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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751경기 (245골)
1953 - 197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73 - 1974 : 프레스톤 노스 엔드(선수 겸 감독)
클럽 수상 전적:
1968 유러피언컵 우승
1957, 1965, 1967잉글랜드리그 우승
1963 FA컵 우승
대표팀 수상 전적:
106 국제 경기 출전 (49골)
1966 FIFA 월드컵 우승
1968 유럽축구선수권대회 3위
뮌헨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 남았고, FIFA 월드컵™ 우승팀의 일원으로 뛰었으며, 대영 제국의 기사 작위를 받은 바 있고, 무엇보다도 탁월한 재능과 정직함을 겸비한 선수였던 바비 찰튼은 그야말로 진정한 축구 외교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바비 경(Sir Bobby)"이라는 공식적인 애칭으로 불리는 바비 찰튼. 빈틈없으면서도 정정당당한 경기를 펼쳤던 그는 100회 이상 국제경기 출전을 기록한 잉글랜드의 트리오 중 한 명이다. 물론 빌리 라이트가 90회 이상 주장으로서 경기에 출전하며 1950년대에 최초로 국제 경기 100회 출전 기록을 달성했지만, 1966년 홈경기에서 줄리메컵을 품에 안았던 바비 찰튼과 바비 무어가 그 뒤를 바짝 이어 갔다. 라이트와 무어는 하프 백으로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찰튼은 좀더 공격 쪽에 가까운 선수로 인사이드 포워드와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빛을 발했다. 이 세 선수 모두가 결단력과 과감하면서도 도를 벗어나지 않는 태클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찰튼의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그 변화무쌍함일 것이다. 뛰어난 기술을 가졌을 뿐 아니라 공을 배분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찰튼은 경기장 구석구석에서 팀 동료를 찾아내 단 1인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어느 방향으로든지 패스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비교적 작은 키(173 cm)를 보완해 줄 만한 슛 능력을 가져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뛰는 동안 한 경기 당 거의 0.5골씩을 기록했다. 106번의 국제 경기에서 주로 수비를 분담하는 미드필더로 활동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그가 세운 49골의 기록은 아직도 잉글랜드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공격 최전방에 섰던 탁월한 스트라이커인 개리 리네커의 48골 기록보다 1골 많은 기록이다. 마이클 오웬 정도라면 찰튼의 기록을 갱신할 만한 가능성을 조금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오웬이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 부상을 입지 않고 자신의 최고 수준으로 모든 경기를 풀어 나갈 경우에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로버트 찰튼은 1937년 10월 11일 잉글랜드 북동부의 탄광촌인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재능은 이스트 노스엄버랜드 (East Northumberland) 중학교 축구팀에서 처음으로 주목 받았다. 찰튼이 뛰는 경기에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의 감독이자 훗날 기사 작위를 받게 될 매트 버스비가 참관하게 되어, 드디어 1953년 1월 15세 소년 바비 찰튼은 난생 처음으로 축구선수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청소년 팀과 아마추어 상비군 팀을 거친 후 찰튼은 1956년 10월 찰튼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여 소속팀을4-2의 승리로 이끌면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아웃사이드 레프트에서 뛰던 찰튼은 14경기에서 총 10골을 거두며 한 몫을 단단히 해 냈다. 웸블리컵 결승전과 유러피언컵 준결승전에서의 활약은 더욱 멋진 미래의 플레이를 예고하는 듯 했지만, 이때 지극히 비극적인 운명이 닥치고 말았다. 버스비 감독이 이끌어 일명 "버스비 베이브스(Busby Babes)"라고도 불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이 탄 비행기가 1958년 2월 6일 뮌헨에서 충돌 사고를 당해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이다. 이 사고로 여덟 명의 선수가 목숨을 잃었다. 20세의 찰튼은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부상 없이 사고를 모면했지만, 사고로 많은 팀 동료와 벗을 잃었다는 정신적인 충격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버스비 감독은 역경을 딛고 팀을 다시 최선의 상태로 재건했고, 동시에 찰튼을 새로운 팀의 기둥으로 삼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1963년 FA컵 결승에서 승리한 후 1965년과 1967년 잉글랜드 프로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찰튼은 뮌헨 참사 후 꼭 10년이 지난 1968년 웸블리 경기장에서 펼쳐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벤피카를 4-1로 물리치고 잉글랜드 최초로 트로피를 차지는데 기여했고, 이를 통해 국내 축구 최고의 영광의 순간을 맞았다. 이 경기는 첫 번째 골과 네 번째 골을 넣은 찰튼과 버스비 감독, 그리고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 남은 후 여전히 팀에서 뛰고 있던 유일한 나머지 한 명이었던 빌리 포울크스에게 있어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찰튼은 비록 레프트 윙으로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국가대표팀에는 1958년 4월 19일 오른편 중앙(수비형 미드필더)로 처음 데뷔했다. 그는 햄덴 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숙적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데뷔 때처럼 골을 기록했고 잉글랜드는 4-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찰튼은 "공이 네트에 세차게 부딪치는 소리를 아직도 들을 수 있다. 그 후 들리는 것은 침묵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날 찰튼이 보여준 플레이는 1958 스웨덴 FIFA 월드컵 출전 선수로 선발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잉글랜드 팀은 1라운드에서 소련과의 플레이오프 이후 탈락하고 말았다. 찰튼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월터 윈터보텀 감독은 그가 여전히 뮌헨에서의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대표팀으로 선발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1962년 칠레에서 다음 FIFA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찰튼은 대표팀에서 왼쪽 포지션을 굳게 지키고 있었고 윈터보텀 감독은 그를 기용하는 데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거둔 찰튼의 한 골은 잉글랜드 팀이 8강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결국 이 대회 우승 팀인 브라질에 패해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1966년은 모든 잉글랜드인의 기억속에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는 해일 뿐만 아니라 찰튼이 최고의 재능을 선보였던 해이다. 찰튼은 잉글랜드 수비의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된 형 재키와 함께 홈경기에서 선전한 끝에 조국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잉글랜드 팀은1966년 7월 30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직접 줄리메 트로피를 받았다.
사실 1라운드 첫 경기에서는 잉글랜드가 우루과이와 0-0으로 개운치 못한 무승부를 거두어 시작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경기 흐름에 물꼬를 터줄 계기가 필요했고 이를 제공한 것이 바로 찰튼이었다. 멕시코를 상대로 한 1라운드 두 번째 경기에서 바비 찰튼은 전반전 종료 약 10분 전 느슨하게 흐르는 공을 하프 라인에서 잡아낸 다음 골을 터뜨렸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나는 공을 꽤 깊숙이 잡아 냈고 슛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상대 팀이 내가 계속 들어가도록 놔둘 것이라고는 정말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냥 골을 넣었다."고 말했다. 점점 빨라진 찰튼의 질주는 골문 위쪽 코너로 파고든 네트를 뚫을 듯한 골로 마무리되었고 잉글랜드는 드디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바비가 제 실력을 완전히 발휘한 것은 포르투갈과의 준결승전에서였다. 그는 빠른 질주로 포르투갈 수비를 꼼짝 못하게 하면서 팀 동료에게 공을 패스하여 골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고 골 기회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는 직접 슛을 날렸다. 잉글랜드는 전후반 각각 한 골씩, 모두 두 골을 기록하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바비는 이 두 골을 모두 기록하여 에우제비오가 한 골을 넣은 포르투갈에 앞섰다.
결승전에서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잉글랜드의 위험 인물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찰튼만큼 재능이 많았던 프란츠 베켄바우어에게 찰튼 전담 수비를 맡겼다. 찰튼이 공격하면 베켄바우어가 수비를 하고 베켄바우어가 공격을 하면 찰튼이 이를 막았다. 그 결과 찰튼이나 베켄바우어 모두 골을 넣지 못했고 양팀은 90분 동안의 접전 끝에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만큼 이 경기는 두 전설적인 미드필더간의 역사적인 대결이었던 것이다. 최종 스코어 4-2는 결국 이 대결에서 찰튼이 승리했음을 보여 준다. 베켄바우어는 "1966년 경기에서 단지 바비 찰튼이 나보다 조금 더 뛰어났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서독에 승리했다"고 지적했다.
4년 후 잉글랜드가 전 대회 우승국으로서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을 때 32세의 찰튼은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찰튼이 대표팀으로 뛰기 시작하던 무렵의 2-3-5 포메이션으로부터 4-2-4를 거쳐 4-3-3 포메이션으로 변화해 온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안쪽 오른편 포지션으로서 그의 역할은 더욱 수비적이지만 여전히 필수적인 것었다. 잉글랜드는 1라운드를 무난하게 통과한 뒤 8강전에서 서독을 만나 1966년 결승전의 역사적인 재경기를 치르는 셈이 되었다. 경기 시간 종료를 20분 남겨 두고 잉글랜드 팀이 2-1로 리드하고 있는 가운데 잉글랜드의 알프 람세이 감독(훗날 알프 경)은 준결승전을 위해 찰튼을 쉬게 하려고 다른 선수로 교체했다. 그러나 독일의 우베 젤러가 동점골을 넣어 경기가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연장전에서 게르트 뮐러가 한 골을 추가하여 독일에 승리를 안겨 줌으로써 1966년 패배의 한을 풀었다.
이 경기는 찰튼이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뛴 마지막 경기가 되었고 그는 빌리 라이트의 106회 출전 기록을 따라잡은 경기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후 자신의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두 시즌을 더 활동하고 또 다른 북서부 클럽인 프레스톤 노스 엔드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잠시 활약한 후 1974년 선수 생활을 모두 접었다. 그러나 그는 경기장 밖에서 가슴을 졸여야 하는 감독 생활을 택하기 보다는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사업에 성공하여 젊은 선수들을 위한 축구 학교를 여럿 설립하기도 했다.
1984년 찰튼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중역이 되었으며 FIFA 축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후 그는 맨체스터에서,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전세계 축구를 위해 성심껏 일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진정한 축구 외교관이자 한 진실한 인간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감독이었던 매트 버스비 경은 그에 대해 "그보다 더 인기 있는 축구 선수는 없었다. 그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인간이자 선수였다."고 말했다.
이제 왕년 최고의 스타 시리즈를 접게 ?營윱求? ;;
기말고사가 이제30일 밖에 안남아서요,,
시험 끝나고 새로운 시리즈로 찾아 뵙겠습니다,
첫댓글 허거덩 기말고사를 30일이나 준비를하다니... 난 3일했던가...?
30일동안의 준비 -ㅁ-;;;;;;;;
30일부터 해야되는거 아닌가?-_-;;
앗~나는 일주일전부터준비하는데...;;;;;;;;;
선수겸감독이라;
베컴이 바비찰튼배 축구 경연대회에서 우승했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