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연 회장, 광화문 광장 20배 미국 초호화 저택 공개
★청소부에서 라이트하우스 회장으로...김태연 회장의 성공비결은 뭘까?
150cm 작은 키에 짙은 화장이 인상적인 김태연 회장. 그녀는 68세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며 6개 기업의 총수, 미국 방송국 토크쇼 진행자, 미국 공인태권도 8단 그
랜드마스터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김회장에게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하나 있다.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폭행한 후 자살한 남동생.
도망치듯 미국행을 택했던 김 회장은 청소부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으나 그 삶 역시 녹록치 않았다.
두 번의 이혼과 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녀는 지금 광화문광장의 열 여섯배에 달하는
대저택의 주인이자 실리콘벨리에서 6개의 계열사를 이끄는 기업 총수가 됐다.
반도체 공장 오염방지 시스템 개발 회사인 라이트하우스는 월스트리트 저널 선정 100대 유망 기업,
미국인이 가고 싶은 기업 2위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그녀를 자수성가에 인생 역전까지 가능하게 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자식들은 푸른 눈의 미국인. 흑인, 백인, 히스패닉 등 인종도 다양하다.
그녀는 6남 3녀를 모두 입양해 키우고 있다.
그녀가 입양한 자식들은 술과 마약, 섹스, 폭력 등에 중독되어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아이들.
김 회장 자신도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낳아준 부모조차 포기한 아이들이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뒷골목을 배회하던 아이들은 지금,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어 김 회장과 함께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대저택에서 함께 생활하며 가장 특이하면서 아름다운 가족을 만들어가고 있다.
★핸디캡을 극복한 신념의 주인공 김태연 회장★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핸디캡을 극복한 신념의 주인공 김태연 회장
“응애, 응애~” TYK 그룹 김태연 회장의 첫 울음소리다.
지금은 미국에서 존경받는 여성 CEO로 손꼽히는 김 회장.
그녀는 1946년 경북 김천에서 여느 아이와 같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이 세상에 태어났다.
정월 초하루가 시작되는 밤 12시 무렵이었다. 덕분에 온 집안사람들에게 ‘세상을 흔들 장군감’이란
기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집안의 기대도 잠시였을 뿐. 태어난 아이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아이라는 사실은 가문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시련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는 “제가 조상님들께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고 외치며 탄식했다.
할머니는 “우리 김씨 집안 망했네” 하면서 부엌에서 끓이던 미역국을 솥 채로 마당에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집안을 망하게 할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특히 아버지의 지독한 냉대는 어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할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어머니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기울어가는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어머니의 손톱에 피고름이 맺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그녀를 붙잡고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차라리 같이 양잿물을 마시고 죽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넌 안 돼, 넌 재수 없는 ×이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왜 난 안 돼?’라는 반문이 일었어요.”
어린 김태연은 7세가 되었을 때 우연히 삼촌들의 무도 수련을 보았다.
자신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술을 가르쳐달라고 졸라댔다.
삼촌들은 “계집애가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 속 썩이지 마라. 운동은 안 돼.
너는 절대 할 수 없어. 설령 한다 해도 지쳐서 못 할 거다.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가
남편감 찾으면 시집이나 갈 생각해라”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무술을 배우고 어려운 수련과정을 견뎌내 삼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커가면서도 계속해서 아버지로부터 냉대와 구박을 받았다.
그리고 종종 퍼렇게 멍이 들도록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오직 정월 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술 취한 아버지가 그녀를 때리는 것을 본
남동생이 흥분해서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을 한 것이다.
나중에 남동생은 아버지를 때렸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다.
너무도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1968년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와서 2년 뒤 그녀는 가정을 꾸렸다. 미국인과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중 그녀의 할아버지를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강요 속에 얼떨결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재수 없는 계집애란 오명을 벗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집 식구와 함께 산 시집살이
역시 순탄치 못했다. 인종차별에 대한 편견으로 시어머니와 두 명의 시누이가 드러내놓고
눈치를 주고 구박했다. 힘든 시집살이로 인해 그녀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다.
첫 번째 유산 때 자궁이 약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두 번째 임신에서는 무척 조심했으나,
시누이의 폭언으로 충격을 받고 유산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당시 시댁에서 강아지보다 못한 존재로 생활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결혼생활 동안 식물인간 상태가 되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자궁종양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기까지 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시댁과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분가도 해보았지만 이미 부부 사이의 애정은
사라진 후였다. 결국 결혼 10년 만인 1980년에 이혼을 하며 불운한 생활이 계속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모든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하고 그녀도 하는데,
왜 나라고 못 하겠어?)”를 외치며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삶을 선택했다.
돈이 없어 매일 칼국수를 끓여 먹는 등 10여년 간의 갖은 고생 끝에 그녀는
미국 100대 우량 기업으로 선정된 반도체 클린룸을 제작하는 ‘라이트 하우스’와
6개의 기업을 이끄는 TYK(Tae Yun Kim의 약자)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그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급업체인 ‘노스스타’를 인수했다. 자신이 직접 토크쇼를
진행하며 유명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최초의 여성 태권도 8단으로
그랜드마스터에 임명되었다.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태권도 수련원인 정수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15만 평의 대저택에서 입양한 9남매의 자녀와 함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수많은 수식어가 김태연 회장 앞에 붙지만 무엇보다 ‘Can do(할 수 있다)’라는 말을 뺄 수가 없다.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딛고 일어선 김 회장은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험난한 삶의 파도를 넘어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김태연 회장의 성공 노하우는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성공노하우를 7가지로 정리해봤다.
★그녀의 성공노하우 7
첫째, 어떤 순간에도 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에 이민 와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날품팔이 생활할 때조차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짐했다.
“이렇게 주저 않을 수는 없어. 접시나 닦고 가스 펌프 일이나 하면서 내 젊음을 다
허비할 수는 없어. 나만의 날개로 이 땅에서 마음껏 날아야 해. 김태연.
넌 찬란한 날갯짓으로 온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나비가 돼야 해.”
둘째,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녀는 허드렛일을
하는 직장이 아니라 좀 더 제대로 직장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태권도를 가르치겠답시고
인근의 한 고등학교 교장실을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당시 태권도에 대한 인식이 없던 학교 측에서는 난색을 표명했다.
게다가 그녀의 영어실력은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렇게 참고
인내하면서 도전할 수 있는 것도 태권도를 통한 정신수련에 의한 것이라고
설득해서 결국 체육 수업을 맡게 된다.
셋째, 무수한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남녀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여자로
태어나 구박받고, 신체적으로는 153cm의 단신에,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이라는
소수 민족에, 영어도 못하고, 이혼까지 당하고, 종양까지 생겼다. 그녀를 보자면
온통 성공할 수 없는 이유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가로막고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었다. 어떤 장애물도 자신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작은 장애물에 쉽게 넘어져 주저앉아 울고 있지는 않은가.
넷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Can do 정신’이다. 보통 사람들은 학벌이 없다,
재능이 없다, 인맥이 없다 등의 이유로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무엇무엇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고 끝도 없이 핑계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김태연 회장은 성공한
사람들이 해냈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는 그녀는 어딜 가나 소리 높여 외친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다섯째,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원칙을 고수한 정신이다.
그녀는 컴퓨터 사업을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새너제이로 이사를 한 다음
부족한 형편으로 인해 하루에 세끼를 수제비를 끓여 먹을 정도로 힘들었다.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신용으로 시장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거래선들이 하나 둘씩 끊기는 것이었다. 이상해서 조사를 해보니 경쟁사들이 그녀의
회사를 죽이기 위해 가격덤핑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직원들도 같이 가격을 내려 경쟁하자고 했으나 김태연 회장은 거절했다.
우리는 오히려 제품의 질을 높이는 연구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경쟁사의 일부는 도산했고, 고객들은 김태연 회장을 찾았다.
원칙을 고수한 그녀가 결국 승리한 것이다.
여섯째, 무술훈련을 통한 자아 탐색이다. 김태연 회장은 전통무술의 정신은
복잡다단한 주변 환경 속에서 정신의 안정을 잃지 않도록 돕는 행동규범이라고 말한다.
무술을 통해 참된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연 회장은 도저히 깨트릴 수 없을 것 같은 벽돌도 특별한 훈련만 거치면 누구나
격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물리적 장벽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고질적
고정관념으로 인해 행복과 성취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도 격파할 수 있는 힘이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육체적인 단련 뿐 아니라 정신적인 단련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다. 김태연 회장에서는 6남3녀의 양자 양녀가 있다.
거의 모두 그녀 밑에서 태권도 수련을 익혔던 제자들로 결손 가정에서 불우하게 성장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친부모 이상으로 정을 나눠줬다.
이들 역시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김태연 회장을 뒤따랐던 것이다.
모두 외국인지만 한국인 이상의 정과 사랑을 가지고 그녀에게 효성(孝誠)을
보이고 있다.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도 결국은 이러한 따뜻한 정을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김태연 회장은 마력에 가까운 비전의 힘으로 그녀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벽을 허물어버렸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Can do 정신’으로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벽을 뭉개버리자.
정철상 인재개발전문가, 인재개발연구소 대표, 나사렛대학교 겸임교수
참조출처 : 오디오컨텐츠닷컴에서 제작한 김효석 원장의 설득 화술 강의 중에서
- 출처 : 월간 혁신리더 2010년 6월호 -
★성공에너지를 끌어내는 일곱가지 비결 /2001
첫댓글 어제 9.22일 kbs1 글로벌 성공시대에 방영/
애구!~가족사 안봐도 훤하네..당시 우리 집안 사는 형편이 다그랬지..
그걸 극복한 누님을 존경 이상으로 칭송하고 싶소..
가족이 아저씨(미국서 작고),아즈매(미국 거주),김태연(본명 김경애).김사봉(별세),김경희,김사덕,,막내딸( 이름은 모르겟겠네..)
내가 김천중 2학년땐가 67년도쯤 사봉이형이 자살햇다고 학교서 집(김천 하숙집)에 오니까 들었는데..
집안에 야단났지뭐..사봉(옥생)이 형이 엄청 미남이라 여학생들이 쫄쫄 딸아 댕겼엇지..
하도 등체가 크서 염하기가 어려웠었다고 할정도로 기골이 장대(당시 고교1학년?)
사덕이는 나하고 동갑..경희 누나와 아즈매는 몇년전 뵈웠지.
김태연어사가 청향님의 사촌 아닌가요 ? 대단히 자랑스런분 한국을 널리알리신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