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8-8:1a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고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 앞에 두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 했고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죽었다.
이전 말씀에서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말하자 스데반의 대적들은 모두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분노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신성모독으로 쳐죽이는 장면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막은 다음에 이렇게 달려드는 것은 58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자의 입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기에 부정한 죄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 전체가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성 밖으로 끌어내서 죽인 것이다. 누가복음 4:29절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 밖으로 끌어낸 것과 똑같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은 증인들이 먼저 증언을 하고 돌로 친 후 나머지 무리들이 다 돌로 치는 법이다. 분노가 충만한 자들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입을 막는 방법은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성모독을 한 자를 돌로 처형시키는 절차는 2-3세기 유대교 문서인 미쉬나 산헤드린에 나와있다. 먼저 법정으로부터 멀리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일 사람의 옷을 벗긴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두 번을 집어 던진다. 만약 그 때까지도 살아있다면 돌 하나를 그의 심장에 떨어뜨린다. 그래도 살아있다면 모든 이스라엘이 돌을 던진다(b.Sanhedrin. 6:1-4). 필자도 이 문서를 보지 못했기에 어제 설교한 누가복음 4:29절에서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는 것을 안식일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산헤드린 6:1-4절에 비추어 보면 낭떠러지에서 던지는 것은 돌로 쳐죽이는 절차이다. 물론 산헤드린은 예수님 시대보다 뒤의 문서이기에 예수님 시대에도 똑같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확실하다고 본다.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막은 다음에 이렇게 달려드는 것은 58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자의 입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리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은 증인들이 먼저 증언을 하고 돌로 친 후 나머지 무리들이 다 돌로 치는 법이다. 분노가 충만한 자들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입을 막는 방법은 죽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라고 했다. 다수는 여기서 청년이라는 말이 십대 청소년이라는 뜻이 아니라 24-40살의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증인들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구경꾼이니 옷을 맡아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처형의 책임자이고 증인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사울이 젊은 나이기에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으며 아마도 처형을 담당한 책임자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른 살 쯤의 나이에 이미 산헤드린 공회원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이가 젊다는 것만 가지고 사울이 공회원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후 문맥을 볼 때 공회에서 결정한 일을 공회원이 아닌 사람이 책임을 지고 처형을 집행하기는 어렵다. 사울은 젊은 나이부터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의 자리에 올라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59절은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예수님께 기도한 말이다. 먼저 스데반은 서서 돌을 맞으면서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이것은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했던 마지막 말 중 첫번째 말이다. 누가복음 23:46절에서 예수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주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대신 부르던 호칭이기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에서 신성모독을 한 것이다.
60절에 보면 그 다음에는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돌에 맞아 더 이상 서서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무릎을 꿇으면서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른 것이다.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면서 외친 기도는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라는 것이다. 저 사람들에게 돌린다는 말은 본래 저 사람들을 향해서 서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이는 55-56절에서 예수께서 서 계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는 예수께서 법정에서 재판관으로 죄인들을 향해서 선다는 뜻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분노 충만한 자들의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한 것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 23: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세상에는 아무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흉내내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스데반에게 충만하게 임했기에 그렇게 철저히 예수님을 닮은 것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닮은 것이다.
60절 마지막 부분은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라고 했다. 잠들었다는 말은 어린아이가 잠이 들 듯 아주 평화스러운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실제 상황은 돌에 맞아 죽는 잔혹한 죽음이지만 스데반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스데반이 아주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는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신 증거이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품에서 아기처럼 고요하게 잠이 든 것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 평화롭게 잠이 든 스데반과는 스데반을 죽인 분노 충만한 무리들의 우두머리의 모습이 8:1절 앞부분에 나온다. 그 우두머리는 사울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처형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했다. 같은 말이 사도행전 22:1-21절에서 바울이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내용 중에 나온다. 그 중에 20절은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라고 했는데 찬성한다는 말이 마땅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는 모두가 좋게 여겼다는 뜻으로 모두가 스데반을 죽인 일을 좋게 여겼다는 것이고 사울도 역시 그렇게 좋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는 그렇게 죽여 놓고도 분이 안 풀린채 아주 잘 죽였다 라고 하는 장면이다. 무리들의 우두머리인 사울이 얼마나 분노에 가득찼었는지를 나타낸 말이다.
John Stott는 "이러한 평화로운 죽음이 사울의 살인적인 분노를 배경으로 얼마나 밝게 빛났는가?" 라고 했다. 꽃을 밝고 아름답게 보이게 찍으려면 사진가들은 검은 배경을 사용한다. 검은 배경 앞에 밝고 화사한 꽃이 피어 있을 때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다. 분노 충만했던 사울과 그 무리들은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의 죽음의 어두운 배경막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은 분노 충만했던 자들의 캄캄한 분노 앞에서 죽어가면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꽃처럼 밝고 화사한 잠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