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생활을 할때 주일성수의 문제는 언제나 나에게 큰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고집스러울만큼 주일성수에 달리다보니 회사에서는 매우 비협조적인 직원으로 낙인찍혀야 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의 고집이고 집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나 절대적이었다. 정기적으로 봉급이 인상될 때마다 나는 그 보복을 겪어야 했다. 상대평가 방식이다보니 나는 언제나 최하점수였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다보니 4년 후배들의 보수와 똑같아 졌다.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겪어야 했다.
너무나 낙심된 마음에서 새벽기도를 출석했다. 그날따라 새벽기도 출석자는 나 한명. 담임목사님은 나를 놓고 마치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처럼 아삽의 시를 본문으로 선택하셨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3, 개역개정) 시73편 전체는 악인의 형통에 대한 아삽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당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하나님의 뜻은 달리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고백이다. 봉급인상때 받은 물이익으로 상심해있던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교회가 대면예배를 못드리고 영상으로 주일을 대체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생각을 했었다. 주일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가치관이 가차없이 무너져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 말도 안되는 국가권력의 횡포이다. 지하철에는 모든 사람이 평상시와 똑같이 밀접해 이용을 하는데 왜 종교활동만 제한을 해야하는 것인지. 교회가 너무 나약하게 대처한 오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행위로 구워받는 것이 아니니 너무 무리한 해석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이제 돌복숭아와 마늘의 수확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수확시기가 다가올수록 마음에 근심도 생겨난다. 박보영목사의 설교를 듣다보면 누군가가 훔쳐가는 것도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들키지않고 가져가라고 하신다는 말씀은 놀랍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나 내 아내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다. 언제나 저녁식사 전후가 도둑이 다녀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저녁식사 후 운동삼아 텃밭을 다녀오며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