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통신시설로 사용되었던 벙커를
미술관으로 재생한 매력적인 장소
빛의 벙커
큰 딸이 짠딸에게 소개하고
짠딸이 나한테 소개한 장소다
사실 반 고흐전이 내가 제주 내려가기 몇일 전에 끝난다고 해서
무척 아쉬워했었는데
내년 2월말까지 연장한다는 소식을 찾아내고는
마치 보물이라도 찾아낸듯 기뻐했었다
오전 라운딩을 끝내고
곧바로 달려간 그 곳은
작은 공원같은 느낌이 들었다
벙커로 들어서자마자
고흐의 그림들이 쏟아져내린다
정신이 아득하다
빛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고흐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마치 샤워하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고흐의 그림은 실제로 볼 때 감흥이 큰데
화면엔 방금 고흐가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붓에 흠뻑 묻혀
유화기름에 전혀 섞지 않은 채 마구 휘두른 느낌이 들 만큼
터치감이 선명하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감상한다
내 몸위에 고흐가 낙서하듯 붓을 휘두른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에 서 있는 나에게 까마귀가 날아오고
보랏빛 붓꽃이 다리에서 한들거리다가
어느덧 벽을 가득 채우는 해바라기들.
소박한 의자와 침대가 있는 고흐의 방에 내가 오두커니 서 있었더니
갑자기 아를지방 밤의 카페가 노란 등불을 켜고 나를 초대한다
론강의 별이빛나는 밤이 황홀하게 다가오다가 한순간에 흩어져버렸다
가셰박사도 고흐의 얼굴도 내 얼굴에 겹쳐지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 내가 서 있다
그럼 영상을 잠시 감상해보실까요?
빛의 잔치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에
까마귀가 떼를 지어 내 눈앞으로 몰려오는 장면으로
웅장한 음악과 함께 끝났지만
감흥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여운이 오래 남는다
정신을 차리느라 좀 지체하다 일어서야 했다
금방 벙커 밖으로 나가기가 좀 아쉽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아직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있을 것 같다
나도 뭔가 빈센트씨한데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우린 벙커 옆에 있는 커피박물관 바움으로 커피를 마시러 간다
뭔가 우리끼리라도 이야기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리는 아를지방 곳곳을
화구통 메고 걸어다녔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잠시 상상의 발걸음을 더 해야했다
실제 아를지방에 가면
화구통을 메고 다니는 고흐의 모습이
거리 곳곳마다 새겨져있다
이 표지판을 발견할 때마다
이 긴 그림자는 해질녘일까
아침 해가 떠오를 때일까 상상했다
그냥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해질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일거야
긴 그림자를 끌고 다닌 모습에서
그의 고독함이 느껴졌었다
볕 좋은 가을날에 카페 발코니에서의 시간은
이국적인 풍광과 함께 조용히 흐른다
아 참 좋은 시간이다
저게 뭔나무래요?
먼나무요
아 저기 저 나무 말이에요
먼나무요
아 저기 보이잖아요 빨간열매가 가득한 저 나무요
아, 먼나무라니까요
그렇다 '먼나무' 열매다
창 밖엔 먼나무 빨간 열매가 마치 쏟아질 듯 매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