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강릉에는 경포호가 있다. 지금의 면적은, 과거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는데, 과거에는 북쪽 끝에 오죽헌이 있었고, 남쪽 끝에는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터가 있었다.
오죽헌은, 박정희 시대 성역화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관광지이고, 조선의 충신 율곡 이이 선생의 생가이자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가이기도 하다. 율곡 이이와 심사임당은 모자 나란히 우리나라 지페에 등장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는, 왕권을 뒤집으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허균에 의해 페허로 남겨져 있다가 최근에야 겨우 복원되어 현재 강릉시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 그녀의 천재성은 남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에서 먼저 알려지게 되었다.
심사임당과 허난설헌, 두 여인은 비슷한 시기에 내 고향 강릉 경포호 북쪽과 남쪽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들의 삶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심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만 아니라, 그녀의 예술적 재능은 당대에 유명했으며 여자로서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결혼생활도 힘들었을 뿐아니라, 그녀의 재능 또한 당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그녀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동생 허균에 의해 중국 사신을 통해 중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허난설헌의 여자로서의 삶은 아이의 죽음과 함께 몹시도 불행하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다.
심사임당과 허난설의 삶이 이토록 차이가 났던 이유는,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이었던 처가 살이의 마지막 세대가 심사임당이었고, 시집살이의 첫 세대가 헌날설헌 이었던 때문이었다.
匠家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자가 장가를 간다는 말은, 곧 장인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조선초기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모계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선조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라에서는 사대부에게 시집살이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미, 왕족들에게는 시집살이가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을 양반부터 시작해 임진왜란이 지나면서부터는 상민들까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멀리 2000 년전, 중국의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진나라였는데, 진나라는 시황의 실패로 오래가 못했다. 그것을 거울삼아 한나라는 처음부터 왕권강화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앞장 선 사람이 동중서였다. 동중서가 왕권강화를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유교의 엄청난 왜곡이었다.
춘추전국 시대는, 엄청난 혼란의 시기였고, 인륜이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아비가 자식을 팔아먹고 왕과 신하의 관계는 배신과 암살로서 점철이 되었고 지아비와 지어미의 관계는 수시로 불륜이 일어났고 형과 아우와의 관계 또한 앞뒤가 없었다.
공자는, 그 혼란의 시기를 바로잡는 선각자였다, 그 위대한 가르침이 유교였던 것이다. 유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철학적인 인문학 지침서였던 것이다.
유교의 핵심은 五倫이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夫婦有別이다. 그 뜻은, 부부는 다르다는 뜻인데, 그 중심에는 부부간에는 엄격히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의 남녀는 생물학적 특성보다도 사회적인 특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기였다. 그것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특성을 살려주고 그것을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여성의 육체적 특성과 그 시절의 환경과 역사와 경제적 시스템에서 여성의 역할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즉, 여성을 바라봤던 그 시절의 시선은 gender 였던 것이다. gender의 시선에서는, 남녀는 억압하거나 경쟁의 사이가 아니라, 상호보완이거나 존중의 상대였던 것이다. 오로지 여자의 성을 sex이거나 경제적 약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현대의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그 시절, 남녀는 서로를 억압하지도 않았을 뿐만아니라 존중했고 서로를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숙명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동중서는 그 아름다운 가르침인 五倫의 夫婦有別을 왜곡시켜 三綱의 夫爲婦綱을 만들어내었다.
유교에는 결코 없었던 공자나 맹자도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三綱을 조작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거대한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의 중앙집권적인 왕권강화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한자, '綱' 자의 뜻은, 벼리 강자로 벼리라는 말은 고기잡는 그물의 세로줄을 말하는 것으로 그물을 잡아당기면 한 곳으로 모아진다는 뜻, 곧 한곳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즉, 왕과 부모와 남편은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존재로서 절대권력의 기틀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공자는, 왕이 잘못을 하면 갈아치울수도 있고, 부모가 잘못하면 부모 대접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남편이 잘못하면 꾸짖을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동중서는 공자의 가르침을 왜곡시켜 모든 것의 절대권력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동중서의 왜곡이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중서를 흉내낸 사람이 바로, 조선 건국의 기틀을 잡았던 정도전이다. 경국대전을 지은 정도전은 동중서를 흉내내어 삼강을 강조했고, 그 일환으로 여성의 복종을 위한 제도로서 시집살이를 장려하게 된 것이다. 그 첫 피해자가 허난설헌이었던 셈이다. 만약, 허난설헌이 심사임당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억울하지 않고 화려했을 것이다.
심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살았던 조선 선조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자본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조건 하나가 탄생되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가 가다가 풍랑을 만나 아메리카 대륙 미국의 멘허턴으로 구사일생으로 상륙을 하고 그곳 원주민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그를 도와준 원주민을 배신하고 다시 신대륙을 찾아 그들을 살육하고 황금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콜롬버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인도를 찾았고 그곳에서 인도사람(인디안)을 만났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들에게 금 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사기꾼이었던 콜롬버스의 뒤를 이어 수 많은 유럽인들이 금을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고, 그 덕분에 스페인은 막대한 금을 가질 수 있었고, 유럽의 화폐양은 늘어나게 되었는데, 영국은 스페인이 노략질한 금을 대서양에서 해적으로 위장하여 다시 강탈했고, 프랑스는 스페인의 금을 노리고 프로방스 지역에서 양모산업을 발전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프랑스의 양모산업을 위해 영국의 시골 영주들은 자신들의 장원에서 농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농토인 공유지에서 농노들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엔클로우져 운동(종획운동) 이다. 그 현상은 수세기에 걸쳐 진행되었고 영국에서는 내쫒긴 농노들이 빈농에서 부랑자로 전국을 떠돌게 되었고,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자 영국왕과 시골영주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제도와 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구민법 빈민법 등이다. 그것을 두고 유럽 사회복지의 효시라고 떠들어내는 것은 진정으로 웃기는 일이다. 거기에는 그들을 위한다는 어떤 온정조차도 섞여 있지 않았다. 단, 그 당시 카톨릭 신부들의 갸날픈 이해 정도가 있었느데, 그 마저 자신들의 교구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공유지에 쫒겨나 부랑자가 되었던 농노들이, 후에 산업혁명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노동력이 되었는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였던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도, 프랑스 양모산업에서 원료공급원이었던 영국이 그 지위를 서서히 상실하자 늘어난 양모를 처리하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금을 가져오기 위해 양모산업 뿐만아니라 여러 산업을 발전시켜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고 많은 자본가와 자유시민, 즉 부르죠아들이 탄생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데, 그 또한 프롤레타리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르죠아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부르죠아 속에는 일부 농노도 있었지만 약삭빠른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죠아를 위한 자본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다만, 상품생산을 위하 노동의 단위였다. 프롤레타리아가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곳에는 사회적인 남녀(gender)의 개념이 없었다. 오로지 더 많은 노동을 해서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맑스가 놓치고 간 것이 있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시절 gender의 지위를 상실하고 가정으로 돌아가 억압 당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억울한 노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에는 남녀의 개념이 없었다. 오로지 생산성이 강조되었기에 같이 일하고 육체적으로 떨어졌던 여성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할 수 밖에 없었다. 상품 생산을 위한 도구로서 노동이 전락하면서, 가정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을 했던 여성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인식이 낮추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산업혁명 후, 여성들의 가정일은 전통사회에서의 여성들의 가정일 과는 현격한 차이가 났다. 전통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비단 노동에만 국한되는 것이아니라, 모계사회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았었는데, 노동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면서 부터는 여성의 노동은 프롤레타리아보다 못한 미미한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것이 여성의 gender로서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원인 된 것이다.
그후, 남녀의 성역할은 gender가 아니라 오로지 sex 였다. 남녀는 상호보완하고 존중하는 사이가 아닌, 억압하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여성운동은 남성과 같은 지위와 임금을 받기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사회적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특성과 품성 그리고 고귀함에 대해서는 같은 여성들 조차도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제, 여성운동은 변해야 한다. 남성과의 경쟁이 아닌, 상호보완과 존중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로지 생산의 한 단위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시선에서 벗어나, 공자의 가르침인 夫婦有別 과 모계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사회적 성 역할인 gender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