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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한 마음이 들 때
참고말씀: 창25:21,22,28,32-34; 27:2-4,13,46; 31:41,42; 35:28,29; 37:3,4; 48:10,14,17-20; 삼상16:1,12,13; 23:17; 24:1-22; 25:30; 26:1-25; 삼하3:17,18
읽을말씀: 창27:1-13; 잠29:20; 삼상24:10
주제말씀: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첫째, 누구에게나 조급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9:20)
누구에게나 조급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로 언제 조급한 마음, 곧 참을성 없이 매우 급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마냥 두 손 놓고 기다렸다가는 공연히 일이 잘못될 것 같거나 엉뚱한 사람의 차지가 될까봐 조바심, 곧 조마조마하여 불안한 마음을 느낄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을성을 기르고 마음을 차분히 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마음이 조급해지면 말도 조급해지고 그러다보면 분명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잠언서 기자는 이런 조급한 사람보다 차라리 누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까? 미련한 자입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29:20)
야곱의 경우는,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야곱과 그의 모친 리브가의 경우는 무엇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습니까? 이삭의 돌발적인 발언과 그 행동입니다. 나이가 많고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던 이삭은 무엇을 직감하고 자신의 큰 아들 에서를 불렀습니까? 그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오판(誤判)이자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앞으로도 족히 20년은 더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35:28,29)
아무튼 이삭은 죽기 전에 에서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했습니까? 장자의 축복권, 즉 언약의 족장들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축복권입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27:2-4)
이 같은 이삭의 돌발행동은 결국 누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습니까? 야곱과 리브가 두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자칫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지금 불안하고 초조합니까? 마냥 기다렸다가는 공연히 일이 잘못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납니까? 조급한 마음이 든다면 무슨 일로 그리 하며, 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원컨대 이럴 때일수록 참을성을 기르고 마음을 차분히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목적도 선하고 방법이나 과정도 선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창27:12,13)
왜 야곱은 이토록 장자의 축복을 받고 싶어 안달했습니까? 아니, 야곱은 그렇다고 쳐도 리브가는 왜 한사코 에서가 장자의 축복 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까? 에서도 그가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 아닙니까?
물론 이삭이 그랬듯이 리브가도 야곱을 편애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28) 사실 자식에 대한 편애는 예나 지금이나 가정불화의 대표적인 원흉(元兇)이자 자식농사를 망치는 주범(主犯)이므로, 모든 부모는 자식들을 절대로 편애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 또 우리는 자녀를 편애하지 말아야 합니까? 자녀들은 부모의 이런 모습까지도 은연중에 닮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37:3,4)
혹 우리도 자녀를 편애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자녀를 다른 자녀들보다 더 편애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망치기 전에, 자녀들이 우리의 이런 모습까지도 닮기 전에 멈출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편, 야곱과 리브가의 경우는 단순히 편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또 무엇 때문입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이는 언제 주어진 것입니까?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입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25:21,22)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야곱과 에서 둘 다 민족을 이룰 것인데 야곱의 후손이 에서의 후손보다 강하고,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같은 하나님의 예언이 있었고, 또한 에서가 장자의 축복 받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더라도,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25:32-34) /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창27:46 상)
두 사람은 어찌 했어야 했습니까? 이삭을 속여 가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야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누군가를 속이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은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이요 조급함이 부르는 오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는 궁극적으로 무엇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신앙입니다.
만일 그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임을 믿고 끝까지 기다렸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래도 결국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주셨을 것이요 그를 통해 언약의 말씀을 성취해가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의 모든 일은 목적뿐만 아니라 그 방법이나 과정 역시 모두 선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위 편법(便法)이나 불법 등을 동원하지 말고 오직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정공법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선한 목적을 이룬다는 미명 하에 편법이나 불법을 저지르면 어떻게 됩니까? 겪지도 안 해도 될 고통과 연단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이를테면 리브가는 자신이 내뱉은 말처럼,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창27:13 상) 이후에는 다시는 야곱을 볼 수 없었으며, 야곱 역시 밧단 아람에서 20년 동안이나 연단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창31:41,42)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선한 목적을 이룬다는 미명 하에 편법이나 불법까지도 불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원하는 결과를 쉽게 빠르게 이룰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까?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무엇과도 타협할 수 있으며 누구와도 손잡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셋째, 비록 더딜지라도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은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삼상24:10)
그러므로 조급한 마음이 들 때면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이럴 때일수록 인내함으로 기다리면서 정공법(正攻法)을 택해야 합니다. 즉 속임수나 술수를 쓰지 않고 정정당당히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그는 소년시절에 사무엘에 의해서 무엇으로 세우심을 받은 바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삼상16:1 하)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2,13)
또한 누구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증언 되었습니까?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아비가일, 아브넬 등입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삼상23:17) /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삼상24:20,21) /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삼상25:30) /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삼하3:17,18)
하지만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기까지 십여 년의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했으며, 이후 다시 7년 반을 기다린 후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 기간의 태반(太半)을 도망자와 망명자로 지내면서 말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이를 앞당길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즉 사울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맞았던 것입니다. 엔게디 광야에서 한 번(삼상24:1-22),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서 또 한 번(삼상26:1-25) 말입니다.
이것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의 경우는 다윗과 그 수하들이 숨어 있는 굴에 하필 사울이 제 발로 들어왔기 때문이요,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삼상24:3) 두 번째의 경우는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병사들 전부를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삼상26:12)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절대로 사울을 죽이거나 해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이 같은 방법으로는 도무지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삼상26:9-11)
마찬가지로 야곱이나 리브가의 경우도 어찌 했어야 했습니까? 이삭을 속이는 방법 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했으며, 에서에게서 억지로 빼앗는 방법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실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사실 장자의 명분은 누군가를 속여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자에게 주권적으로 부여하시는 것이며, 장자의 축복 역시 누가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자에게 강권적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둘 중 누가 장자였습니까? 므낫세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의 조부 야곱에 의해 오른손으로 축복을 받았습니까? 에브라임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야곱의 눈이 어두워서,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창48:10) 잘못 축복했기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48:14)
아닙니다. 므낫세가 장자여도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팔을 엇바꾸어 얹게 하심으로 그리 된 것입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창48:17-20)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가 누군가를 속여서 빼앗거나 또 임의로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자에게 주권적으로 부여하시는 것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 우리의 경우는 조급한 마음이 들수록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정공법으로 승부합니까? 아니면 야곱처럼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고 있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더딜지라도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좀처럼 참지 못한 채 무리수(無理數)를 두거나 속성(速成)으로 쉽게 이루려고 합니까?
https://www.youtube.com/live/i2v59Vf0rN4?si=WxO8B06KLwH3JM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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