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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
이번 편은 스샷을 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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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년, 예루살렘 왕국은 파티마 왕조에게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당하면서 멸망을 코앞까지 두었다가 두 이슬람 종파들의 전쟁으로 살아남았다.
아르메니아와 시리아 왕국은 파티마조의 공격을 대비해 방어전을 준비했고 서유럽 국가들은 레반트의 기독교 국가들이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매번 그렇듯 자신만의 길을 갔다.
비잔티움 황제 포르피리오스는 레반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라틴계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이나 박쥐처럼 이리붙었다 저리붙는 아르메니아 왕국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기독교로 귀의한 지 얼마 안된 시리아 왕국과 교류해 그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인 로마 황제의 위명을 알리고 정교회를 전파하고자 했다.
<수십년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안정기에 들어선 네스토리우스교 시리아 왕국>
어느덧 30대가 넘은 메수드는 아르메니아 왕국을 다스리는 삼촌 스테파노스와 여전히 친교를 유지했지만 아르메니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의 이슬람 신민들을 힘으로 누르기 위해선 여전히 가까운 아르메니아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메수드는 외국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당시 메수드는 딸만 셋이었는데, 첫째 딸 아그하바니(혹은 아가바니)는 예루살렘 왕 제스퍼의 동생 보두앵에게, 둘째 딸 라타브리는 조지아의 셋째 왕자 크비리케(Kvirike)와 약혼시켰다.
그리고 비잔티움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제 포르피리오스와 셋째 딸 시란이 약혼했다.
시란은 겨우 6살이었고 포르피리오스는 50대 중반의 나이인지라 여러 풍문이 돌았지만 시리아 왕은 자기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수드는 보기보다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정교회 자체엔 관대하게 대했으나 비잔티움측의 여러 제안에도 불구하고 정교회로 개종은 하지 않았다.
<머리는 좋지 못했지만 성실했던 시리아 왕 메수드>
아르메니아 왕 스테파노스는 동생의 양자인 시리아 왕의 이런 움직임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는데, 안그래도 연약한 아시아의 기독교 왕국들간에 통혼을 통해 뭉쳐여한다고 생각했었던 듯 싶다.
어쩌면 어차피 자신의 후계자 티그라네스와 메수드의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메수드의 편의를 봐줬을 수도 있지만 스테파노스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기 가족들이 죽어가면서 더더욱 입을 다물었다.
파티마 칼리프 알 아디드가 스테파노스의 누나이자 예루살렘 왕비 세타를 지하감옥에 가둬 죽였을 때도, 여동생 델리타가 수녀로 살다가 지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리고 동생 알렉스가 의심스런 죽음을 맞는 것을 보았을 때도 스테파노스의 입은 점점 무거워졌다.
스테파노스의 침묵이 무거워지는 것이 그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진 않았는데, 주로 아들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죽고 혼자 살게 된 스테파노스는 성격이 점점 우울해졌다.>
티그라네스는 20살부터 아르메니아로 돌아오는 34살까지 주로 예루살렘 왕국령의 트리폴리를 다스리며 지냈고 예루살렘 왕국 내에 여러 지인과 친구들을 두고 있었다.
갈릴리 공작의 딸과 결혼하고 구호기사단원들과 자주 사냥을 같이 다녔으며, 자신의 사촌이었던 예루살렘 왕 아모리 2세나 그의 아들 제스퍼와도 친하게 지내던 티그라네스는 자신의 고향 아르메니아 못지 않게 어머니의 고향 예루살렘 왕
국도 소중하게 여겼고 제 3차 십자군이나 칼리프 함무드의 공격에도 여러번 전장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의 맨앞에 서서 싸웠다.
함무드의 파티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소년왕 제스퍼가 왕국령을 거의 상실하자 티그라네스는 기꺼이 도시 트리폴리를 왕에게 바쳤다.
제스퍼는 티그라네스에게 무척 고마워했고 그덕에 트리폴리에 임시 왕궁을 차릴 수 있었다.
동맹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 왕은 없는 살림에 선물을 쥐어보내며 티그라네스를 아르메니아로 돌려보내 스테파노스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스테파노스는 그전에도, 그후에도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티그라네스에겐 무섭게 화를 냈다.
트리폴리의 소유권을 왕에게 넘긴 일이 불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예루살렘 왕국에 헌신했던 티그라네스 예르반드>
스테파노스는 언제나 서유럽과의 교류를 중시했고 이는 신성로마제국을 더이상 후원자로 두지 않은 뒤에도 여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토가 내륙에 있던 아르메니아에게 유일한 항구는 안티옥뿐이었고 스테파노스는 항구 도시를 늘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해안 지역을 얻기 위해선 룸 셀주크가 지배하는 킬리키아나 알렉산드레타 혹은 예루살렘 왕국령에서 얻어야했는데 킬리키아는 그 자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바깥에서 들어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고 안티옥 옆의 알렉산드레타는 룸 셀주크 술탄들이 배치한 정예병들이 견고한 요새 안에서 지키고 있었다.
스테파노스는 대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는 중 몇번 알렉산드레타를 양동으로 노려본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수비군에게 쫓겨나야했다.
또 예루살렘 왕국령은 그 안의 귀족들 사이에서 영지를 얻기가 무척 힘들었고 그렇기에 첫째 부인 줄리애나가 티그라네스에게 남겨준 트리폴리는 장차 티그라네스가 왕이 되면 아르메니아의 소중한 제 2항구가 되어줄 예정이었다.
그리고 비록 예루살렘 왕이 예루살렘을 잃었다지만 티그라네스가 왕에게 트리폴리를 바칠 의무따윈 없었다.
이런 이유로 스테파노스가 티그라네스를 혼내자 티그라네스는 아버지에게 굳이 말싸움을 벌이진 않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침묵하면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스테파노스는 트리폴리를 잃은 것이 무척 안타까웠기 때문에 한동안 부자 사이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둘째 아들 제르쿠스 예르반드도 골칫거리였다.
당시에는 메소포타미아 공작이었던 스테파노스와 전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룩셈부르크 황조 출신의 여인 하드비히 사이에서 태어난 제르쿠스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다.
이미 어머니 없이 자란 티그라네스를 기른 적 있는 스테파노스는 제르쿠스 역시 상냥하고 관대한 방식으로 길렀으나 제르쿠스는 형이랑 다르게 자랐다.
명민한 형과 비교하면 조금 억울했겠지만 평범한 사람 기준에서도 제르쿠스는 단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비호를 받으며 자란 제르쿠스는 오만했지만 적어도 이건 티그라네스에게도 해당되는 단점이었다.
제르쿠스는 거기다 너무 보호받으며 자라다보니 무척 게으르기도 했다.
얘를 망칠까 두려워 스테파노스는 그를 수도원에서 교육시켰지만 제르쿠스는 엄격한 수도원 생활에 실증내며 금방 뛰쳐나왔다.
비록 부자뻘인 24살이나 차이났지만 형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는 제르쿠스를 양육하는 문제는 갈수록 나이들어가는 스테파노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셋째 부인에게서 새 아들 타로닉과 마누엘을 얻은 스테파노스는 동생들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봐 제르쿠스를 억지로 수도원에 다시 집어넣고 수도사들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스테파노스가 보낸 병사들의 감시까지 받자 제르쿠스는 어쩔 수 없이 수도원 생활을 해야했지만 이 과정에서 이상한 피해망상에 걸리면서 더더욱 단점투성이가 되었다.
<늦둥이 아들 제르쿠스는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데는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아들들과의 골치 아픈 문제를 기피하고 싶었던 스테파노스는 그때부터 원정을 다시 자주 나갔다.
1228년과 이듬해는 유난히 여러 사건이 겹치던 해였다.
스테파노스는 1228년엔 투르크인들에겐 에르주름이라고 불리던 카린을 함락시키고자 했다.
이즈음 장남과 화해하고 싶었던 스테파노스는 티그라네스를 원정에 동참시켰다.
직접 제안하긴 뭣하다고 생각한 스테파노스는 티그라네스와 친한 동생 아르타셰스를 통해 티그라네스를 데리고 왔다.
어느때처럼 룸 술탄 샤한샤가 비잔티움군을 상대하는데 잡혀있는 동안 아르메니아군은 거침없이 메소포타미아 군관구의 산맥을 통과해 카린을 공격했다.
하지만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아르타셰스가 큰 부상을 입고 사망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전장을 함께 한 동생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삼촌을 잃은 스테파노스와 티그라네스는 이 과정에서 은근히 서로를 원망했다.
결국 카린이 함락되자 티그라네스는 스스로 이곳을 지키겠다며 카린에 남겠다고 했고 스테파노스도 굳이 아들을 설득하려고 하지않고 카린 백작으로 임명하곤 타론으로 돌아왔다.
티그라네스하곤 오히려 사이가 안좋아진 채 싸늘한 마음으로 동생의 시체와 함께 타론으로 돌아온 스테파노스는 이듬해 지긋지긋한 적이었던 샤한샤가 비잔티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에도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룸 셀주크의 아르메니아 진입로 역할을 했던 에르주름은 카린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마지막 아내 올레나도 스테파노스의 마음을 위로해주진 못했다.
정교도였던 올레나는 남편의 개종 권유는 무시했고 되려 스테파노스에게 자주 개종을 제안했다.
올레나는 약간 사치를 부리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교적이고 가정에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나이든 스테파노스에겐 아내의 부드러운 말이 잔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어린 셋째와 막내 아들들을 기르는 것은 스테파노스와 올레나 사이를 잘 봉합해주었고 올레나도 자식들에겐 정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카린을 정복했지만 스테파노스는 가족 문제와 죽은 동생들이 떠오르는 타론에 있길 싫어했고 1231년엔 수십년 전에 헤르니카스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니시빈과 알 자지라를 침공했다.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면서도 정정하던 모술 장기 왕조의 술탄 포르수크가 1230년 드디어 죽으면서 많은 이들이 기뻐할 수 있었지만 그의 긴 치세 동안 모술 장기 왕조는 눈에 보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이는 그의 손자 카샤르가 술탄이 된 뒤로도 바뀌지 않았다.
카샤르는 할아버지가 구멍 낸 재정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올렸고 이는 이미 포르수크의 거듭된 특별세 때문에 불평하던 비이슬람 교도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니시빈과 알 자지라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스테파노스에게 복종의 서신을 보냈고 스테파노스는 이를 핑계로 모술 장기 왕조를 공격했다.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반파티마 연합에 포르수크의 억지로 한발을 들이고 있던 장기 왕조는 아르메니아군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니시빈과 알 자지라가 금방 스테파노스에게 넘어갔고 투르크인들은 현지인들에게 쫓겨나 모술로 달아났다.
스테파노스는 돌아오는 길에 비라까지 공격했다.
몇해 전 비라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 오랫동안 비라를 다스리던 나지브의 일족이 몰락하고 새 지배자 가문이 들어섰는데 스테파노스는 나지브에게 주었던 독립 유지의 제안이 무효화되었다고 선언하고 비라를 함락시켰다.
<1219년의 아르메니아 왕국>
<1231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 확장>
남과 북으로 영토를 늘린 스테파노스는 대 아르메니아 지역을 왕에게 종군하던 네스토리우스교 귀족들에게 봉분하고 자치적으로 다스리게하여 네스토리우스교 전도에 노력했다.
스테파노스가 뭐에 쫓기는 것처럼 바쁘게 보내는 동안 주위 정세는 계속 안정적이었다.
이미 약해진 기독교도에게서 신경을 끈 함무드는 아바스 칼리프와 셀주크 술탄의 주도로 결성된 수니파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오만에 위치한 또다른 시아파 국가 나브하니 왕조를 적극 지원했고 이슬람 세계의 내전이 아라비아 북부와 남부에서 동시 전개되면서 비교적 외곽 지대였던 기독교 국가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메수드는 1230년, 30대 후반에 드디어 바라던 아들을 낳았는데 특이하게도 아들의 이름을 티그라네스라고 지었다.
영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후에 아르메니아 왕이 될 티그라네스 예르반드나 동맹자 스테파노스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대 아르메니아 지역>
<로리는 동로마 출신의 아르메니아 군사령관 아바스 마키스드로스에게 배정되었지만
임지로 가는 도중 죽으면서 그의 어린 아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아미다의 울루 카미 마을 출신이라 성을 울루 카미로 지은 아니 백작 아불가리브.
그는 행정관료 출신이었다.>
예루살렘 왕 제스퍼는 그 사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지만 기대하던 서유럽의 지원은 오지 않고 있었다.
토르토사를 다스리던, 트리폴리를 가지고 있는 예르반드 가문과 무척 사이가 안좋던 트리폴리 여공작 로라는 1226년에 죽었지만 그녀의 아들 바렐 드 툴루즈가 뒤를 이었다.
아무말도 전해주지 않는 교황에게 초조해하는 제스퍼는 트리폴리 공작 바렐의 반란 모의를 눈치챘지만 힘든 국가 사정을 감안해 용서해주었다.
제스퍼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군은 올 가능성이 희박했다.
아키텐이나 프랑스 등의 나라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신성로마제국에선 내전이 발생했었다.
태만한 오토 4세에 대항해 황제의 누나 브라운슈바이크 여공작 헬가는 반란을 일으켰다.
난감해진 오토 4세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고 로마 교황에게 반역자들을 파문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남색 취향 때문에 오토 4세를 강하게 비난하던 교회는 오토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고 교황 레오 11세는 오히려 반란군의 새 황제가 십자군을 선포해줄 것을 기대했다.
헬가는 자신의 아들 알베리히 폰 올덴부르크를 황제로 즉위시키려고 했고 이를 위해 교황과 물밑으로 접촉했다.
무능한 오토 대신 패기넘치는 젊은이 알베리히는 분명 십자군에 자원한 것이라고 헬가는 교황을 설득했고 예루살렘 수복을 간절히 원했던 레오 11세는 이런 말에 마음이 흔들려 황제와 반란군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오토 4세는 누나와 조카를 비난하며 군대를 소집했지만 상당수의 영주들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남편이 일찍 죽은 헬가는 남편의 영지 브라운슈바이크로는 반란에 부족하다 여겨
상로렌 공작 시몬 3세와 재혼해 동맹을 맺었다.>
<올덴부르크 가문의 영지인 올덴부르크와 브레멘>
이렇게 되자 오토 4세는 올덴부르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북독일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는 벨프 가문에게 접근했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경쟁자로 유명한 하인리히 사자공의 가문인 벨프 가문의 문주는 바로 하인리히 사자공의 딸 엠마 벨프였는데 무능한 오토 4세의 치하에서 영지를 늘려 이 당시 무려 색슨, 바바리아, 클레베 공작위를 겸임하며 신성로마제국 내 최대의 세력가였다.
엠마 벨프 역시 오토와 헬가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는데 무능한 오토 4세가 황제로 있는 게 낫다고 여기고 오토를 지지하려고 했지만 알베리히의 공작으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그사이 알베리히는 오토 4세의 군대를 격파해 오토 4세를 생포했고 그대로 이탈리아로 진군해 교황에게 대관식을 치뤘다.
<강대한 영지를 가졌음에도 벨프 가문은 내전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토는 헬가의 자비로 슈바벤에 유폐되었고 알베리히는 공식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올덴부르크 황조를 성립했다.
알베리히는 오토를 지지했다가 애매한 상황에 빠진 벨프 가문을 초대해 화해를 요청했고 엠마는 다행스럽게 여기며 이를 받아들여 올덴부르크로 갔지만 알베리히의 병사들에게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로서 신성로마제국 내의 경쟁자들을 물리친 알베리히와 헬가 모자는 제국의 지존이 되었다.
교황은 이제 알베리히가 십자군에 나서길 바랬지만 어디까지나 황위에만 관심있던 모자는 십자군 준비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레오 11세는 곧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 6세가 선출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 내내 반복되었던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또 시작되면서 십자군은 흐지부지 되었다.
<새로운 황조를 세우게 된 알베리히 폰 올덴부르크>
결과적으로 레반트에서 당장 큰 전쟁이 일어나기 힘들게되었고 제스퍼는 그나마 남아있는 영토를 다스리며 남시리아의 기독교 세력들과 어떻게든 근근히 연락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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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조금 바빠서;; 다시 스샷을 뺐습니다.
스샷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어느쪽이 읽기 편하신가요?
있는 거면 글 중간 중간에 스샷이 껴있는 거랑 맨앞과 맨뒤에만 스샷 있는 것 중 어느 게 더 보기 좋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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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스샷 넣어서 수정했습니다.
첫댓글 당연히 스샷이죠 ㅎㅎ
역시 그렇겠죠?
당연히 중간중간 스샷이죠 ㅎㅎ
글 읽는데 집중 안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스샷이 있어야 좋죠
스샷 수정을 하는데 단 1초도 쓰지 않겠다.(죠죠풍)
@회색실패작 야레야레다제...
스샷이 있는게 낫죠...아무래도....
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