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예가 있었다는 것과는 이거때문에 보편적인 것은 틀리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저도 잘 모르는 분야가 있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몇자 오류가 있어서 적어봅니다.(사실은 일본성에 환상이라는 말때문에 울컥해서 적습니다만 ^^)
규모적인 면에서 일본 성은 조선과 중국의 그것과 비교가 안돼고 읍성
보호 개념도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생활개념이 아니죠. 애도나 교또가은 개념에서 이러한 개념이 들어지가 나머지는 거의 진지 방어개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중국의 성곽은 그야말로 생활 개념이죠.
따라서 성안에 모든 거주가 존재하고 그 거주지 안에서 생활한다는 개념이 강하죠.
이러한 중국 성의 개념은 산악이 없는 평지성이라는 개념때문에 드러난 것입니다. 즉 방어할 거나 기댈 곳이 없기 때문에 방어치를 만들게 되고 그안에 모든 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죠.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짚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곽전투를 단순히 그냥 숫적인 개념이나 전사적인 개념으로 보시지 말고 실증적인 개념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즉 성곽전투의 개념은 바로 댐개념과 수로의 개념으로 보시는게 가장 좋습니다.
즉
하나 물이 넘쳐나서 흘러가는 경우는 즉 성벽을 타고 병력이 넘어가여 성벽을 장악하는 경우
둘 댐이 뚤려서 물이 물밀듯이 흘려들어와서 호수를 이루는 경우
셋 댐이 뚤렸는데 물이 흘러들어오는데 지정된 수로를 따라 들어오다가 힘이 약해지는 경우
넷 땜이 둘려 물이 흘러들어오는데 2차적인 고정 댐이 존재하여 추가적인 붕괴를 막는 경우
다섯 탬이 붕괴하며 흘러들어오는데 2차적으로 임시 벽을 쌓아서 붕괴를 막는 경우
여섯 댐이 붕괴하기 직전에 물길을 다른데 돌려 댐붕괴를 막는 경우
일곱 물길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여 특별히 보강된 댐중요부위로 저지하는 방법
이러한 개념을 성곽개념을 보셨으면 합니다.
치와 옹의 개념이 내곽과 외곽의 개념으로
또한 전사개념으로 보셔도 좋지만 이러한 개념으로 보시는게 전술적이나 건설적인 개념으로 효과적입니다.
성이라는 모델에 물이 흘러들어왔을때 어느정도 규모의 물이 흘러야지만 제대로 막을까 그리고 어떤식으로 1차 물의 격함을 막고 2차에 힘을 상쇄시켜서 성나머지를 보존할 것인가 등으로 생각하고 일반 병을 개념으로 생각해야지
성도 규모가 있어서 감당할 능력이 안돼는 규모의 병들이 대거온다면 버터내지 못하는게 당연한 건데 이런 예 때문에 무조건 적으로 틀렸다고 하는게 좀 오류가 있지 않을까요.
또한 중국식 성과 조선식 성과 일본식 성은 각각의 특징들을 물흐르는 개념으로
비교해보면 중국식은 바로 튼튼한 댐으로 범람자체는 막는 개념이고
일본식은 붕괴되어 물이 들어오나 그 물길을 돌려서 힘을 상쇄시키는 수로개념
조선식은 험한지형을 이용한 물의 힘을 상쇄시키는 산성개념과 물을 한곳만 오도록 하여서 그곳만 강화해서 막는 부분 땜개념의 읍성개념이죠.
그리고 원호군 개념은 바로 댐이 붕괴직전에 물길을 돌리는 개념이죠.
이런 기본적인 개념으로 놓고 삼국의 성을 비교해봐야 하는데
이렇다 라고 하는 것도 어불이죠.
그리고 조선성곽에 대해서 잘못 곡해하시는 듯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조선의 성곽의 특징은 일본의 방어진지 개념과 중국의 성곽개념을 혼용한 케이스가 많죠.
특히 조선시대에 세운 주요성곽들이 그러한 개념이 강합니다. 즉 성곽안에 주거 생활지가 존재하는 개념인데 보통 관청과 포청이 같이 존재하죠.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중국과 비교가 안돼는 규모입니다. 성벽이 겨우 1.5~3M사이이죠.
또한 조선성곽의 기준은 배산임수개념에 철저하게 따르는 것인데 산성의 개념이 그대로 평지성에서도 적용되는 개념인데 이것은 삼국시대에서 내려오는 전통일듯합니다.
평양성,사비성, 공주성, 몽촌토성 같이 대규모 거주지가 존재했던 곳에서 이러한 배산임수로 해서 공격력이 한곳에만 집중시켜서 방어가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지어진 전통이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투영됨을 알수가 있죠.
이러한 형태의 대표적인게 진주성과 평양성 입니다.
대표적인 배산임수의 특징을 가진 성곽들이죠.
그런데 아시다싶이 왜란 시대때 진주성은 1차는 지켜졌고 2차는 함락당했고 평양성은 농성조차도 못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평양성에서 농성했다는 소리는 왜군이 대동강을 건너지 못해서 공격못해서 버틴것이고 왜군이 대동강 상류를 통해서 평양성을 공격했을때 그대로 성이 무너졌죠)
이러한 성의 모델이 바로 부산성 충주성입니다. 그대로 무너져 버렸죠.
그리고 조선에 성은 산성이라면 정확히 산성이라고 했지 읍성을 산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삼국시대에 읍성과 산성 혼용방식과 다릅니다. 산성규모라도 엄청나가 요지역활을 했던 삼국시대와 대별대는 개념이죠.
따라서 왜란때 주요 왜군이 점령한 성곽은 읍성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진주대첩은 조선의 읍성방어에서 극히 예외적으로 성공적으로 수비했고 계속적인 원군과 철저한 준비에 의해서 방어했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의 읍성이 2개뿐이 아니고 각 지역 도찰사가 있는 곳은 다 읍성입니다.
읍성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도둑보호개념이 강하지 적 방어개념이 강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성곽이 약해서 그렇다니 강해서 그렇다니가 중요한게 아니고 앞뒤 상황을 보지 않아서 나온 오류중에 하나입니다.
조선의 성곽이 약하나 강하다가 아니라 조선의 성곽의 목표가 어떤지 부터 파악을 하셔야 할듯합니다. 특히 조선의 읍성은 산성과 달리 거주지를 전부다 포용한다는 개념이 강해서 실제 거주주민들이 방어할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 이러한 대규모 병력을 지키지 못한 성으로 쌓을까요.
바로 왜구때문이였습니다.
즉 도둑때들을 막기 위해서는 거주지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때문에 읍셩이라는 개념이 조선때 급속하게 발달하게 된것입니다.
즉 소규모의 적을 일시적으로 막아내어서 양민들을 보호하는 개념으로 성곽을 짖는 개념이죠. 또한 적은 비용으로 짖기 위해서 산을 둘러싸는 지형을 이용하는 식의 형식을 주로 차용합니다.
따라서 조선의 읍성의 성곽이 너무 길고 약한 것은 왜구 같은 소규모 도둑을 막기 위해서지 대규모 병력방어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의 군사 주둔형태를 보셔도 아실 듯합니다. 집중군개념이 이라가 분산형으로 진지형개념으로 주둔하다가 왜란 이후 집중군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왜구에게 심하기 당했기때문에 나온 결과라는 거죠.
따라서 조선의 읍성자체가 약한편이였는데 왜란직전에 조정에서 대규모 병을 막을 만큼 대비하라는 지령이 떨어지자 다른 성들은 백성의 원성때문에 못했고 진주성은 철저하게 개량보수하게 되었죠.
즉 진주선은 추가적으로 강화하고 무기를 제대로 비치했기때문에 잘 막은거였다고 보는게 더 무게 중심을 주는게 맞을 겁니다.
두번째 산성에 대해서 뭔가 곡해를 하시는듯한데요.
산성개념이라는 것은 마을이 존재하고 마을 내려다 보는 곳에 산성을 짖는 개념입니다. 삼국시대 산성은 주요길목을 방어하는 길목방어개념이고 같은 길이라고 산성을 지나야 하는 원칙을 가진 통과개념이였지만 고려이후부터는 초소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넓은 평원을 감시하는 감시개념이죠 물론 이게 무조건 맞다고 볼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풍이였습니다.
이것도 삼국시때가 대규모 병을 저지하기 위한 산성의 개념에서 왜구같은 소규모 도적때로 부터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변질되어 간거죠.
즉 전투가 터지면 평지에 있는 백성이 바로 산성에 가서 방어하는 개념이죠. 삼국시대때 이러한 양식이 고려이후부터 바뀌게 되었고 자성과 모성이라는 개념으로 산성을 자성개념으로 바뀌게 되었은데 그건 별도로 후에 논의하고요.
왜란때 산성을 점령하지 않고 그냥 진격했다가 결국은 수송루트가 차단되어서 애를 먹다가 결국 산성공략으로 전법을 바꾸게 되었고 행주대첩도 그러한 전술적변화에 따른 왜병의 공략을 잘 막아낸케이스인데 전형적인 지형적 덕을 본것입니다.
행주산성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토성입니다. 성이 좋다 나쁘다 말할 건덕지도 없습니다.
또한 동양성은 내성와 외성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개념이 존재합니다만 내성과 와성의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을 하셔야 합니다.
내성과 외성의 개념은 2차 방어진 개념이라기 보다는 구분자 개념으로 보셔야 합니다. 즉 왕족이나 수장들의 지위처이며 최종적인 방어개념으로 봐야지 이게 전술적인 가치로서 보는것은 타당성이 적을 듯합니다.
블럭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적용이 안돼는 것은 병력이 집중해서 들어오면 그것을 일차적으로 저지해야할만한 곳이 필요한데 성내의 민가들 뿐이죠. 방어적 개념의 블럭이 필요한게 그러한 곳을 민가에게 설치하면 엄청난 민패가 되기때문에 잘 안했죠.
그러나 주민들이 살지않아서 이러한 블럭개념이 가장 확실한것이 일본성이다 라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여러분들이 아시는 진주성은 내성입니다. 외성은 왜정시대때 무너트렸습니다. 오늘 기사보니까 남대문과 동대문 남겨둔게 왜란에 두 장수가 진격해간 문이라서 보존했다는 소리와 같이 아마도 진주성은 일본군이 점령했기때문에 남겨진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보존잘 된것이 말이죠....
문제는 이러한 내성과 외성개념이 만주쪽의 고구려 성곽에는 아직까지 명확하기 보이지 않습니다. 안시성같은 것도 큰 성곽만 둘렀고 전형적인 배산임수개념의 산성이지만 외성과 내성개념이 없죠. 내성과 외성이 있는 지형은 아주 특이한 성들 몇개 뿐입니다.
또한 한양을 보실때 한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10만의 병이 투입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10만병을 보유해서 한양을 지킨다고 생각하면 얼마다 유비지가 많이 들어갈까요. 또한 한양같은 성에서 성곽이 뚤리면 그대로 시가전이 되고 다른 방향에 막은 수비병들은 오히려 배수진꼴이 되어 자멸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한양 을 막지 못했던 것이 군역때문이라고 보시는 듯한데
절대 아닙니다. 한양은 도둑막기 위한 성이지 대규모 병력을 막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또한 수도로서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지 개념입니다.
또한 이러한 도성개념은 전형적으로 막기가 힘듭니다.
고려때 왕족들이 개성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내뺀것도 선조가 몽진한것도 인종이 남한산성으로 내뺀것도 대규모 병을 막할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전이 터진다면 서울 방어하기 위해서 수비군이 그대로 빵둘러서 방어할까요. 틀린 말이겠죠. 요지만 방어해서 길목차단이 우선입니다.
하물며 그때도 같은 개념이 아닐가요.
중국성과 조선의 성곽의 특징은 일단 성이 뚤려서 병력이 유입되면 그것을 막지 못하면 그대로 함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가장큰 문제죠. 즉 유입해서 막아내기에는 지형적으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거주지 개념의 성이기 때문이죠 막기 위해서 이래저래 방어물 세우다가는 주민들 사는데 방해가 되기때문에 함부로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개념이 바로 백제 사비성전투때 잘 나타나죠. 물론 핑계였지만 사비성에서 나당연합군에 맞서서 싸울때 왕족끼리 내분이 일어나죠 결국은 사비성 성벽에 신라군의 깃발이 보이자 바로 항복해 버리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거주지 개념의 성곽의 방어적 한계라고 보시는게 맞을 듯합니다.
중국성에 대한 개념을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중국성은 명청조이후로 성개념의 전투가 이렇다 하게 없습니다. 극히 몇개의 예외일 뿐이죠. 삼국지에 나오는 성개념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시는 듯하는데 성을 잘막아서 지켰다 라는 소리는 거의 못들어 봅니다. 또한 성이 뚤렸는데 내성이나 다른 블럭에서 잘 막아서 성을 지켜냈다라는 것도 잘 못보죠 성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정규수비병과 대치해서 막아냈다는 것 정도이죠.
즉 중국 성은 성문이 뚤린 상태에서 성안에서 또한 대규모 접전을 벌여서 물리치는 개념이 강하지 성안에 또다른 성곽으로 보호해서 막는 개념이 잘 없죠.
특히 농민반란 과 같은 거의 비졍규 보병의 공격에서도 힘없이 주요성곽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결국은 성공략에 대한 소프트웨어가 엄청나게 발달하여서 기존의 성곽이 대규모 병력에 대해서 쉽게 넘어간다는 소리랑 같습니다.
그럼 일본식 개념은 어떤가 바로 이러한 산성개념의 일본식 변형이거나 또는 내성과 외성개념에서 외성을 포기한 내성개념이라고 굳이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 즉 일반 백성들의 영역을 보호하지 않고 전투가 터지면 바로 농민들을 수용해서 바로 전투에 참가시키는 방법이죠.
이러한 형태는 지방에만 존재하고 중요한 도시에는 내성와 외성이 같이 있어 외성에는 백성들이 거주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성의 역활의 차이와 도시의 확장의 차이일 뿐이죠.
또한 일본식 성곽의 성주둔하는 주둔병의 몇십배 정도의 규모가 버틸수 있는 식의 성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곽의 개념은 초기 전국시대때 잘 먹혔지만 후기때에는 안먹히기 시작하죠. 바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기때 대군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소프트웨어적인 공성전 개념이 강력해서 이긴 케이스지 성곽자체가 부실해서 무너졌다는 개념과는 틀립니다.
왜란 말기때 왜성을 쉽게 공략하지 못한 조 명 연합군의 능력은 장수들의 의지부족도 있지만 무엇보다 왜성공략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즉 전술이나 지식 부족이었죠.
이러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포위하면서 인조가 항복하기 기다린 케이스와 같습니다. 병력이 무려 30배 이상이 차이 났어도 치지 못한 것도 성공략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리한 공격으로 오히려 반격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공략안한거라고 보시는게 더 타당할 겁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지어진 화성 즉 수원은 그야말로 읍성개념인데 성곽이 거의 8~10M 개념으로 옹과 치가 고루 잘 섞였다고 하지만 실제전투 치루어 본적이 없어서 어떨지 아무런 판단도 못하죠.
특히 고증할때 보는데 성곽은 전투양상을 같이 보고 왜 이런식으로 성을 구축했는가를 보기 때문에 화성도 좀 애매하죠. 어느정도 실효성이 있는지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말을 잘 못 풀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은 개념이 서로 너무 다르거나 보는 관점이 틀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료적인 일줄의 자료가 마치 모든것을 뒤집어 버린다는 식으로 발상은 틀릴듯합니다.
저는 일본식 성곽이 물흐르는 개념으로 봐서 괜찮은 방어진지라고 말씀 드린거지 그 의미가 기능상이 어떻다고 해서 이야기 한것은 아니죠.
또한 성공략을 생소했던 조 명연합국의 공격방식은 한계가 다했고 결국은 굶겨 죽이는 방식을 공략했던 것도 가장 기초적이면서 원칙적인 전법을 쓴 것입니다.
일본것에 환상이 있다고 해서 울컥해서 몇자 적어봤습니다만 비교론적인 관점과 실증고증론적인 관점의 차이인듯하네요. 수고하세요.
첫댓글 하하하.... 짝짝짝....
쩝 한번적어서 안돼내 한 3번고쳐야 겨우 문맥이 말이 되니 아직 멀었어 막쓰고 고치는 편이라서 쩝
이왕 말이 나왔으니... 안돼내 -> 안되네 "문맥이 말이 되니" 는 문법에 안 맞음.
관점에 따라 자신의 지식을 총 동원하여 적은 글인 것 만으로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모두들 고수님들이군요 우와 놀랐습니다 콜마인드님
조선의 성곽의 특징은 일본의 방어진지 개념과 중국의 성곽개념을 혼용한 케이스가 많죠. <ㅡㅡㅡ 케이스 꺼내주세요...한국에서 일본성건축문화를 배웠다는 케이스를 꺼내주세요 근거있습니까?
혹시 반자이 까페에서 오신건 아니시죠?
개념이라는 단어와 배웠다는 뜻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본인의 국어의식수준의 문제가 아닐까요.
쿨마인드님이 이해하세요. ^^;; '혼용'이란 단어가 아무래도 저렇게 오해 할 수 있다보니... 애초에 '...의 중간개념이다'라고 하셨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글구 로빈훗님은... 오늘 가입하신데다... '다테마사뮤네'라는 이름을 보니 lpoollpool씨가 아닌 듯 싶군요. 다테 마사무네를 일부러 마사뮤네라고 고쳐 자기이름에 쓰는 건 lpoollpool씨의 주특기이다보니.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