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모범 성모 마리아
오늘 복음 말씀은, 읽고 묵상할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하며, 예수님이 마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성모 마리아 공경을 거부하고 있으며, 거부의 근거로 오늘 말씀을 자주 들먹이곤 합니다. 하물며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부정적 해석에 동조하는 아류가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그 한 예로, [매일미사]책의 (오늘 묵상) 내용은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내용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없는 말을 덧붙여 가며 묵상하거나 해석하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이며, 그룹 모임에서 묵상한 내용을 나눌 때는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로 시작합니다. 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 말씀 앞의 본문과 뒤의 본문을 살펴보아도, 오게 된 동기에 대한 암묵적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냥 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은 가족이나 친척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인의 가족 또는 모임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함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나아가 복음서에, 예수님의 가족이나 친척이 언급되는 경우는 몇 번 있어도, 이들이 비난이나 질타의 대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고 확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지고의 뜻은 세상과 인류의 구원에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시며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셨으며, 끝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성자의 이 하느님의 뜻 실현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신 분 가운데 으뜸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우선, 마리아의 품을 통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뜻이었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순명의 말씀으로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여신 분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모님은 공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분입니다.
마리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고통 가운데 일곱 가지를 뽑아 성모칠고(聖母七苦)라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길에서의 예수님 만남,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으심 목격, 성시를 품에 안으심, 무덤에 묻으심 등을 통한 고통의 깊이는 아마도 예수님 다음이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 장면에서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는 모함 소식을 들으셨을 때 마음이 어떠 하셨을지는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함께하셨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사도 1,14)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에는 성모 마리아가 늘 함께하고 계십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본받아, 순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신앙인,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신앙인, 성모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 속에 머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 다짐하며,
명절 연휴에 만나는 모든 이와 반가움과 행복을 나누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