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떠나는 휴가여행에 개구쟁이 소년이 홀로 집에 남겨져 소동을 벌이는 〈나 홀로 집에〉 시리즈는 20세기 말 대표적인 가족 코미디 오락영화였다. 그러나 이제 ‘나 홀로 집에’는 현실 속 ‘1인 가구’ 형태로 21세기 지구촌의 대세가 되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비명을 지르는 소년 얼굴의 클로즈 업 포스터는 현재 일상의 다양한 얼굴들로 대체된 셈이다. 90세를 맞이하는 아브라함의 여행길 2018년 4월 초 발표된 ‘통계로 보는 사회보장 2017’에 따르면, 한국의 1인 가구는 540만으로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로 드러났다. 20·30세대 독신가구 증가와 더불어 고령화로 인한 노인 1인 가구도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2010년대 이후 부부와 두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 패러다임이 깨지면서 미국과 영국은 30%에 가까운 1인 가구가 대표적인 주거방식이며, 일본과 프랑스는 이미 1인 가구가 30%대를 넘어 다양한 지표들로 지구촌 삶의 방식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혼밥’, ‘혼영’, ‘혼행(혼자 여행)’ 등 혼족 생활문화산업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구촌을 돌며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온 〈나의 마지막 수트〉(The Last Suit, 2017, 파블로 솔라즈)도 고령화 현실에 접속하는 시니어 로드무비이다. 불편한 오른쪽 다리를 ‘오랜 친구 추레스’라 부르며 곧 90세를 맞이하는 아브라함의 여행길에는 기차를 타고 홀로코스트 기억이 직면하는 과정을 절묘하게 풀어낸다.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연주곡에 맞춰 여럿이 어깨동무하며 춤추고 환호하는 흥겨운 이미지로 열린 영화는 아브라함을 위한 가족사진 촬영으로 이어진다. 내일이면 요양원에 들어가야 하는 그는 온 가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기념작으로 증손들을 거느린 사진을 찍고 싶다. 그런데 증손녀 미카엘라가 보이지 않는다. 단체 사진을 꺼리는 고집불통 미카엘라를 빼놓고 사진을 찍자고 해도, 그 또한 고집불통이기에 반항적인 아이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딸들에겐 냉정해도 유독 미카엘라를 애지중지하는 그는 아이가 요청한 지문확인 가능한 아이폰6 살 돈(8백 불)을 주기로 합의하는 거래과정을 거쳐 6인 증손 모두 함께하는 가족사진을 찍는다.
폴란드에서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며 딸들을 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딸들은 출가했고, 이제 그는 집을 처분한 유산을 딸들에게 나눠주고 짐을 정리하는 중이다. 나이 들면서 나이를 못 받아들이는 인간이 대다수지만, 자신은 남은 인생을 기쁘게 살겠다고 작정한 독립 존재인척 하지만, 장애 다리를 잘라내라는 권유나 요양원에서의 삶이 달갑지 않은 그는 겉으로는 당당해도 지쳐 있다. 그런 와중에 수트 한 벌을 발견하고, 그 순간 그의 남은 인생 여정은 로드무비로 급진전된다. 그 수트는 오래전, 그러니까 70년 전 홀로코스트 재앙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친구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물증이다. 이제 그는 모험적인 혼행을 결단한다. 너무 아프기에 지워버린 망각도 언젠가 출몰하는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이다. 새로운 인생 이모작을 결단하면서 강렬하게 떠오른 70년 전 약속은 유일한 버킷 리스트 항목이 되어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는다. 혼행길이 시니어 로드무비로 퍼져나갈 조짐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가출한 그는 한밤중에 친구의 손녀를 찾아간다. 연극연습을 하던 그녀는 할아버지와의 오랜 우정을 담보로 내건 그의 강렬한 부탁에 못 이겨 마드리드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 준다. 그러나 그 여정은 만만치 않다. 마드리드 호텔방 창문을 잠그지 않은 탓에 여행비로 가져온 전 재산을 도둑맞는다. 오래전 유산문제로 가족을 떠나 마드리드에 사는 딸에게 사과하며 약간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부녀지간 화해도 발생한다
그보다 더한 문제도 발생한다. 입국심사나 기차역에서 나치 치하에서 금지어였던 ‘폴란드’란 말을 하지 않고 쪽지에 적어 소통하는데, ‘독일을 발로 밟지 않는다’란 요구조건이 필수항목이다. 사라진 과거여도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트라우마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스러운 길에서 선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를 이해하려 애쓰며 돕는 독일의 인류학자 잉그리드와의 만남은 그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돼준다.
그밖에도 혼행길에서 만난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그가 유연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풀어가는 로드무비의 매혹을 선사해준다. 이를테면,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빈털터리 청년, 딸과 화해를 통해 도움받기를 조언하며 격려해 준 호텔 주인, 그리고 고통스런 홀로코스트의 기억으로 기차에서 졸도한 후 폴란드 병원에서 만나 게토였던 로츠까지 안내해 준 간호사와의 일시적 동행은 그를 운 좋은 시니어로 변모시킨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1인 가구 대세가 된 이 시대, 버킷 리스트로 작동하는 혼행길이 시니어 로드무비로 퍼져나갈 조짐을 보여주는 반가운 지표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