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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역했는지를 추궁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자 군대는 도발당하지 않았는데도 무조건 사격을 개시하여,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 포 등으로 민간인들을 몰살했다. 부상만 입은 것으로 판명된 주민들은 소총 사격으로 확인 사살했다. 군대가 살해한 총인원은 젖먹이 3명, 초등학생 9명, 남자 43명, 여자 43명이었다.-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학살 사건에 대한 전문 내용 중 일부.
주한 미군 무관이 작성한 문서인데 사람들 그냥 모아두고 바주카로 쏴서 날려버리고, 수류탄 던져서 확인사살하고, 마지막으로 아직 숨 안끊어졌거나 달아난 사람들 총으로 쏴죽인 것 같음.
1951년 6월 이전의 한국군은 팔 수록 카오스 그 자체임. 심지어 해당 마을 주민들은 문경 경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던 부락이었고, 그 때문에 지역 경찰들이 국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비밀리에 조사해서 국회의원 8명에게 정보를 넘겼음.
그래서 그나마 이 사건은 주한미군 미 육군 무관이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에 보고하면서 일이 커졌고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임.
이로 인하여 김백일 대령에서 유재흥 준장으로 당시 지리산 전투사령관으로 교체된 것이었음.
안동에서 국방장관 신성모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서는 표면상 공비 토벌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경찰과 국회의원, 심지어 미군 당국까지 개입하자 신성모 국방장관이 안동까지 내려와서 수습에 나선 것임.
그 결과 공비토벌 작전의 총책임자인 김백일 대령이 문책성 인사로 3사단장으로 발령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대기 상태로 두었음. 그리고 유재흥 준장을 보내서 사태를 수습하게 했는데, 유재흥이 등장한 것은 온건책+대게릴라 작전의 전문가를 투입한 것으로 볼 수 있음.
대령급 지휘관에서 장성급 지휘관으로 토벌사령부가 승격되었고, 실제로 유재흥은 밑도 끝도 없이 행패를 부리며 학살하고 다니던 부대들을 수습해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나섰음. 그 결과 5월 30일 이전까지, 남한 내의 게릴라가 3,000여 명에서 500명 미만까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음.
결국 이러한 학살 사건들은 군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했지만, 지역 경찰들조차 기겁할 정도로 잔혹했다는 성격에 있음. 지역 경찰 역시 잔혹하기로 소문은 나있었음. 1948년 남한 사회를 강타한 준반란 사건의 원인으로 미군정이 잔혹한 한국 경찰의 포악한 행동과 무능력함을 지적할 정도였기 때문임.
그런데 그런 경찰이 직접 비밀리에 학살 사건을 조사해서 국회의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정도면,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임.
한 편, 여기서 유재흥이 지시한 작전은 50년 말 정일권 장군이 게릴라 토벌을 위해 지시한 작전과 상당히 유사한데, 산 아래 마을을 포위하고 죽치고 앉아있는게 아니라, 화력을 갖춘 경보병대를 대규모로 투입해서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산을 직접 토벌하는 방식으로 바꿈. 기존의 토벌대는 마을에만 눌러앉아서 산에 있는 게릴라를 토벌하지 않고 그냥 민폐만 끼치고 다니고 있었음.
이러한 대게릴라 작전의 변화는 실질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줄이고, 게릴라들을 궤멸시키는데 효과를 보였음. 근데 왜 이전까지 안했느냐면...여러가지 이유가 있긴한데 가장 큰 원인은 이것임. 군대랑 경찰에 대한 보급이나 월급이 연체되면서 마을에 죽치고 앉아서 밥얻어먹고 약탈하기 바쁜지라...
진짜 이 때 기록들을 보면 토악질이 나옴.
p.s. 자료를 제공해주신 늑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출처] 49년 12월 문경 석달부락 학살과 대게릴라전 방식의 교체|작성자 오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