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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鄭周永)과 거북선
1970년 5월 초 어느 날 밤, 정주영은 청와대 뒤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오랜 시간 흐르고,
박 대통령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담배를 피워 물더니, 정주영에게도 한 대를 권했다.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래 과묵한
박 대통령이지만 이 날은 더욱 말이 없이 시간만 흘렀다.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 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를 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임자는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사 아니오?”
실은 정주영도 조선소를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건 제반 여건상 지금은 아니고 나중 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 아닌 압박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있었다.
곧 포항제철이 완공되는 때였는데, 그러니까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 줄 산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다.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 당한 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정주영은, 그 날 박대통령에게 승낙을 하고 말았다.
"각하의 뜻에 따라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그래 한 번 해 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탱크를 바다에 띄우고 동력으로 달리는게 배지! 뭐, 배가 별건가? ”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특기가 발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것입니다.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 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 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해외에서 차관 얻기란 하늘에 별따기였지요.
그래서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도 갔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당하고 말았다.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 십만 톤의 배를 만들고 조선소를 지을 수 있느냐?”는 식이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정주영이었지만, 속으로 울화가 치밀면서 약이 바짝 올랐다.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모험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그래.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는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당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해외에서 차관을 얻으려면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넘어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우선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었다.
그래서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사업계획서는 만들어졌지만, 추천서는 해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 회사 A&P 애플도어 회장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직접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 사장을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런던에 도착하여 일주일만에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어렵사리 만났다.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 현대건설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는 말이었다.
정주영은 그럼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도 안 됩니까?"
그러자 그는, "한국 정부도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때, 궁하면 통한다는 정주영식 기지(奇智)가 발동했다.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원 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다.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펴놓으며,
"회장님! 이걸 잘 보시오!
이 지폐는 자랑스런 우리나라 역사를 그려낸 지폐인데, 이 그림은 거북선이라는 철로 만든 함선이지요.
당신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 부터이지만,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 거북선을 만들어냈고, 이 거북선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함선을 괴멸시킨 역사적인 철선입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바로 이 돈 안에 담겨 있으니,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롱바톰 회장은 의자를 당겨앉으며 지폐를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앞 면에는 한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고, 뒷면에는 바다에 떠 있는 배가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다.
"정말 당신네 선조들이 실제로 이 배를 만들어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그렇구 말구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입니다. 한국은 그런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입니다. 불행히도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로 인해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만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회장님!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보내 주십시오."
정주영은 조금도 기 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롱바톰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지폐를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조상을 두었소. 당신은 당신네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겁니다."
롱바톰 회장의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다.
"거북선도 대단하지만 당신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이 정말 좋은 배를 만들기를 응원하겠소!"
그러면서 롱바톰 회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 악수를 청했다.
수 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으며, 이는 정주영의 번뜩이는 기지의 산물이었다.
그날 롱바톰 회장은 현대건설이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 계통이나 정유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 주었다.
정주영의 기지(奇智)로 첫 번째 관문이 통과되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현대건설 수행원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관광했다.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영국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다.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다.
“아~ 제 전공이오? 그 이전에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보셨는지요?”
“아! 네 잘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에 들렀을 때, 졸업식 광경을 본 생각이 났다.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 번 척 펼쳐 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하면서 태연하게 농담을 했다.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은 짧지만, 사업 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큰 배포를 보여 주는 유머를 내던졌다.
그러자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겁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더 훌륭하군요. 당신의 전공은 유머이시군요?.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낼 테니 행운을 빌겠습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일인가?
정주영의 유머 한 마디가 그 어려운 차관을 이끌어 낸 것이었다.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 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부총재는 이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 주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최종적인 확인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 주기로 결정한 것이였다.
은행 쪽은 사전에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확신은 정주영의 배포가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서 두번째 관문도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다.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가지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내가 배를 구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만 달러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쳐놓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고 또 조선소도 없는 당신에게 배를 주문하겠습니까?
설사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수 있겠소?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라면,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는데 보증을 해 주겠소?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정말 난감했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배를 만든다고 해도 그 배를 믿고 사 갈 사람이 없었던 것이였다.
정주영은 다시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 놓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정말 내가 봐도 한심스런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냐? 천하의 정주영 아니냐? 여기서 무너질 내가 아니지!"
그 날부터 마음을 다잡아 먹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 줄 선주를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허허 벌판 모래사장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당신이 내 배를 사 주겠다고 계약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서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주겠소!”
미친놈 취급 당하기 딱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세 번 만나니까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리바노스가 정주영의 배포를 믿고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을 했다.
선박에는 세계적인 리바노스지만, 정주영의 사람 됨됨이에 밀려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겠다. 대신 배 값을 싸게 해 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 주겠다. 그래서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 상황을 보고 조금씩 배 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 주겠다!”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 받았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다.
정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적인 이야기다. 그 뒤부터 정주영은 부하 직원이 어렵다고 하면,
"해 보기나 했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정주영은 귀국하여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 앞까지 달려나와 그를 맞았다.
그 때 지도를 놓고 볼펜으로 그리며 본인의 구상을 설명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비서들에게 정회장이 볼펜으로 그리는 대로 공장을 짓게해 주고,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지원하라고 지시를 했다.
훗날 박대통령은 울산현장에 자주 들러 막걸리를 같이 나누며 정주영을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에 불과했다.
먼저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서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이 때 그의 특기인 역발상 창의력을 발휘했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 건조는 선박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러면서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했다.
제일 먼저 스웨덴에서 배 만드는 설계사를 데려왔다.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배 만드는 공장도 없으면서 모래사장의 모래를 포크레인으로 퍼내고 웅덩이를 파 놓고, 거기에 올라오는 물을 펌프로 퍼내 가면서 그 웅덩이 속에서 최초의 배를 만들었다.
공장도 없이, 독크도 없이, 모래를 퍼내 놓고 그 속에서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한 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쌓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다.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 구두끈도 못 푼 채 잠을 자며 배를 만들었다.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쩌다 서울에 오면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다.
이른 새벽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 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가는 장사꾼들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뜨거워졌다. 저렇게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 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 모든 이들의 삶은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훗날에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고 한다.
최초의 배가 완성되던 날, 막아 놓았던 바닷물을 텄다.
물이 웅덩이로 쏴 들어오면서 배가 붕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붕 뜬 배가 바다 쪽으로 쑥 밀려나갔다.
세상이 온통 뒤집어졌다.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단 한 척의 배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세계적인 대형 선박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건조 능력 70만 톤, 부지 60만평,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은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 3개월만이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 참석하여 '조선입국(造船立國)’ 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다. 그러나 한창 잘나가는 듯하던 조선사업에 위기가 닦쳐왔다.
이는 바로 1973년에 불어닥친 오일쇼크 때문이었다. 오일쇼크로 인해 유조선을 주문했던 사람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다.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3척이 울산 앞 바다에 그냥 떠 있었다.
그 중 1척은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가 주문한 유조선이었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현대조선으로선 휘청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역발상을 생각했습니다.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1976년 3월 인도하지 않은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가지고 아세아 상선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나르던 외국 선박회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세아상선에 수송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14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렇지만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지. 내가
택시를 타다가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택시회사에 돈을 주어야 하나?
그 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서 자기네 배를 택시처럼 돈주고 빌려 쓴 것인데, 우리가 배를 만들고 우리 배로 우리 기름을 운반하겠다는데 돈을 달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였다.
정주영은 뚝심으로 버텄다.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 달러로 떨어다.
그래도 옴짝달싹 안하고 버텼다. 결국에는 10원도 안 주고 우리 기름을 현대 아세아상선에서 운송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 상선은 지금은 현대상선이 되었다.
오일쇼크로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적인 현대중공업이 되었다.
이것 저것 구실을 붙여 다 만들어진 유조선을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쨌든 황량한 모래 벌판 사진 한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 주었던 지난 날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현대중공업 도크에서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이 진수되었다.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 해군은 미군이 폐기 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 칠을 해서 쓰고 있었다.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 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 짜리 지폐의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했다 한다.
지금 전세계 바다에 새로 나오는 배 5척 중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 중 4척이 한국산이라 합니다.
한국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 가격으로 수주를 맡긴 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배를 만들 도크가 없다고 한다.
길이 200m에 15층 높이의 배를 땅 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 가 띄우는 데 이런 신 공법은 한국 조선소에서만 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 최고라 합니다.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상무는 이 기술자들을 “나라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세계 선박 엔진시장의 45%를 싹쓸이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불어닥친 불황의 여파로 몇 년간 고전은 했지만, 지금 세계의 선주(船主)들이 다시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모랫바람이 휘날리던 미포만은 이제 배 조립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습니다.
그곳에선 3일마다 1억 달러짜리 거대한 배가 한 척씩 쏟아지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배를 찍어낸다”고 합니다.
세계 조선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한 척의
배를 만든 이익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라 했나 봐요.
그리고 또 1984년 "정주영 유조선 공법"이라는 내용으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충남 서산간척사업 A지구 매립 공사는 6.4㎞를 연결함으로써 완공되는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으로 생기는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43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땅이었다.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드는 국가 사업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곳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드나드는 물의 양이 3억 4천만톤, 밀물시의 유속은 초당 8미터에 달해 20톤에 달하는 돌망태를 넣어도 그대로 물에 휩쓸려 갔다.
흔히 최종 물막이 공법은, 케이블과 바지선 등 해상 장비로 물막이 구간의 바닥을 점차 높여 가는 점고식(漸高式), 또 덤프트럭 등 육상 장비를 이용해 점차 구간을 좁혀 가며 축조하는 점축식(漸縮式) 그리고 이들 두 방법을 같이 쓰는 병행식 등이 있었다. 하지만 서산 간척지 공사는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통상적인 공사 방법으로는 엄청난 비용과 작업 기간이 오랫동안 소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 때 정주영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놓고 물막이 공사를 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 획기적인 공법의 사용으로, 계획 공기 45개월 가운데 36개월을 단축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방조제를 쌓는 성과를 올렸으며 280억원의 경비도 절약함으로써 전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정말 정주영다운 배포요, 정주영다운 공법이었다. 이 기술은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아 "유조선 공법"으로 명명되어 지금 세계 여러나라에서 배우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은 가고 없습니다. 2001년 3월 21일, 당신이 설립한 서울 아산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이 한 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호는 아산(峨山)이며, 1915년 11월 25일에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8세에 통천 송전소학교(通川松田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졸업하였으며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 그의 정식 최종 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유일합니다.
2000년 5월에 현대 명예회장직에서 물려났고,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 훈장과 노르웨이 왕실 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사후에는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 뒤인 2006년 11월에 미국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엔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면 된다는 신화를 창조하신 거인 정주영!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 대인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될 때까지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하고 위인 중에 위인 거인 중에 거인으로 칭송 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의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정주영이 존재하고 그 험란한 길을 굳굳히 걸어가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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