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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터불고 cc클럽하우스에서 바라본 팔공산 전경, 오른 쪽 뽀족한 봉우리가 초례산이다.
문제의 제기
천 년 전 우리 역사가 뒤바뀔만했던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팔공산 전투를 살펴봄에 있어 먼저 미리사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왜냐하면 미리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세운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또는 전주 모악산 귀신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계룡산 갑사, 서산 보원사, 삼각산 청담사, 등과 함께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한 절이자, 고려 개국 공신으로 팔공산 전투의 희생자인 좌상 김락이 전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미리사는 통일신라시대 이 땅에 화엄사상을 펼치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나, 나라 잃은 슬픔에 잠긴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을 아우르기 위해 세워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부석사나 화엄사 등은 큰 규모의 가람으로 남아 오늘 날에도 대중들에게 탐(貪), 진(瞋), 치(癡)를 깨우치게 하고 있는데, 팔공산 미리사(美理寺)는 문헌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 그 위치마저 안개 속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적이 오늘날까지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향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잘 못이기도 하지만 당국의 무책임도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10년도 더 지난 1993년 ‘팔공산을 아십니까.’라는 책을 내면서 필자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잘 못을 범한 일이 있어 늘 죄책감에 시달려 왔었다.
때마침 동구지역혁신협의회가 발족되어 팔공산 개발에 대한 자문역할을 할 기회가 되면서 회원들은 팔공산의 정체성을 ‘불교문화’와 ‘왕건설화’에서 찾아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오래 동안 숙제처럼 여겨왔던 이 문제를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 짐을 덜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문헌조사와 현장답사를 새로 하면서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팔공산 전투가 지금까지 잘 못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공교롭게도 정사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이다. 특히 고려사의 태조 10년(927) 9월조를 보면.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신라에)사절을 시켜 조문과 제사를 치르게 하고, 친히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桐藪)에서 훤(견훤)을 맞아 큰 싸움을 진행하였는데 형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훤(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고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희생되고 각 부대들은 패배를 당하였으며 왕은 겨우 몸만 피하였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동수를 현 지묘동일대로 비정(比定)하는데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통일되고 있다.
(동수를 동화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다수가 지묘로 보며, 신숭겸 장군의 후손 신흠이 쓴 충열비문(1607)에도 ‘이 숲을 지나면 아직도 늠름하여’라는 표현으로 보아 오동나무 숲이 있었던 곳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제는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희생(犧牲)되고’ 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를 자구(字句) 그대로 해석하면 두 장수는 동수 즉 오늘날 지묘동에서 순절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고려사>의 그 뒤의 기록이다.
927년 9월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패퇴시킨 견훤은 여세를 몰아 10월에는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11월에는 벽진군(성주 벽진)일대도 노략질하고, 12월에는 한 통의 편지를 왕건에게 보내는데 내용 일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구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에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제1호)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곳임은 틀림없으나 미리사가 있던 곳은 아니다.
“당신의 군대는 나의 말대가리를 보거나 소털을 뽑기도 전에 초겨울에는 벌써 고려의 도두(都頭) 색상(索相)이 성산 진 아래서 패배하였고 같은 달에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버렸다. 우리가 죽이고 포획한 것도 많았으며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강약의 역량이 이와 같으며 승세의 형편은 알만한 일이다. 기도하는 바는 나의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며 나의 말에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는데 있다.”
고 하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가장 의미 있는 대목은 ‘미리사 앞에서 김락의 해골을 버렸다. 즉 미리사 앞에서 김락을 죽였다.’는 표현이다. 이 내용은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표현 그대로 미리사 앞에서는 김락만 죽였을 경우이다. 즉 신숭겸과 김락을 함께 죽였다면 두 분의 이름을 다 기명(記名)할 것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김락만 명기(銘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두 장수가 함께 순절했지만 <고려사>를 찬술한 사관(史官)이 실수하여 한 분만 기명한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내용을 오기(誤記)한 사관의 잘못이 된다. 그러나 역사서 편찬에는 한 명의 사관만 참여하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실수를 범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첫 번째 경우 즉 미리사 앞에서는 김락만 전사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관의 실수가 아니라, 김락 혼자만 미리사 앞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김락이 순절한 미리사 위치가 어디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팔공산전투의 전개과정
3번째 전투가 치러지고 김락이 전사한 곳으로 추정되는 시량리, 오른 쪽 멀리보이는 산이 초례산 줄기이다.
산 이름 초례는 왕건이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구도후부와 영천군의 고적 조, 하양현의 산천 조를 보면 팔공산 전투의 범위는 동구 지묘동이나 파군재 일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은해사 입구(태조지)에서부터 지묘(동수), 시량리(미리사 앞), 초례산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태조 왕건 군사와 견훤의 군사가 처음으로 조우(遭遇)한 곳은 지금까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북구 무태(無怠)와 달리 은해사 입구의 한 산봉우리 태조지(太祖旨)이다. 이곳은 견훤이 경주를 유린하고 영천을 거쳐 회군하는 길목이자, 개성에서 조령, 문경, 용궁, 의흥, 신령, 영천, 경주를 잇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태조 왕건은 이 길을 통해 정예기병 5천명을 이끌고 왔지만 먼 길을 오느라고 지쳐 있는데 비해, 신라를 유린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사기가 충천한 견훤군에게 처음부터 밀렸던 것이다.
따라서 태조는 능성재와 백안을 거쳐 무태까지 후퇴와 후퇴를 거듭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첫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견훤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나팔을 불며(나팔고개) 뒤따르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왕건은 무태에서 대오를 정비한 다음 반격을 시도하여 (신숭겸과 김락이 이끌고 온 지원군의 합류로 병력이 증강되었다고도 함)해 살내(箭灘,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는 곳)를 사이에 두고 양측이 쏜 화살이 내(川)를 이룰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오히려 대패(왕산, 파군재)했음은 물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신숭겸장군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어가(御駕)를 타고 견훤군을 유인하는 사이에 왕건은 탈출을 시도하여 혼자 한 바위(봉무동 독좌암)에 앉았다가 도동 측백나무 숲 앞을 지나 평광동으로 잠입하여 초례산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산에 올라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천지신명에게 제사(醮禮, 산 이름 초례는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초례는 전통적으로 치르는 혼례식을 뜻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왕건이 이 산에서 29번째 부인과 혼례를 치러지어진 이름이라하여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를 올리고 마지막 일전을 각오하고 다시 견훤을 치러 미리사 앞까지 진격했으나 아쉽게도 여기에서도 밀려 마침내 좌상 김락 마저 잃는 또 한 번의 비운을 맞는다.
그 후의 행적은 금호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가 앞산일대로 숨어들어 은적사, 안일사, 왕굴, 임휴사 등에서 간간히 휴식을 취하다가 개경으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공신의 순절 장소
이상으로 팔공산 전투의 전개상황은 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영천군지> <하양읍지> 등을 통해 엮어 본 것이다.
팔공산 전투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대장 신숭겸은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파군재를 포함한 지묘동일대에서 순절(殉節)(대구시 기념물 제1호 신숭겸 장군 유적지 내 순절단 참조)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좌상 김락은 세 번째 전투가 치러진 평광동 시량리에 소재한 미리사 앞에서 순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1832년(순조 32) 세워진 신숭겸 장군의 영각유허비(影閣遺墟碑)이다. 이 비(碑)는 영정을 모셨던 대비사(大悲寺)가 아전 김철득이라는 사람의 간계(奸計)로 불타 없어지자 바로 그 앞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대비사는 평산 신 씨 문중 자료집과 인근 주민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올 뿐, 읍지 등 어느 곳에서도 기록이 나타나지 되지 않는다.
신숭겸장군 영정을 모셨던 대비사 앞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호하는 비각. 지묘동에서 가까운 동화사나 파계사를 두고 왜 이 오지에 있는 대비사에 영정을 모셨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따라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대비사가 본래 미리사였는데 어떤 연유로 이름이 바뀌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지묘사가 폐사되어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대비사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절이 팔공산 전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옮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 공신이었던 만큼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지묘사가 있던 곳에서 가까운 동화사나 파계사에도 충분히 모실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인데 굳이 오지 시량리에 있는 대비사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평소부터 미리사가 시량리에 있었던 절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는 이번 재조사를 하는 과정에 두 가지 결정적인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하나는 1950년대 백안초등학교 교장을 엮임 했던 문보근(文輔根)님이 공산지역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쓴 <우리고장>이라는 책과 두 번째는 2004에 간행된 <평산신씨역사유적집>이었다. 이 두 책에서 미리사의 위치가 시량리라는 나의 주장을 보충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문 교장이 쓴 <우리고장>의 제13장 제11절 “실안이(지금의 시량리) 영각 유허비” 편을 보면
‘평광동 실안이에 신 장절공 영각 유허비가 있다. 본데 장절공의 명복을 빌기 위하야 대비사(大悲寺)를 지었던 곳인데 뒤에 영각으로 사용하다가 임란에 소실되고 지금부터 20년 전에 유허비각을 재건한 것이다. 동명 음(音을 말하는 것 같음) 시랑이(時良), 설어서(大悲)라 하나 실안이(谷內)가 설어니(大悲)로 화하야 신랑이가 되지 아니하였냐고 생각한다.’ 라고 해서 오늘 날 시량리를 대비동이라고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두 번째 <평산신씨역사유적집>의 제19장 제3절 “동수전 역사” 제3 독좌암(獨坐岩) 편을 보면
‘---왕건은 이곳에서 잠시 후 30 리 떨어진 대구 동구 현 평광동 실왕리(失王里) 모영재로 피신하고 있을 때 신숭겸 장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하여 대비동(大悲洞)이라 하며 왕건은 다시 해안(현 방촌동)을 지나 반야월 안심을 거처 피신하였다고 전한다.’ 라는 이야기이다.’
위 글에서 일부 내용은 해석하기 다소 어려운 점이 있으나 전자는 시랑리의 본래 이름 ‘실안이(谷內)가 설어서(大悲洞)’가 되었다고 했으며, 후자는 왕건이 신숭겸 장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 슬퍼서 이곳을 대비동(大悲洞)이라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시 영각유허비문을 쓴 사람은 대비사라는 절 이름을 구체적으로 표현 한 것이 아니라 대비동에 있었던 절이라는 뜻으로 썼다고 보여 진다.
필자의 이러한 추측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처음부터 이 절에 모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을 새로 지어 두 분의 충신을 모시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전쟁초기인 만큼 기존의 미리사를 활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좌상 김락은 평광동 시량리에 있던 미리사 앞에서 순절했으며 신숭겸 장군의 영각유허비문을 쓴 사람은 절 이름 대비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하고 대비동에 있는 절이라는 의미에서 대비사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신숭겸장군의 전사지가 지묘동이라는 사실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고려 장절(신숭겸장군의 시호)신공 순절지지(殉節之地)라는 비가 현존하고, 지묘동이라는 마을 이름 역시 훗날 왕건을 대신해 돌아가신 신숭겸장군을 기리기 위해 태조가 지어준 절 지묘사에서 비롯되었으며, 1670년(현종 13) 사액된 표충사 또한 이 절터 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지묘사와 미리사를 같은 절이라고 한 현재 유적지 입구에 놓인 안내판이나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주는 홍보물의 ‘문화재 안내’편도 고처 저야 할 내용들이다. 다시 말해서 미리사는 고려 초에 지어진 절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에 의해 지어진 절이다.
팔공산 전투를 보다 깊고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나 <고려사>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읍지><달구벌> <평산신씨역사유적집> <팔공산자락>등의 신구서적은 물론 인근 군·현의 읍지(邑誌), 전설(傳說) 등을 두루 참고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해 오류가 거듭되는 것 같다.
지난 해 12월 27일 동구지역혁신협의회 업무보고회에 참석했던 이재만 동구청장이 2009년 동구의 역점사업 하나로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주제로 이벤트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해서 그 신선한 발상에 놀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이장가는 1120년(예종 15)왕이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팔관회를 주관할 때 짚으로 만든 인형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춤을 추자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들은 팔공산전투에서 태조를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 장군과 김락의 가상(假像)으로, 태조가 팔관회를 열 때 공신들의 앉은 자리에 두 장수가 없는 것을 애석히 여겨 가상을 만들어 음식과 술을 대접했더니 술잔이 마르고 일어나서 절을 함이 생시와 같아 그 후 팔관회를 열 때 마다 참석시킨 전례(前例)라고 하였더니 가상히 여긴 예종이 직접 지은 가사다.
“임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까지 미치심이여/ 그대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음이여/ 오오 돌아 보건데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 빛 나리소이다.” 라는 노래다. 이런 점에서 동구의 지묘동과, 평광동 일대는 이 노래가 탄생했던 배경의 주 무대가 된다.
매우 뜻밖이었었으나 훌륭한 제안이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이 시가(詩歌)는 향가로부터 고려가요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문학작품으로 우리 국문학사(國文學史)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번 현장 답사를 통해 팔공산 전투의 실상과 미리사의 위치를 재조명해보면서 도이장가의 무대까지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태조 왕건이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찾아 춘천으로 옮겨 장사지내고
그 자리에 쌓은 순절단, 표충단이라고도 한다.
맺는 말
비록 역사를 전공한 학자는 아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공산전투의 실상과 미리사 위치를 바로잡아 보려고 많은 노력했다. 그 결과
첫째, 태조 왕건과 견훤이 처음 전투를 치른 곳은 북구 무태가 아니라, 영천의 은해사 입구 태조지(太祖旨)라는 봉우리로.
둘째, 팔공산 전투는 지묘동 한 곳에서만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은해사 입구-지묘동-시량리 3곳이 주된 전쟁터이자 글 순서와 같이 전개되었고.
셋째, 미리사는 대장 신숭겸을 위해 지묘동에 지은 지묘사(智妙寺)와 달리 의상대사가 화엄시찰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절로 위치는 시량리 대비사 터이며,
넷째, 대장 신숭겸은 지묘에서 좌상 김락은 시량리에서 순절했고. 다섯째,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처음부터 미리사에 모셨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팔공산 전투는 운주(지금의 홍성)전투, 병산(지금의 안동)전투와 함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있었던 3대전투의 하나였다고 한다. 팔공산 전투가 두 곳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패했던 것과 달리, 태조 왕건이 모두 승리했다는 점이다.
팔공산 전투가 패한 원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당시 큰 가람이었던 동화사가 백제영토의 김제출신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法相宗)계열의 절이기 때문에 견훤 편에 가담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측일 뿐 직접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또 하나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은 태조 왕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곳곳의 지명(地名)들이다. 오래된 일이고 정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며, 단지 읍지나 구전 등에 의해 전해오는 이야기인 만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또한 이 각박한 세상에 그나마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 시민들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면 그대로 인정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던 만큼 사실과 가장 가깝게 접근해 볼 필요성은 대두된다.
<평산신씨역사유적집 2004, 대영서원>에 등장하는 애수(礙藪), 즉 견훤군으로부터 위급한 태조를 숨겼다는 곳은 같은 책에서도 부인사(81쪽)라 했다가, 덤불(91쪽)이라 했다가, 미리사(97쪽, 365쪽)라고 하는 등 페이지마다 서로 달라 특정지역으로 확정하기 어렵고,
염불암 뒤의 일인석(一人石)의 경우에도 비록 <대구읍지>에서 왕건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전투가 전개된 상황으로 볼 때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묘동과 파군재 일대에서 패한 왕건이 역방향인 깊숙한 그곳까지 탈출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고,
양 측이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살내(箭灘) 역시 <달구벌 1977년 대구시>에서는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하나 <대구읍지>를 보면 북쪽 20리라고 하여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는 곳이 되며, 연경(硏經)마을 역시 태조가 이곳을 지나갈 때 글 읽는 소리가 낭랑(朗朗)해서 부친 이름이라고 하나, 조선조에 지은 연경서원(硏經書院)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해안(解顔) 역시 포위망을 벗어나 긴장했던 얼굴이 풀려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이곳에 설치되었던 현(縣)의 이름이며, 도망치던 왕건에게 주먹밥을 준 나무꾼이 돌아와 보니 없어져 왕을 잃은 곳이라 하여 실왕리라 했다는 시량리도 골짜기에 있는 마을 실안리(谷內里)에서 비롯되었으며,
사지(死地)를 벗어나 마음을 놓았다는 안심(安心)도 장인들의 거주지였던 소(所) 즉 안심소(安心所)가 있었던 곳이고, 밤에 반달이 비춰 반야월(半夜月)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어느 왕이 민정시찰을 하기 위해 잠행(潛行)했을 때 반달이 비춰 불러졌다는 다른 설도 있어 규명이 더 필요한 이름들이다.
팔공산 전투는 개전 초부터 태조 왕건이 밀렸기 때문에 전 구간 구간이 모두 도주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도주로(逃走路)라고 하는 말을 대신해 탈출로(脫出路)로 부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왕건이 위기로부터 벗어나 후삼국을 통일하였듯이 국내외적으로 모두가 어려운 이 위기로부터 벗어나 잘 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금호강을 건너 몸을 숨긴 앞산 쪽을 제외하고 현재 답사가 가능하고 비교적 흔적이 뚜렷한 동구 쪽을 간추려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태-나팔고개-살내-지묘(신숭겸 장군 유적지)-파군재-독좌암-(도동)-신숭겸장군영각유허비(미리사지)-초례산-------(앞산)
도이장가(悼二將歌)의 두 주인공인 신숭겸과 김락은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들이다. 그 분들의 현명한 대처가 없었다면 그 뒤의 역사는 견훤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팔공산은 나라를 지켜낸 산이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2008년 10월 전남 나주시에서 그곳 출신이자 태조 왕건의 두 번째 왕비인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창작해 공연했으며 그 중에서 제4장은 도이장가를 삽입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된 충신을 기리는 일이 어느 지역에서 했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만 신선하다고 생각했던 동구청의 계획이 한발 늦은 것 같아 아쉬움을 자아낸다.
첫댓글 조회장 고향을사랑하는 마음과 좋은정보 잘보았네 새해에도 대농오사를 위해 수고해주고 가정과 친구의 건강이함께 하기를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