한 집이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주님 모신 인격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술집, 사업장, 극장, 백화점으로 짓지 말고 성전으로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인격, 그리스도를 모신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바른 삶을 살아가려면 성령으로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기도의 삶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기도가 많은 삶이었습니다. 불신자나 이단자들은 성령이 없으나 신자들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므로 기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삶을 살수록 그 사람은 힘을 가집니다. 권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기도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창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더욱 진지하고 더욱 뜨겁고 더욱 간절하고 더욱 깊은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는 뼈가 부러지도록 간절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머리를 무릎에 넣고 간절히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벽을 대하여 돌아 앉아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금식하면서 두문불출하고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정력을 쏟는 기도요, 최대의 노력이요, 단판을 짓는 결단입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런 기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진정으로 사랑을 나눈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사랑할수록, 정이 깊을수록 더욱 간절해지고 대화의 내용이 진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정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세를 당할수록 기도는 우리의 비장한 무기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자를 두려워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기도로 우리의 일생을 살면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4, 성도의 바른 삶은 인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실현되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도록 기다리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때에 나타날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경건 생활이요, 이것이 바로 성도의 인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요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 향락, 모든 세상 물질문명 그 어느 것이라도 그것은 다 잠깐입니다. 부귀와 화와 권력과 사치가 모두가 다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위에 것을 찾고 그것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현실에서는 참고 견디고 기다림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참된 소망은 곧 인내입니다. 기다리며 사는 것은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영생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모세가 하늘의 상주심을 보았기에 애굽의 보화에 빠지지 아니했습니다. 우리의 인내도 이제 이 세상 유혹에서 이겨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이기신 것처럼 성도도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5, 성도의 바른 삶은 자기를 지키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죄악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게으른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게으름뱅이가 되고, 거짓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리고, 속이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사기꾼이 되어 버리고,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도적이 되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면 간음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로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악을 범하는 죄인이 됩니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영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도덕이나, 수양이나, 교양이나 어떤 것으로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주께 드리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다 드리세요. 그것이 가장 안전한 보관소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계시면 우리의 마음은 가장 안전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치 없는 세상 재물은 잘 지키면서 천하보다 귀하 영혼과 생명은 지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26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 영혼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누가복음 11:16에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을 지킨다고 영혼을 지키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가장 귀중한 보배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우리는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양약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바른 삶을 사시므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모든 이들이 함께 열심히 건축되어져 가기를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정욕에 마음을 기울여 타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정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위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아파합니다. 겉모양만 있는 물 없는 구름이 되었다고 아파합니다. 모두 자신의 정욕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다가 오늘날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요?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도록 갈망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그리고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도록 힘쓰십시오.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다서 25, NKRV) 유다서 마지막 구절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아마 가장 뛰어난 경배 송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전부터 그리고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 전부였으면 합니다. 이제는 진정한 철이 들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이 참으로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오직 그것 때문에 울고 그것 때문에 웃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
유다서 1:17-23 / 김학우 목사
유다는 아주 짧은 성경에서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고 강조한 것을 시대가 어둡고 혼란하고 세속적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사랑, 긍휼의 삶을 살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오늘은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유다는 자신을 (1절)“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주님 동생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형제가 쓴 서신이 하나 더 있는데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서신이고,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쓴 서신입니다.
이들은 처음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부활 이후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한 가족이 온전히 믿음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의 삶을 보고 자란 이들은 변화되어 육신의 형제가 아닌,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 자신의 서신에서 신앙과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유다를 포함 제자들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처음 믿음이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넘어지기도, 서로 다투기도, 주님을 부인하며 떠나기도 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떠나, 세상에 나가보니, 비로소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국을 떠나보니, 고국이 참 소중하다고 깨닫는 것이나, 코로나로 인해 일터와 직장,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나, 교회당 출입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외국 땅에서 땀 흘려 일하고, 함께 믿음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20절)“거룩한 믿음 위해 자기를 건축하라” 이것은 이번, 눈사태로 공원에 있는 나무 70%이상이 가지가 잘리거나, 뿌리 채 뽑혀, 손상을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유다는 나무를 지탱해 주는 것이 뿌리이듯이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기초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쉽게 넘어지거나, 낙심되어 방황하게 되는 것은 믿음의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믿음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평소 반석위에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별 차이가 없지만, 비바람이 불 때 구분됩니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 믿음이 발휘될 때입니다. 견고한 믿음으로 오늘의 어려움을 잘 견디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2.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믿음이 있는데, 사랑이 없다.”라든지, “저 사람은 사랑은 있는데, 믿음은 없다.”라는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사랑과 믿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열매를 분리할 수 없듯이, 유다는 믿음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고 교훈합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사랑은 열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믿음의 뿌리를 통해 사랑이 공급된다.” 공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을 때, 사랑은 변질 될 수밖에 없습니다.
(21절)“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 유니세프, 기아대책, 구세군 등 여러 나라에는“사랑의 열매”란 재단들이 있습니다. 마크는 세 개의 발간색 방울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달고 다닙니다. 유다가 말하는 사랑은 “열매”를 말합니다.
부모에게 사랑의 열매는 자녀입니다. 농부에게 사랑의 열매는 수확입니다. 교회의 열매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처음으로 믿게 된 스데바나 가정을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첫 열매인 스데바나의 가정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열매라 부릅니다. 우리의 자녀가 기대에 못 미쳐도 원망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받은 급여와 땀 흘려 일한 수입이 적다해도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까? 열매를 얻을 때입니다. 때로 열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열매는 우리를 지탱하고 지켜주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열매들을 기억하므로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3.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
유다는 처음 예수님에 대해 비난했던 그가(22절)“어떤 의심하는 자를 긍휼이 여기라” 의심하는 자, 믿음이 약한 자를 욕하지 말고, 오히려 긍휼이 여기라고 교훈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음식과 안식일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율법에 따라 우상제물이나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지만, 로마와 헬라인 신자들은 아무것이나 잘 먹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부정한 자들”이라 멸시했고, 로마 신자들은 “왜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를 안 먹어”라며, 율법주의자들이라 비난했습니다.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정죄 하였을 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하였습니다. 기세등등했던 무리들이 하나씩 둘씩 물러갔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종종 커피마신 컵을 식탁에 그냥 두고 간 것을 보고 “누가 치우라고 두고 간 것인지 모르겠다.”하지 말고 “오늘 바쁜 일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내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면, 만사가 밉게 보이겠지만,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긍휼은 되돌려 받는 복입니다. (마5:7)“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요”,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긍휼이 여긴 만큼 복을 주셨는데, 자손 대대에 복을 주셨습니다.
유다는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하며,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교훈하였습니다. 견고한 믿음과 사랑의 열매, 그리고 긍휼이 여기므로 긍휼히 여김을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유다서 1:17-23 / 배의신 목사
유다서 1:17-23,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공동번역성경)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되새기십시오. 18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자들이 나타나 여러분을 조롱할 것이라고 사도들이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19 이런 자들은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본능적인 욕정을 좇아서 살면서 분열을 일으킵니다. 20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21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23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 들어가는 말
이번 주 14일에 4박5일 일정으로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황이 방한한다고 나라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세계는 교황을 평화의 사도라고 칭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기대치들이 있나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22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가 가톨릭과 ‘신앙과 직제 협의회’라는 협의체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가톨릭과 일치시키는 영적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결의한 것입니다.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가톨릭은 온갖 종교들과 손잡은 혼합종교일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그런 종교와 일체를 이루겠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6절을 봅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NCCK에 가입된 교단이 예장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기독교한국루터회, 한국정교회 등. 교인의 수로 따지면 수백만 명이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우상과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교회들도 이미 세상에 물들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영화, 드라마, 각종 토크쇼와 연예 프로그램, 음악 등. 문화매체를 통하여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들은 ‘만사형통과 세상적인 부를 꿈꾸며’ 영이 잠들어 있습니다. 마치 따뜻해져오는 물속에서 평안히 앉아서 자신의 몸이 익어가는 줄도 모르는 개구리 같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경고하십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만약 지금 이 시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 자신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 말세의 현상을 밝히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깨닫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유다서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기록한 편지입니다. 서기 68-70년경에 기록했을 이 편지는 당시의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에 대한 대처 방법과 정결한 신앙을 유지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은 1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 속에 있는 본문말씀은 먼저 수신자들에게 사도들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돕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까?
어느 신학교 교수가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신학생이 헬라어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 말은 ‘신학생에게 헬라어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는 도덕적인 용기’라는 뜻입니다. ‘아니오’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도덕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권세로 유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서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말다툼을 했던 것처럼 이런 유혹은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것, 이름이 나는 것, 육체의 쾌락, 평안하고 안락한 삶, 재물 등.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이런 세상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야고보서 1:27절을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경건함은 ‘소외 된 이들을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4: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세속적인 것을 탐하는 자신의 마음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지켜야 할 세속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요한일서 2:15-16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가 자신이 물들지 않도록 지켜야 할 세속은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일반적으로 ‘향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육신적으로 죄악 된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탐욕스러운 욕망’입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탐하는 모든 것입니다. 골로새서 3:5-6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할 만큼 무서운 죄악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공명심(功名心,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려는 마음)’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공로사상’입니다.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속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영의 생명’입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이 말씀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교회 내에 있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15절 이하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진실한 성도들의 영의 생명을 뺏으려 합니다. 지금도 마귀들은 수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종파들과 거짓 목사들과 거짓 선생들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 어떻게 세속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세속의 세력들인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영적인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길뿐입니다. 본문 20-21절을 공동번역성경으로 봅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고귀한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자신을 지키는 길이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길인데 특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은 요한복음 15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의 생명을 지키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요한복음 15:10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12절을 봅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본문 22-23절에서 말씀합니다. 공동번역성경으로 봅시다.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 주고, 죄악의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즉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도와주고, 주님을 알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행위를 미워해야 하지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삶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방어책입니다. 세상의 병법에도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도 그렇습니다. 야고보서 4: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의 공격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귀의 특징은 거짓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의 역사는 거짓으로 가득하고 자신의 것을 나타냅니다. 생활 속에서 항상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소속한 세상적인 공동체가 중심이 되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거짓된 것이 많습니다. 불리하거나 어떤 일을 모면하려고 쉽게 거짓말을 지어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거칠고, 이간하며,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지키지 못 할 달콤한 말들로 유혹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잘 못 되고 거짓된 신앙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고 이들의 사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합니다.
아직 깨달아야 할 말씀은 많고, 지금 영적인 세상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막장’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도 막장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론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이 어디까지 왔든지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 마음 두지 말고 오히려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 과감하게 버리고 온전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은 빨리 버리십시오. 지켜야 할 것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키십시오. 영의 생명이 강건하면 육신의 삶을 덤으로 따라갑니다. 버릴 것 버리고 지킬 것 지키는 지혜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아 만들기
유다서 1:17-21 / 박종순 목사
본 문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다서 1:17-21)
사람 눈 속에는 간상세포 1억 3천만개가 들어있고 1백조 분의 1에 해당하는 약한 빛까지 식별하는 초감도 기능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은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눈이 밝아도 박테리아나 세균을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종이 한 장 너머에 있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예를 들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지고 신사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은 정반대의 경우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고 미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기품과 풍요가 꽉 찬 사람이 있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 대로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을 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경계해야할 부류의 사람들과 따르고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경계해야 될 사람들
1.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18절을 보면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은 자기욕심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세를 밝히고 있습니다. "원망하는 자며 불평을 토하는 자며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아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 자랑, 아첨은 모두가 입으로 뱉는 심리적 표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그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입을 열면 튀쳐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만 챙기는 사람, 세상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원망, 불평, 자기 자랑, 아첨을 일삼는 사람, 그런가하면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경계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2. 기롱하는 사람들입니다.
18절 끝을 보면 "기롱(譏弄)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기롱이란 "다른 사람을 속여 희롱하거나 농락하는 것", "실없는 말로 시시덕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열왕기하 2:23-24을 보면 그 당시 벧엘에서 동네 청소년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기롱하다가 곰에 물려 40명이 찢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키가 작고, 몸집은 크고, 머리는 벗겨진 대머리였습니다. 어떤 날 벧엘 동네 앞을 지나는데 청소년들이 떼로 몰려나와 엘리사를 조롱하며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며 놀려댔습니다. 24절을 보면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 아이들 40명을 찢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선지자를 조롱하고, 희롱하고, 희희덕거리며 기롱했기 때문에 암곰에게 찢기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남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희롱하는 짓거리는 삼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경계할 사람들입니다.
3. 당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19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라고 했습니다. 당을 짓는 다는 것은 당파를 만들어 뭉친다는 뜻입니다.
요즘 신당창당을 하겠다는 모 정당 때문에 정치권에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신당을 만들겠다는 속사정은 뻔합니다. 이대로는 국민의 지지도 받을 수 없고 정권 재창출도 어렵기 때문에 뜻맞는 사람들이 헤쳐 모여 당을 새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잘 모르는 문외한으로서 한마디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당을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새 당을 만든다해도 석달 채 못되어 헌 당이 될 것입니다. 그곳은 여당, 야당도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당이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는 특정 정당 편을 들어도 안되고 당을 만들어도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모여 쑥덕거리고 파벌을 만드는 것도 있으면 안됩니다. 지역끼리 따로 모이고, 출신끼리 따로 모이고, 친인척끼리 따로 모여 무엇을 만들어도 안됩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당이 있을 뿐이고 베드로파도 바울파도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편을 만들고 세를 규합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 정치판으로 나가는게 좋습니다.
4. 성령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19절을 보면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없다는 것은 성령님을 부인하고 육신의 지시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경건을 멀리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고, 기도를 멀리하고, 말씀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좋아하고, 남을 희롱하고, 폄하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당을 짓고 제 편을 만듭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경계해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2. 따르고 배워야 될 사람들
1.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20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라고 했습니다. 건축의 3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계, 시공, 관리입니다. 특히 설계 가운데 기초 설계가 잘되어야 좋은 건축이 가능하게 됩니다. 100층 빌딩을 지으려면 100층 건물이 올라갈 수 있는 기초가 설계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기초는 "거룩한 믿음"이고, 건물은 "자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믿음이란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믿음이 거룩한 믿음인 것입니다.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쓴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도로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건너는 것은 힘들고 위험해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길 건너까지 저와 함께 가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 ,그렇게 하지요."라며 쾌히 승낙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건널목을 건넜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시각 장애인이라 앞을 못 보는데 당신이 도와 주셔서 무사히 길을 건널 수 있었는데요." 두 시각장애인의 순수한 신뢰에 얽힌 일화인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나치게 강조되다보면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하다보면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건축한다는 것과 자기를 과대포장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1972년 제 20회 올림픽이 독일 뮌헨에서 열렸습니다. 처녀로 출전한 미국의 마라톤 무명선수 쇼터(Shorter)가 월계관을 차지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언론이나 미국언론도 그런 선수가 출전한 것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로 이름 없는 선수였습니다. 우승을 한 후 우승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남과 겨루기 위해 훈련을 하거나 의식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남과 겨루지 않고 철저하게 저 자신과 싸우고 훈련했습니다. 우승도, 미국의 명예도, 제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나와 싸우고 훈련했을 뿐입니다."
돈을 벌면 뭘 합니까? 성공하고 출세를 하면 뭘 합니까? 권력을 잡으면 뭘 합니까? 내가 쓰러지고 무너지면 그걸로 끝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를 건축해야 합니까? "예수 닮은 나, 믿음 위에 지은 나"로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닮은 나"가 될 수도 있고, "마귀 닮은 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518장은 「신자되기 원합니다」라는 흑인영가입니다. 우리 찬송가는 "신자되기 원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거룩하기 원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4절로 되어 있습니다만 미국 찬송가에는 "유다 닮기 원치 않습니다(Lord I don`t want to be like Judas)"라는 소절이 들어 있습니다.
누구 닮은 집을 짓느냐에 따라 행불행과 성패가 결정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아멘.
2.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20절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했습니다. 19절의 "성령은 없는 자며"라는 말씀과 대비됩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26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내 힘을 믿고 기도하면 낙심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흐렸다, 갰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유는 내 배짱이라는 것은 내 기분을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은 불변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하면 변덕부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분으로 기도하면 오래 못합니다. 감정으로 기도하면 오래 못 갑니다. 내 힘으로 기도하면 하다가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기도하면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하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3. 자기를 지키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를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닮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예수의 종으로 나를 건축했으면 그 집을 올바르게 보호하고, 유지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은 긍휼을 베푸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결혼 날을 기다리는 신랑신부처럼, 여행 날을 기다리는 여행객처럼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제 친구 중 한사람은 여행 떠나기 석달 전부터 여행가방을 채기고 짐을 쌉니다. 여행 스케줄을 수첩과 메모지, 그리고 일기장 세 군데에 써넣습니다. 이유는 하나를 잃어버려도 다른데서 일정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 떠나기 전까지 세 번, 네 번 짐을 챙기고 검사하고 확인합니다. 그 철저한 준비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합니다. 좀 지나치긴 하지만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나를 건축하고 지킵시다. 순결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나를 지킵시다.
죄와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믿음의 집을 지킵시다. 그리하여 영광의 나라에 들어갑시다.
사랑하는 자의 일
김창인 목사
17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계속 말하다가 20절에 가서 또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른 다음에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유다는 본서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자들의 할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할 때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본서는 유다가 썼습니다. 이 유다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고 가룟 유다가 아닌 유다가 또 있습니다. 그런데 본서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그 유다가 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동생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신 다음에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더 낳았습니다. 그 동생들 중에 첫 동생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었던 사람 즉 야고보서를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맨 막내가 유다입니다. 유다 역시 다른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고 오순절 교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기도 합니다. 본서를 쓴 이 유다는 바로 예수님의 막내 동생인 유다입니다.
이 유다, 즉 감독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다 감독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그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까? 그 부르심을 입은 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해주고 둘째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둘째로는 유다 감독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I. 기억하는 일(17∼19)
1. 말씀을 기억하는 일(17절)
먼저 "기억하라"하였는데 기억하는 일 중에 첫째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즉 사도들의 한 말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한 말이라 해서 사도들이 제 마음대로 한 말이냐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사도들은 3년 4개월 동안 매일같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떠 먹이듯이 가르치고 전해 준 복음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비록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해주는 말이긴 하지만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들이 전해 준말을 기억하라 하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의 이름도 아니고 어떤 사건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려도 예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살아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려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선생님이 가르쳐 줄 때 열심히 듣고 그 다음에는 깨우쳐야 됩니다. 그리고 깨우친 다음에는 우래 기억했다가 그것을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글을 바로 배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혹은 설교를 통해 깨우침을 받을 때에 열심히 들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말씀을 꼭 깨우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후에는 오래오래 기억했다가 생활 중에 그 말씀을 적용시킬 때에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 생활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 나오는데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조그만 신약 성경을 하나만 들고나옵니다. 신약성경만 주머니에 넣고 다니니 극장에 가는지 교회에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막 들어 올 때 그것을 꺼내 듭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읽을 때는 열심히 찾아보아도 구약이라면 아예 멍청하게 앉아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안 가지고 나오니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구약성경은 없이 신약성경만 가지고 집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다 그 분의 생일 초대를 받아 갔더니 친척들이 많이 왔는데 친척들이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그 중 한 분이 찬송가와 성경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유다서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유다서는 지금 읽었지만 신약 맨 마지막 요한계시록 바로 전에 한 장밖에 없는 책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찾는고 하니, 구약성경 창세기부터 찾아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한참을 찾아도 찾지를 못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그 집사의 부인이 하는 말이 왜 이쪽에서만 찾느냐 저쪽에서 좀 찾아보라고 합니다. 아마 구약, 신약도 모르는지 이쪽, 저쪽 하더군요. 그러니 찾아집니까? 그러니까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더니 더 못 찾습니다. 나중에 어찌해서 찾기 찾았습니다만 잠잠하고 있으면 체면이나 서지요! 자기 딴에는 체면 세운다고 하는 소리가 "아이고 목사님! 나는 또 유다사라는 줄 알고 구약에서 찾았지요"하더군요. 여러분 유다사는 구약에 있습니까? 제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참 야단났구나, 집사가 저 모양 저 꼴이면 어떻게 하나, 성경을 이렇게 안 읽고 성경을 이렇게 모르는 형편에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우치고, 기억했다가 생활 속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맏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라 대학 입시를 준비하느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가 내 딸만 위해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교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모든 아들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저는 일류대학교 붙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만 사천만 인구가 사는데 교인이 천만입니다. 사 분의 일입니다. 천만이 전부 일류대학만 붙여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입장이 곤란하시겠습니까? 다 일류대학을 붙여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력대로 붙여달라고 하면 됩니다. 여러분! 내 아들딸들이 시험 칠 때 제 실력을 제대로 못 나타내고 시험을 제 실력대로 못 치르니까 문제입니다. 제 실력을 백퍼센트 나타내 보십시오. 그것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교회의 아들딸들 공부할 때 열심히 선생님께 배우고 그 다음에는 깨우치고 오래 기억했다가 시험장에 들어가는 날 아는 실력대로 그대로 쓰게 해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꼭 기억했다가 써먹는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꼭 기억했다가 여러분 생활 속에 적용하고 활용해서 문제를 풀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기억하는 일이 첫째입니다.
2. 마지막 때를 기억하는 일(18절)
"마지막 때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말세가 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하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쉽게 설명해 드리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제멋대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교인들 중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기에 제멋대로 살고, 제멋대로 살다 보니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롱을 한다는 기록을 또 보게 됩니다. 기롱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조롱"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어서 자꾸 조롱을 합니다. 누구를 조롱합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고 그 따위 식으로 믿어야 되느냐? 그렇게 주일날 꼭 나가야 되느냐? 그렇게 충성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느냐?"하며 조롱하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교인이 교인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중에 교인들에게 자꾸 상처를 받거든 말세의 징조인 줄 알면 됩니다. 즉 유다 감독이 우리에게 지적해 준 말세의 징조가 바고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알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마지막 때인 줄로 기억하시고 더 좋은 자리에서 주님 영접할 준비를 해야 되겠다 하고, 준비하며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3. 쭉정이를 기억하는 일(19절)
다음에는 쭉정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조롱하는 사람들, 즉 첫째로, 당을 짓는 자며 둘째로는 육에 속한 자며 셋째로는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상처만 주고, 믿음이 떨어지면 좋아하고, 자기네와 한 패가 되면 좋아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드나들면서 당을 짓습니다. 패거리를 짓습니다.
교회 안에서 패거리라고 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것이요,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남전도회가 있고 여전도회가 있고 청년회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고 왜 따로 패거리를 만듭니까? 마귀의 패거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패거리를 짓는 자들 즉 당을 짓는 자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에 속한 짓만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 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패거리에 속한 사람들은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육신에 관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육신에 대한 것만 찾고 애쓰기에 육신에 속한 것은 제법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제법 큰 소리도 칩니다. 그런데 막상 있어야 할 성령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쭉정이가 아닙니까? 겉으로는 제법 가진 것처럼 광채가 나지만 실상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있어야 할 성령은 없고, 말씀은 없고, 은혜는 없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이 쭉정이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쭉정이를 보십시오. 전부 불에 태워 버리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 쭉정이를 갈라놓으려고 교회 안에 환란의 바람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쭉정이입니까? 겉은 멀쩡하고 제법 갖추었어도 실속 즉 성령은 없는 사람이 쭉정이입니다. 불에 태워 버릴 수밖에 없고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쭉정이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말세인 줄 기억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일은 말씀을 기억하고, 마지막 때에는 기롱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쭉정이의 말로를 기억하고 우리의 믿음 생활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II. 건축하는 일(20∼21절)
1. 자기를 건축하는 일(20상반절)
20절부터 21절에는 건축하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첫째는 자기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20상반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인생을 건축하는 건축자인데 믿음 위에 건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집을 지을 때 터를 든든히 하고 집을 지으면 그 집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그 집은 쓰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일평생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는 사람, 그것도 착실히 잘 믿는 사람이 되라 이 말입니다. 믿음 위에다 나를 세우고, 믿음 위에 내 가정을 세우고, 믿음 위에다 내 사업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 우리가 잘 아는 펄벅여사가 쓴 책 중에 '대지'(大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펄벅은 미국에서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딸입니다. 이 분은 중국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중국을 너무 잘 압니다. '대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주인공 왕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난한 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을에 황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종으로 있던 아랑이라고 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합니다. 종과 가난한 총각이 결혼하다 보니 처음에는 남의 집 땅을 부쳤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어 땅을 조금씩 사 가지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뭔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몇 해 흉년이 계속되는 동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도시로 나가 인력거를 끌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밀며 돈을 벌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많이 모으게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때마침 부자 황가 집안이 망해서 집도 팔고 땅도 파는 형편이라 그 집도 사고 땅도 다 사버렸습니다. 그래서 종이 옛날 주인집에 주인으로 들어앉았습니다. 이쯤 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그 남자, 왕릉이 딴 생각을 합니다. 변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귀하던 아내가 싫어졌기 때문입니다. 땀에 찌들고 온갖 고생에 찌든 모습이 보기 싫습니다. 손을 한번 만져 보아도 터지고 늙고 거칠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젊은 여자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창녀를 자기 첩으로 맞이합니다. 창녀 출신인지라 남자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어 주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원치 않아서 손녀 뻘 되는 젊디젊은 소녀를 또 첩으로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내내 함께 고생한 아내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남편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돈은 좀 가졌지만 남편을 빼앗긴 그녀가 행복했겠습니까?
이것이 뭘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성공이라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이 오히려 행복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럼 왜 그랬습니까? 성공이라 해서 모두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에게 믿음이 있었다고 해보십시오. 자신을 믿음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을 믿음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한 행복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2. 기도로 건축하는 일(20하반절)
두 번째로는 기도로 건축하는 일입니다. 즉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했는데 우리는 건축할 때 기도로 건축해야 됩니다. 나를 쌓아 갈 적에 기도로 쌓아라, 그 말입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열 두 제자를 거느리고 가다가 아홉 제자는 산밑의 동네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를 깊이 하는 중에 변화가 되셨고 천국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즉 제자들이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하신 후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산 아래에 내려와 아홉 제자들에게 이르렀더니 제자들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주시고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즉 "주님!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얼마 전에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방방곡곡에 보냈을 때에는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에게 말씀 한마디로 명령만 내리면 귀신이 척척 나가더니 그 때는 되던 일이 지금은 왜 안됩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기를,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 17 : 2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사건이요 똑같은 물음에 대하여 마가복음 9장 29절에는 '기도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 적은 연고요 기도하지 않은 연고 즉 믿음이 적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뜻은 그 전에 잘되던 일이 지금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기도 안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그 전에 잘 되던 사업이 안 됩니까? 기도 안 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 안 하면 그 전에 잘되던 일도 지금 안 될 수 있습니다. 즉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망신을 당하고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를 건축해 나아갈 때 꼭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일해야 합니다. 나를 기도로 건축하는 사람 즉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지키며 건축하는 일(21상반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며"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벌받을 짓, 망 할 짓 하지 말며 미움받을 짓 하지말고 하나님의 사랑 받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 유대 나라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부부가 결혼해서 살다가 아이를 못 낳으면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절대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한국 사람들 이상으로 족보를 귀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보낼 것을 약속하고 허락한 다음부터는 메시야가 어느 족보를 통해 오느냐가 상당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족보를 귀중히 여겼고 아들이 없게 되면 참 서러워합니다.
한 부부가 랍비에게 찾아왔습니다. 랍비의 판결은 절대적입니다. 아들을 못 낳아서 헤어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랍비가 남편에게 묻기를 아내가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하면 그 요청을 들어주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편이 이혼을 하는데 못 들어주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내도 아기를 못 낳아 이혼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다고 둘이 모두 약속하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그 동네 장로를 청했습니다. 왜요? 장로는 증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혼 잔치입니다. 이혼 잔치를 베풀고 잘 차려 먹고 마지막으로 부인을 불러 네 소원을 얘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때 이 여자가 이런 저런 요구를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재산을 달라든지, 쫓겨나지만 한 달에 몇 번만이라도 들려 달라든지, 그밖에도 등등 여러 조건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때 부인이 잠자코 있다가 하는 말이 "요청이 하나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남편은 들어주겠다고 재확인했습니다. "그럼 내 남편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이혼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랍비가 "이혼할 없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둘은 아이 없이 평생 잘 살았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자로서는 한 밑천 가지고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 못 받고 아낌을 받지 못한다면 뭐가 그렇게 좋겠습니까? 차라리 돈이 없을지라도 남편에게 아낌 받고 사랑 받는 여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 자기를 늘 지키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4. 도움받아 건축하는 일(21하반절)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라"이 이야기를 이번 가을에 더 절실히 느껴집니다. 봄철과 여름철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적당한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셨습니까? 농사가 너무너무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스컴을 통해 금년은 풍년 들었다고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그러나 가을철에 한 달 내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벼를 세워 둔 곳에 비가 오니 쓰러지고 벤 것은 논에 둥둥 떠서 잠기고 그러다 보니 갑자기 말릴 수도 없고 벼를 겨우 훑어서 찧어 보니 품질이 저하되고 싹이 나서 못 먹게 되었습니다. 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게 해야만 먹는다는 말씀입니다. 농사만 그렇습니까?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잘 되어 이제는 먹는가보다 했더니 먹지 못하는 일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이 먹게 해야 먹고 누리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도움 즉 예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 가정을, 우리 자신을, 우리 사업을 건축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도와 주는 일(22-23절)
1. 의심하는 자를 돕는 일(22절)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도와준다는 말은 왜 혼동하느냐 할지 몰라도 긍휼은 도움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보니 저기 아주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도와주기는 해야 되지만 도울 힘이 없습니다. 도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말로만 끝나고 마음으로만 끝나 버립니다. 사람은 무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이 있을 때 말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기만 하면 반드시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은 반드시 도움을 전제로 합니다.
의심하는 자를 도와주라. 예수를 믿고 싶지만 자꾸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고 싶어 하지만 의심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어서 잘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도마라고 하는 제자를 삼년이나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의 간증을 다 듣고도 못 믿겠다고 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손의 못 자국도 보여 주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그가 어떻게나 열심히 믿었는지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 때 복음이 중국 대륙으로 와서 경교(景敎)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의심하는 자를 도와 발로 믿게 하고 잘 믿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해야 할 일입니다.
2. 끌어내어 돕는 일(23절)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이것은 이단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다시 재혼하여 자녀는 낳고 나름대로 살아갔습니다. 그 아버지는 장사를 했는데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제법 재산도 모아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이단에 빠졌고 그 다음에는 본인까지 재산을 다 바치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목사인 아들이 얼마나 기도했고 얼마나 찾아가서 권면했습니까? 그런데 나중에 전부 망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고 이단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아들 목사가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의 학비까지 대고 생활비를 대어줄 정도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힘에 겹지만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를 끌어내야 했습니다.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구원한 것처럼 우리도 이단에 빠진 형제들을 어떠한 짐이 된다 할지라도 끌어내어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
김광일 목사
영국 귀족이 인도의 한 영주에게 트럭을 선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귀족은 영주가 사는 곳을 방문하였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보내 준 트럭은 쓰지 않고 한쪽 구석에 세워둔 채, 여전히 소를 부려서 짐을 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족은 트럭에 기름을 넣고 소들이 지고 있던 짐을 싣게 하고는 시운전을 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영주는 그제야 트럭의 용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트럭 한 대가 소 수십 마리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럭이 있어도 기름이 들어가야 움직이지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기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많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더해 주시고 지혜와 지식을 더해 주셔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원칙입니다. 원칙을 실천하느냐 못하느냐가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원칙에 충실할수록 성공의 확률은 높아지고 원칙에 위배될수록 성공률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원칙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원칙만 지켜지면 신앙생활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만 잘되면 다른 모든 일들이 따라서 잘되기 마련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되고 몸도 건강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를 믿음 위에 세워줍니다
19세기에 런던에서 가장 유명했던 설교자 알렉산더 매클라렌 목사님은 어느 주일날 그 도시에서 무신론자로 잘 알려진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배를 마치자 그는 무신론자에게 4주동안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를 설교하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네 번째 주일예배가 끝난 뒤 무신론자는 예수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매클라렌은 너무 기뻐서 어느 설교에 특히 감동을 받았느냐고 물었다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물론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독교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 할머니였습니다. 몇 주전 교회에서 나가다가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찬 할머니 한 분을 보았는데, 길이 얼어서 걷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제가 좀 도와드렸습니다. 그 분이 저를 쳐다보면서 '선생님, 제 구주이신 예수님을 선생님도 아시는군요. 그 분은 제 인생의 전부예요. 선생님도 그분을 사랑했으면 좋겠어요'하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몇 마디가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불행한 사람은 불행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믿음 위에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끌어 갑니다.
목수가 기둥을 주초 위에 세우며 집을 짓듯이 성령은 우리를 믿음 위에 세워주십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전 먼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가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머리위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40일 동안 주리시며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의 사명자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성령은 넘어진 자 실망한 자에게 용기를 주어 일으켜 세우십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마른뼈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 일으켜 세우신 것은 '생기' 하나님의 입김이었습니다(겔37). 하나님의 입김은 성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보잘 것 없는 어부인 시몬을 위대한 전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세워주심을 받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여러분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믿음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세워주지 못해도 성령이 세워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에 의하여 일으켜 세워주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를 기도하게 합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을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문을 작성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문을 제출하시고 성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성삼위일체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데 우리가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람이 도를 깨닫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산 밑에 있는 농부의 집에 부탁해서 식사를 날라다 먹으면서 그야말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여러 날을 기도하는 데도 깨달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덕이 높은 수도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깨닫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수도사는 당신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는 농부가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인데 농부의 집에 가서 며칠 머물면서 농부가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농부의 집에 가서 농부가 하는 것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 농부에게 어떤 면이 있기에 배울 것이 있다고 했을까?' 생각하면서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농부의 생활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주여!"한 마디 외치고는 밭에 나가 일합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고는 또 "주여!" 한 마디 외치고는 누워 곤하게 잡니다. 이 사람은 수도사를 찾아가서 깨달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그러느냐고 하면서 기름병을 하나 내 주었습니다. 이 기름병을 들고 다시 농부의 집에 다녀오는데 기름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수도사가 묻습니다. "그대는 이 기름병을 가지고 농부의 집에 다녀오는 동안 주님을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까?" 이 사람은 기름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일에 신경을 쓰느라고 한 번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 보시오. 당신은 그 간단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농부는 그렇게 피곤한 삶 가운데서도 하루에 두 번이나 주님을 찾지 않소? 그대는 그저 기름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 하나만 걱정했지만 농부는 걱정할 일이 얼마나 많소? 날씨 걱정, 씨 뿌린 것이 제대로 자랄까 하는 걱정, 새들이 와서 쪼아먹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 그렇게 걱정할 일이 많은 가운데서도 주님을 두 번이나 찾지 않소?" 이 사람은 크게 깨닫고 산에서 내려 왔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벽에 일어나서 "주여!" 외치고 하루를 시작하면 성령이 동행하고 이와 같이 성령과 동행하는 사이에 경건하고 성실하고 소망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기도가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 우리의 기도를 전폭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도는 때로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완전히 붙드실 때만이 우리의 기도는 온전한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부흥이 오지 않는 이유는 절대 부흥의 조건인 기도가 결여된 때문입니다. 먼저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구하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기도로 세계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 품에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를 전도하게 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교회는 전도합니다. 오늘날 유럽 교회들이 문을 닫는 것은 전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든지 화석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죄악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이끌어냅니다. 그들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생깁니다. 건져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또한 이끌어낼 힘도 주십니다. 성령은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은 활동적인 힘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바람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바람은 동력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바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바람으로 급하고 강했습니다. 성령은 선교 명령을 성취시키는 능력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 하시는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요한 웨슬레가 여섯 살 때 집에 불이 났습니다. 8형제 중 막내인 그는 불이 났을 때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지붕이 불타서 거의 무너져 내리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막내가 어디 있는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불타는 집안에서 막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웨슬레는 2층 난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웃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난간에서 울고 있는 웨슬레를 구출했습니다. 웨슬레의 초상화 밑에는 "이 사람이 바로 불속에서 끄집어낸 아이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가 수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불구덩이에서 구출된 그가 지옥의 불에서 수많은 영혼을 구출했습니다. 지옥의 불꽃에서 구원받은 우리도 전도합시다. 멸망하는 사람을 불에서 이끌어 냅시다.
성령 강림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모든 곳에까지 복음이 전파 될 수 있도록 교회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무장이 되어 있어서 그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강림은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성령강림은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성령강림은 오늘날에도 그 당시와 똑같은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때로 삶에 지치고 힘들어서 낙심이 되십니까?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고생하고 계십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위해 오셨습니다.
질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며 주셨던 성령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이시간 모두가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믿음위에 세워지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계속 기도하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전도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유행따라 살지 마시고 환경따라 살지마시고 모두가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