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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 그리스도 탄생 소식
예수님의 탄생 즉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과 연관된 첫 번째 본문은 누가복음 1:26,27이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네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 소식을 전한 사자는 천사였다.
- 천사가 처녀에게 인사한다. “기뻐하라. 은총을 받은 자여, 주께서 너 와 함께 하시니 너는 여자 중에서 복 받은 자로다.”(눅 1:28,KJV)
- 이 처녀는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 인고 생각했다.”(눅 1:29) 마리아는 대단히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 여기에 마리아의 위로와 행복의 근원이 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멸망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 그렇게 높은 존귀를 누린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잉태는 놀라움이다. 세상이 전에 본 적이 없는, 세상에 존재해 본 적도 없는 아들이다. 여기에 마리아의 기쁨의 근거가 있었다. 특히 예수라는 이름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기에 당신이 바라보아야 할 소망의 대상이 있다.
2. 그리스도의 잉태
(1) 복음의 기쁜 소식
그리스도의 잉태는 천사가 전한 메시지의 결론이었다. 처녀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자마자 곧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즉시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 우리 구주를 잉태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예수님의 잉태와 나심에 대해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의 때다. 어둠이 사라지고 은혜와 구원이 진노와 분노의 자리를 대신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아!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오,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얼마나 영원한 감사를 올려 드려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이여, 찬양받으소서!”
그러나 그리스도의 잉태에는 너무나 많은 경이로움이 들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놀라움과 경이로움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딤전 3:16)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신다는 것이, 친히 지으신 여자에게서 나신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경이롭고 신비스럽지 않은가? 여자의 자궁이 하늘의 하늘도 담을 수 없는 분을 담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잉태에 대해서는 단지 조금만 다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도움 없이 존재한 잉태에 대해 어떻게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그 신비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큰 빛을 그리스도의 잉태를 묘사한 천사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
(2) 그리스도 잉태의 행위자
- 그리스도의 잉태를 가져오는 행위자는 바로 성령이시다.
- 성부와 성자가 성령으로 그 일을 결과로 낳았기 때문에 그 일은 직접적이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의 사역이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이 아니라 형성하게 하셨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동정녀에게서 인간의 본질의 일부분을 취하셔서 그것으로 동정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셨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된 동정녀의 피의 일부분 혹은 씨가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 원죄로 인한 오염의 어떤 흠도, 점도, 얼룩도 없게 된 것이다. 모든 잘못된 주장과 옛 이단들은 내다 버리라!
- 성령의 역사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물질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물질과 영혼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물질은 동정녀의 혈과 육이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오직 그리스도의 실체를 있게 한 행위자가 성령이라 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잉태가 우리의 잉태와 물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의 실체를 이룬 구성물은 어느 한 부분도 동정녀의 영혼에서 끌어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대신 그분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 성령의 그리스도의 인성을 형성하는 방식은 기적 그 자체였다. 우리의 실체와 우리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은 자궁 속에서 단계적으로 연속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만들어진 방식은 전혀 달랐다. 잉태된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형성되었고 즉 영원한 말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연합되었다. 아!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높다.
* 마니교는 그리스도가 진짜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재세례파로 되살아 난 발렌티누스파는 그리스도가 진짜 몸을 갖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만들어진 몸이 단지 이 땅에서 동정녀 속으로 보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3.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질은 그분이 참된 하나님이며 참된 인간이라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분이 인간인 것이다.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사 9:6) 또한 동일하신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참고 / 히 1:8, 요 20:28, 행 20:28, 요일 3:16, 5:20, 딤전 3:16
- 성경에서 끌어낸 반박할 수 없는 이유들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 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속성들이 오직 하나님만의 속성이라는 점(참고 계 1:17, 마 28:20, 마 9:4, 요 3:31, 빌 3:21, 계 1:18),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참고 독생자 요 1:18, 하나님의 형상 고후4:4, 골 1:15), 오직 하나님의 본질에만 합당한 행동들을 그리스도에게 돌렸다는 점(참고 요 13:18, 마 9:4, 요 14:14, 요 5:22, 요 1:4, 마 8:26, 마 9:6, 요 1:12, 요 10:28),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모든 고백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것이라는 점(참고 요 3:18, 고전 16:22, 마 17:5, 행 7:59, 계 5:13, 빌 2:10, 히 1:6)에서 분명히 이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입증하는 충분하고도 강력한 증거다.
(2) 왜 우리 구주가 하나님이어야만 하는가?
-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영혼을 구원할 수도 없고 죄를 만족 시 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시 49:7,15)
- 죄에 대한 속전은 무한한 공로에 의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진노는 오직 무한한 공로 외에는 결코 가라앉힐 수 없다. 따라서 우리 구주의 순종과 고난이 무한한 대가와 가치를 갖기 위해서 는 반드시 그분이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유한한 피조물은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구주가 지니신 신적 능력으로 진노의 짐을 지고 인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분은 반드시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 우리의 구원을 막는 원수가 우리가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강하기 때 문이다. 어떤 피조물이 사탄과 죽음, 지옥, 심판과 대적해 이길 수 있겠는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파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듯이 그분은 또한 참된 인간이시다.
-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가지셨다.(히 10:5, 눅 24:39) 그러나 우리시대 에는 그리스도가 상상의 몸, 공기 같은 몸, 오직 보이기만 하고 실 제 몸이 아닌 환영 속의 몸을 갖고 계셨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성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마 26:28, 눅 23:46) 아리우스파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혼을 가지신 것 이 아니라 단지 살아 있는 육체를 가졌을 뿐이다.’ 이것이 이단이다.
-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에 속한 모든 속성을 갖고 계셨다. 우리의 본성이 지닌 연약함도 가지고 계셨다.(추위, 더위,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고통 같은 것) 오직 죄만 없을 뿐이었다.
(4) 왜 우리 구주가 사람이어야만 하는가?
- 우리 구주가 우리 죄로 인해 고난당하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성만을 지닌 하나님은 하실 수 없는 일이다.
- 우리 구주가 율법에 순종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을 주신 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다.
- 우리 구주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겼던 자와 같은 본질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 또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히 4:15,5:2)
4.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질 사이에 있는 실제적인 차이는 분명하다. 본질적으로 신성은 인성이 될 수 없다. 물론 인성도 신성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질이 서로 변화나 혼합, 섞임, 혼란이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속성에 있어서 신성은 가장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전능하다. 지혜와 공의, 전능함 그 자체다. 그러나 인성은 결코 그렇지 않다. 두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복음서로 가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강보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별이 그분을 비췄고 현자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경배했다.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하늘에 서 성령이 하나님이신 그분에게 내려오셨다.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탄에게 시험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 나님으로서 사탄을 이기고 악한 영들을 내쫓으셨다.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배 안에서 주무셨고 제자들은 그분을 깨웠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바람을 꾸짖고 사납게 일렁이는 풍 랑을 잠잠케 하셨다.
-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질고를 아셨고 슬퍼하셨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슬픔을 당한 자 들을 위로하시고 모든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다.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 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신성과 인성 두 본질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섞이지 않고 그 자체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존재한다. 사실 인성은 신성을 통해 더 극대화된다. 그러나 신성은 인성을 통해 결코 변경되지 않는다. 그렇게 두 본질의 차이는 크고 명확하다.
5. 그리스도의 연합된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질의 연합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 연합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혼란에 빠지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크나 큰 신비요, 비밀이요, 경이로움이다. 태초 이후로 많은 놀라운 일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놀라운 일이 이 경이로움 앞에서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 것이다. 만물이 무에서 창조된 것도 모든 만물이 다시 원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도 결코 이것보다 더 경이롭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신 첫 번째 일과 마지막 일도 모두 이 일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질이 연합된 것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지혜와 선하심, 능력과 영광이다.
(1)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연합 자체
- 어떤 종류의 연합인가에 대해
자연적이고 신비스런 연합, 본질적이고 통합적인 연합처럼 연합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나뭇가지 하나를 다른 나무줄기에 접붙칠 때 그 나뭇가지를 끌어 당겨 접붙임 된 나무의 실체와 연합하게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즉 접붙임을 했을 때는 접붙임 된 나무와 연합해 그 나무에 부속되어 자라게 된다. 바로 이런 종류의 연합이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모습을 가장 비슷하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 안에는 홀로 존재했다면 그 자체로 완전한 별도의 존재였을 인성이 그 자체로 살아가지 못하고 이런 인격적 연합을 통해 신적인 존재와의 연합 속으로 끌어당겨진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성은 신성 속에 존재하며 살아간다.
-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 두 본성의 연합은 말씀으로 된 존재에 인성이 의존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말씀의 존재 혹은 실체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인성과 교류하고 전달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이 연합은 본질적 혹은 존재적 연합이다. 즉 두 본질이 그리스도라는 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연합인 것이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질과 존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무엇이 하나의 개인적 본질을 하나의 존재로 만드는지를 다음과 같이 간략히 생각 해 보아야 한다. 어떤 개체는 같은 종류의 더 큰 개체와 연합할 때 그것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물방울이 더 큰 양의 물과 합쳐지면 물방울은 이제 그 자체로 존재를 갖지도, 작용하지도 않음) 또 어떤 개체는 스스로 다른 것과 연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떤 외적 요인의 도움을 받을 때는 연합할 수가 있다.(땅 속에 심었다면 그 자체로 별개의 나무로 자랐을 나뭇가지가 접붙임 하면 접붙임 한 나무에 속해 그 나무와 하나가 되어 자람) 또 다른 개체는 강제적인 자연적 원인을 통해서도 외부 요소의 도움을 통해서도 다른 피조물의 일부분이 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과의 연합 속에 부속되어 존립할 수도 없다. 인간의 본질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본질이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이런 개체는 그분과의 연합 속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때 모든 존재의 충만함과 모든 피조물의 완전함이 그 자체로 있을 때보다 더 탁월하고 뛰어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것을 받아들인 연합 속에서 전적으로 말씀의 존재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의 존재에 인성이 의존하는 것과 말씀의 존재가 인성과 교류하는 것이 바로 이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연합을 확증하는 성경 본문에 대해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 여기서 인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분명히 그 한 분 안에 두 개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 한 분 그리스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연합된 존재 속에서 신성이 그분 안에 거하신다.
6.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결과
(1) 그리스도에 대한 결과와 혜택
- 모든 죄의 제거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다.”(벧전 2:22)
- 모든 은혜의 도입
- 모든 속성의 전달
(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결과와 혜택
-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연합이 있다. 실제적 연합, 친밀한 연합, 총체적인 연합,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연합이다.
-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이 있다.
7. 그리스도 탄생 사건의 의미
(1) 창조 이래 가장 경이로운 사건
의(義)의 아들이 태를 뚫고 나오는 것, 이것은 세상이 놀랄만한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너무나 놀라워서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 740년 동안 믿는 자들에게 징조를 주실 정도였다.(사 7:14)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신다는 것은 진정 경이로움 그 자체이고 모든 비교를 뛰어넘는 위대한 사건이었다. 그분이 머무신 곳으로 조금 더 가까이 와 보라.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라! 때가 찬,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라.
여기에서 당신은 아담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계시, 다윗의 계승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단지 베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휘장을 걷을 것이다. 와서 진리 자체를 바라보라. 오, 경이로움 중의 경이로움이로다! 나는 그 모든 경이로움을 다음의 말로 표현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요 15:5) 이것은 복된 비유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을 명쾌하게 제시하신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다음과 같이 많은 이유가 있다.
- 모든 나무 가운데 포도나무가 가장 키가 작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는 땅 위에 붙어 있는 것처럼 낮게 자란다.
- 모든 나무 가운데 포도나무가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도나 무는 상수리나무로 지탱해 주고 떠 받쳐 준다.
- 모든 나무 가운데 포도나무가 가장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무껍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바깥의 껍질은 거의 아무 가치도, 명성도 없다.
- 모든 나무 가운데 포도나무가 가장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도나무는 ‘결실한 포도나무’(시 128:3)라고 불린다.
이런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라고 불린다. 그분은 성육신을 통해 가장 낮은 모습을 취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7)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존재한 포도나무 가운데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다. 그 점에서 이 땅 위의 어떤 포도나무도 그분과 견줄 수 없었다.
(2) 포도나무가 심어진 때
포도나무를 심는 방법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심는 것이다. 열매를 더 잘 맺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으로 심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먼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신 예수님은 동정녀의 자궁 속에 심어졌다. 버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도나무에서 나온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바 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며 그분과 동일한 실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러나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그분은 이 땅 위에 심어졌다. 동정녀의 자궁 속에 잉태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 그리스도와 포도나무의 유사성이 있다.
(3) 포도나무가 싹이 튼 때
포도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기 전에 먼저 싹이 터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시85:11)라고 선포해야 했다. 진리가 솟아난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여자에게서 나신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의 예언은 바로 이때에 대한 예언이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 그리스도의 탄생
우리의 포도나무가 싹이 튼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는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는 혹은 그리스도가 여자에게서 나실 것이라는 말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땅은 여자를, 솟아난다는 것은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온 결과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시자마자 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다. 의는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땅에서 막 새롭게 솟아난 진리를 굽어보고 있다. 의는 보고 또 보았다. 분명히 그것은 하늘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성경은 그 광경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고 말한다. 의도 천사들만큼이나 뚫어져라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올 결과를 보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의가 보기를 원하고 만족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모든 의가 되셨다. 그분 안에는 한 점의 죄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순결했고 삶은 거룩했으며 죽음은 죄가 없었다.
(4) 포도나무가 꽃을 피울 때
포도나무의 본질은 달콤한 꽃이 피는 계절에 있다. 우리의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역시 싹이 나고 꽃을 피우셨다. 그분은 가장 달콤한 꽃으로 가득하셨다.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 그분의 겸손, 인내, 무한한 낮아지심 앞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셨다! 오, 놀라운 낮아지심이여! 오, 놀라운 인내여! 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겸손함이여! 이 포도나무의 꽃은 얼마나 놀랍고 새로운가!
(5)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포도나무의 본질은 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다. 오, 그분을 맛볼 때 얼마나 달콤한가!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아 1:3) 맛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을 뜻한다.
9. 그리스도의 탄생 후 일어난 일들
(1) 세상에 나신 지 팔 일이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할례를 받고 예수라고 이름 지어졌다.
할례는 그리스도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를 대신해 스스로 법적으로 불결한 자가 되기를 그분이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로서 그리스도는 몇 방울의 피를 흘리신다. 그것을 통해 나중에 우리의 본성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꺼뜨리기 위해 쏟으실 그분의 피의 강물에 대한 계약금을 주신 것이다. 또한 더욱더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이름이 주어졌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예수’는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 할 이름이며 우리의 믿음과 도움의 근거가 되는 이름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죄와 죄로 인한 영원한 파멸에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의 모습을 가장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과 그 표증인 할례가 결합하게 된다. 피 흘림으로 그분이 우리의 예수,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난 지 사십 일이 되었을 때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눅 2:22,23)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오 놀랍도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어떤 불결함도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먼저 할례를 받으신 뒤 하나님 앞에 바쳐진다. 우리를 위해 친히 법적으로 불결한 분이 되셨다. 율법을 만족시켜 우리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율법 위에 계신 분이 기꺼이 율법 아래로 내려오신 것이다.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유아기 시절도 우리를 거룩하게 바꿔 놓으셨다. 친히 자신을 바침으로써 우리를 더러움에서 즉시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3) 한두 살 무렵 그리스도는 애굽으로 피신하셨다. 그리스도는 친히 고난 받는 것을 택하셨다.
(4)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다섯 살 무렵에, 또 어떤 사람들은 두세 살 무렵에 주의 사자가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마 2:19,20) 그리스도의 유아기에도 지극히 겸손하셨다. 오, 우리가 얼마나 그분을 높여야 하겠는가!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낮아져야 하겠는가!
(5)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셨을 때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 갔다.”(눅 2:42) 어린 나이에 이런 경건한 행동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경건의 훈련을 하도록 이끈다.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눅 2:46) 또래 아이들이 길에서 뛰어노는 동안 예수님은 성전에 앉아 있었다. 예수님은 성전의 외적인 영광을 응시한 것도, 순금으로 된 그릇들을 본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율법사들 중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셨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눅 2:47) 그러나 놀라움이 믿음으로 끝나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불신과 편견을 통해 보는 눈에게는 어떤 빛도 다만 어둠일 뿐이다.
(6) 그 일 후에는 열두 살부터 서른 살까지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성경은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요셉에게서 목수의 길을 배웠다. 여기에서 가장 비천한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있다. 예수님은 목수로서 나무를 베고 자르고 다듬는 일을 하셨다. 여기에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거나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이들,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헛되고 어리석게 죄악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가르침이 있다. 아,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똑똑한가? 예수님이라면 결코 그들처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성경이 깊게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더 이상 다루지 않을 것이다.
(*) 글쓴 이 /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 ‘예수를 바라보라’ 8장 그리스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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