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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 39. 병드신 것과 갇히신 것 - 마 25: 41. 저주 받은 자
마 25: 39. 병드신 것과 갇히신 것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
의인들은 본 절에서도 주님께 선을 베푼 일이 없다고 증언한다.
1]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주께서는 마태복음 10:40, 42에서도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8:5에서는 그를 믿는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결국 주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25: 40. 작은 자 하나에게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내 형제들’은 그의 부활, 승천 후에 이 세상에 파송될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을 가리켰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0: 40에서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는 ‘여기 내 형제들’에 포함될 것이다.
1]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내 형제'(*, 아텔폰무) - 형제(*, 아멜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여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 (35, 36절).
* 마 12: 47-50 –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2]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 42. 18: 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 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다.
3]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하시고
35-36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당하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
* 빌 2: 6-8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보시었다.
* 마 8: 17 -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사 53: 4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사 63: 9 -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
* 히 4: 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따라서 그분은 자신 있게 고난을 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을 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 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 마 22: 34-40 – 가장 큰 계명 –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히 13: 2-3 –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3] 그리스도의 인간관
예수께서 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하신 다음에 하셨다. 이 비유들은 다 같이 주의 재림 시에 있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주의 재림 시에 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1) 인간 속에 계시는 하나님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의 획기적인 인간관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을 주종 관계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형제' 또는 '자매'로 파악한 것은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다.
인간을 형제나 자매로 보는 것은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며, 피차간에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사상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형제'나 '자매'의 인간관을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인간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각성시키고 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 '인간의 모습으로 사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 막 3: 31-35 –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1세기에 가까운 로마의 식민지 생활에 시달려 처참한 모습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내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라'고 선언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본문에서와 똑같은 맥락의 '인간관'을 표출하고 계신다.
부한 자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도가 아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가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인간관을 갖는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2) 인간의 삶 속에 계시는 하나님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 '양'들은 삶을 산 사람들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가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와준 사람들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결같이 불우한 환경 가운데 놓인 사람들이다. 천국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시간과 재물을 바쳐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한 '봉사'에 대하여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고 있다.
여기에 '봉사'의 요체(要諦)가 있다.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서도 기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봉사다.
요즘에는 목회를 하는 데도 사람이 경영학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교회는 인간의 집단이기 때문에 경영학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라고 한다.
경영학의 요체는 적게 투자하고 많이 수확(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요체는 전부를 그냥 베푸는 데 있다.
* 막 10: 45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자기 생명까지도 인간을 위해 봉사하였다. 무덤까지도 남의 것은 잠간 빌려 쓰셨다가 반환하고 가셨다. 오늘 교회가 헌금 수익에 열심하고 복음적인 삶을 등한히 하는 것은 '염소'의 책망을 받을 일이다.
봉사자의 눈은 '낮은 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하고 봉사자의 마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마 6: 3)하는 데 두어야 한다. 그런 눈과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다.
(3)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역사의 때가 되면 예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이다. 그때는 인간 속에, 인간의 삶 속에 계시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영광의 주'와 '심판의 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 마 25: 31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때 '양'과 '염소'를 구별하실 것인데 '양'은 '낮은 자'들과 함께 산사람들로 ,'염소'는' 높은 자'들과 함께 산 사람들로 갈라놓으실 것이다.
거기에는 백인종이나 흑인종이나 판별의 기준이 될 수가 없고 일등 국민과 후진 국민의 판단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오직 '낮은 자' 즉 사회에서 소외된 자, 무기력한 자,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고 긍지와 자존심을 심어주어 새로운 삶의 활력을 갖게 한 '참 봉사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마 25: 41. 저주 받은 자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
주께서는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염소와 같은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곧 죄 때문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 죄 씻음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저주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마지막 장소는 지옥이다. 그곳은 ‘영영한 불’의 장소이다(막 9: 43, 48. 계 20: 10). 그곳은 마귀와 악령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 모든 사람들도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이 구절은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문구이다. 7: 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 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2]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 계 20: 10 -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영원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은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
* 마 4: 1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눅 4: 2 -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 요 13: 2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 엡 4: 27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히 2: 14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딤후 2: 26 -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사자'(*, 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 '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 한다.
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 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3] 영원한 불(*, 토퓌르 토 아이오니온)에 들어가라.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이라는 뜻이다.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불'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
* 마 3: 12 -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마 5: 22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마 18: 8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유 1: 7 –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 계 20: 10-15 –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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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는 ‘여기 내 형제들’에 포함될 것이다.
💖오늘도 하는 일마다 기쁨이 되고 숨쉬는 순간순간 마다 즐거움과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는 ‘여기 내 형제들’에 포함될 것이다.
설교 감사합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는 ‘여기 내 형제들’에 포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