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시인, 故 신경림 선생님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였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의 시인 신경림(申庚林) 선생님이 저승으로 가셨다. 암으로 오래 투병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위문이라도 갔을 텐데. 내가 아는 신경림 선생님은 정직하고 선량하고 욕심이 없는 분이었다. '정직'을 나는 가장 높이 사고 싶다. 한국 문단에서 드물게 말과 생각이 따로 놀지 않았던 분. 누구처럼 술자리에서 여성문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또 누구 처럼 후배 여성문인들을 처음 보자마자 야-이 X 야-"라고 함부로 부르면서 나중에 미투가 유행할 때 페미니스트인 척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동심을 간직했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을 가졌던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수요일 아침 일찍 여의도에 가서 K은행 직원 들에게 시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비보를 접했다.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시 '낙타'를 혼자 속으로 되새기는데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엾은 사람" 이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이 나왔다.
예정된 치과 치료를 마치고 마취가 풀린 후에 좀 쉬었다가, 조문객이 비교적 뜸한 낮 시간에 빈소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서 문단 사람들이 날 보면 서로 불편 할 것 같아, 신경림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조문을 마치고 조용히 빈소를 빠져나왔다. 시인은 결국 시로 남는다.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있는지도 모르는 가없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앞으로 더 열심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 먹는 데 돈을 아끼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부실한 잇몸 때문에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못 먹는다. 날씨가 더워지는 이맘때면 가장 그리운 게 수박 주스와 아포가토. 오늘 아침에도 집 근처 카페를 지나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수박 주스 해요?"라고 물었는데 "아직 안 해요" 라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시무룩한 얼굴로 카페를 나왔다. 나는 카페나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슬렁슬렁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창밖에 나무가 보이는. 나무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도심 속의 오아시스 같은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시집을 읽는다.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는 순간, 지상의 어떤 제왕도 부럽지 않다.
"벼락의 위세 사라지고 저녁 비도 개었을 제/
높은 산을 뒤로하고 혼자 난간에 기대서니/
(ᆢ ) 남은 인생 밥이나 배부르게 먹으면서 /
동파에서 초연하게 늙어 가리니/
골짜기 하나만 독차지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세상만사 심드렁할 뿐이다"
(소동파(蘇東波) '담이에서', 류종목 옮김)
소동파가 골짜기 하나만 독차지하기를 욕망했다면, 나는 카페 한구석만 독차지하기를 욕망하노라. 카페 한구석. 전망 좋은 호텔 라운지의 소파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세상만사 나 몰라라, 뭐든지 용서 해 주마.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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