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⑪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세번의 비극 -대구사건.제주 4.3사건,여수·순천사건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을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① 루즈벨트,처칠,스탈린,장제스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1667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② 38선그은 로스장학생 세사람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17706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③ 망국의 책임,우리부터 돌아보자http://blog.naver.com/ohyh45/220461118911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④ 신탁통치 파동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1988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⑤ 미소고동위원회와 하지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20456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⑥ 여운형과 김규식의 뚬과 좌절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2115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⑦⑧ 이승만과 김구의 애증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21996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⑨ 박헌영의사랑과 야망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2401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⑩ 김일성 신화의 진실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24741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⑪ 대구,제주4.3,여수.순천사건 http://blog.naver.com/ohyh45/220461146000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⑫⑬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http://blog.naver.com/ohyh45/220478663563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⑭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⑮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16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17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18
1.1946년 대구사건-낫·창으로 무장한 시위대 경찰 눈알빼고 혀자르고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 -강증산(姜甑山)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 시신
사회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할 말을 못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학문이 이데올로기의 외풍(外風)을 만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헝가리의 사회학자 만하임(Karl Mannheim)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존재구속성(Seinsgebundenheit)’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이념의 굴레를 쓰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반공’이라는 불퇴전의 보루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공부하던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이 공항 검색대에서 압수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름에 막스(?)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꼽히는 무어(B. Moore)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표지가 빨갛다는 이유로 금서였으며, 라흐마니노프(Sergei Rakhmaninov)가 소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창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볼륨을 낮춰 그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외국에서 좌파 서적이라도 가지고 들어오려면 표지를 찢어버리거나 매직펜으로 제목을 지워 세관원의 압수를 모면했다.
그와 같은 엄혹한 시대는 의외로 길었다. 국어 시간이면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대회, 반공 표어짓기대회를 치렀고, 미술 시간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의 학습을 거쳐야 했고, 음악 시간에는 반공 노래자랑을 했고, 체육 시간에는 반공 마라톤대회에 나가 뛰어야 했다.
교과서 뒷장에는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었고 ‘통일의 노래’를 실은 적도 있었다.
반공·북진 통일이 아니라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치인은 처형되었고, 용공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제재 대상이 되었다. 향토예비군교육장에서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 과업”이란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력이 낮은 친구들은 그것을 외우지 못하여 그저 “때·무·쳐·이”라는 첫 글자만 외웠다. 반공은 일상화되었고 거기에 익숙해 갔다. 그렇다면 반공은 악(惡)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논란이 되지만,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던 시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세 번의 사건, 곧 1946년의 대구사건, 1948년의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장 사건의 명칭부터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대구10월항쟁’(심지연)인지, ‘대구인민항쟁’(박헌영·정해구)인지, 우익들의 호칭처럼 ‘대구공산폭동’인지, ‘대구사건’(대구MBC)인지 아직 학계의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름 짓기도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구사건’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해서도 독자들의 양해를 얻고자 한다. 공자(孔子)께서 역사를 기술하면서 “있는 대로 설명할 뿐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말라”(‘述而不作’·논어 述而篇술이편)고 하신 말씀을 거듭 유념하면서 이 글을 쓴다.
1946년, 대구의 분위기
1946년의 상황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조속한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점차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5월에 미·소공위가 정회에 들어감으로써 그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마저 무너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미에 대하여 우익이나 미 군정이 초조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정작 초조와 불안을 느낀 것은 좌익, 특히 박헌영(朴憲永) 일파였다.
7월부터 시작된 좌우합작은 좌파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국의 운영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만들었으며, 11월 14일로 확정된 남한의 과도 입법기구의 창설은 좌익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한의 상황은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화약고와 같았다
남한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박헌영과 부산·대구·서울 등으로 퍼지는 파업 분위기
박헌영으로서는 이와 같은 정적(靜寂)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사건(1946년 5월 15일)으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내부의 도전을 받고 있던 그에게는 일거에 형세를 만회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난(湖南) 추수 폭동(1927)을 연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의 수뇌부는 강성(强性)을 과시하면서 당내 반대파의 도전에 반격을 가하고자 9월 9일의 총파업을 지시했다. 전위(前衛·vanguard) 이론에 심취했던 박헌영으로서는 파업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파업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철도 노조를 겨냥했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그 자체로서 매혹적인 것이었다.
7000여명의 부산철도 노동자들은 9월 15일 군정청에 제시한 임금 인상과 일급제 반대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부분 태업으로 맞서 오다가 9월 23일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 부산철도 노조의 중심에는 백남억(白南檍)이 있었다.
대구사건을 취재했던 대구매일신문 기자 정영진(丁英鎭)의 증언에 따르면, 백남억은 규슈대학(九州大學)을 졸업하고 부산철도국 운수과장으로 재직 중인 지식인이었다(‘폭풍의 10월’ 297~298쪽). 부산철도 노조를 시발로 하여 대구와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4만여명의 철도 종업원의 파업이 일어나자, 전평(全評) 산하 각 분야의 공장과 직장으로 파업은 신속하게 파급되었다.
미 군정이 보기에 당시 대구의 공산주의자들은 아마도 ‘대구의 분위기를 서울까지 가져간다(bring Taegu to Seoul)’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당시 대구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좌익적 분위기가 강했다. 한민당 요인으로서 도당의 재정을 맡고 있는 박노익(朴魯益·동아자동차주식회사 회장) 등 기업인들의 정치 참여가 있었으나 좌익적 분위기 속에서 입지를 강력하게 내세울 형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북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시의 유력 잡지였던 ‘무궁화’ 1945년 12월호, 80쪽에 수록된 대구인민위원회 광고에 따르면,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 최문식(崔文植), 산업부장 이선장(李善長),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재정부장 김성곤(金成坤)·채충식(蔡忠植), 노농부장 정시명(鄭時鳴), 선전부장 황태성(黃泰成)으로 구성된 대구인민위원회는 능력이나 이념에 대한 경도, 그리고 지적(知的) 수준에서 우익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울에서 파업을 지휘하고 있던 전평위원장 허성택(許成澤)은 함북 성진(城津) 출신으로 적색 노조로부터 시작하여 모스크바동방노력자대학을 수료한 파업전문가였다.(그는 대구사건 이후 월북하여 노동상(勞動相)과 노동당중앙위원을 역임한 후에 종파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
어느 일이나 다 그렇듯이 역사에서의 어떤 사건도 느닷없이 문득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까지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이미 깔려 있었는데, 대구사건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가 있다
식량 문제, 경찰의 억압, 콜레라가 대구사건의 사회·경제적 배경
첫째로는 식량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飢餓)문제였다. 당초 군정은 식량부족이란 신생국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대구의 상황만 보더라도 식량 사정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으로 말미암아 군정은 미곡수집령(米穀收集令)에 따라 2월부터 강제 미곡 수집에 들어갔다. 농가가 식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쌀은 1인당 4말5되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 차례 기아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 초등학생의 평균 50% 이상이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고, 전 학생의 80%가 점심을 굶는 학교도 있었다. 굶주린 시민들은 열차를 타고 전북 지방에 가서 쌀을 사 가지고 오다가 신태인역에서 그곳 소방대와 청년대의 제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8월 19일 오전 11시 도청 앞에 몰려들었다. 시위가 격화된 것은 콜레라의 발생으로 영남·호남·충북 일부 지역에서 열차 운행이 중지됨으로써 양곡 수송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대구 사태의 두 번째 요인은 경찰의 억압이었다. 당시 군정이 판단한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근무했던 한국인 경찰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민중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이 존재했다.
더욱이 경찰은 우익 청년단체의 협조를 얻어, 범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피의자를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양곡 수집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이 부당하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에 괴산(槐山)경찰서 옆에 살았는데 밤이면 고문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아 잠을 잘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정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경북 경찰의 총수인 권영석(權寧錫)은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친일 관료로서 관구경찰청장에 오른 인물이었고, 대구경찰서장 이성옥(李成玉)은 창씨명이 마쓰오카 히사요시(松岡久允)로서 일제강점기에 안동(安東)경찰서에서 형사주임으로 근무할 때 이미 종칠위훈팔등(從七位勳八等)의 서훈을 받았으며, 광복 당시에는 경시(警視) 계급을 끝으로 경찰직을 떠났다가 군정청에 의해 대구경찰서장에 기용된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 ‘순사’는 두려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울면 엄마는 “순사 온다”고 말해 울음을 그치게 했다.
셋째로는 당시에 만연했던 콜레라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구에서 8월경에는 1만여명이 감염되어 있었다. 위생에 대한 경비·통제·격리는 국방경비대의 임무였기 때문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던 경찰이 통행 검문소를 관리했는데 이때 동원된 경찰의 거친 처사로 말미암아 의료진과 화목하지 않았다.
8월 1일 대구의전(大邱醫專) 교수 이상요(李相堯)는 콜레라가 발생한 관내에 7월 30일부터 교통을 차단하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방역 순찰에 동행했던 국방경비대원도 이상요의 추궁에 가세하자 소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후 학교로 돌아온 이상요는 경찰서에 연행되어 공무집행방해죄로 구금되었다. 대구 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구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1946년 10월 2일 대구경찰서 앞의 시위대.
사건의 전개
9월 30일에 대구에서는 여러 곳에서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이 시위 행렬을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를 당하여 사소한 충돌이 있던 터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직 추석(9월 10일)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후 노동자들이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하여 1000여명이 시위 행렬을 개시하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중은 불어나 3000~4000명이 되었는데, 연령은 12~17세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군중들은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은 호기심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색깔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대치 상황은 당시로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다루면서 매우 거칠어 시민들 사이에 증오감이 일어났다.
대구 역전에 모인 노동자·지식인·학생·사무원·일반 시민들은 “쌀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시위의 배후에는 경상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과 인민보안대장 나윤출(羅允出)이 있었다. 나윤출은 본디 씨름장사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그는 그 뒤 대구를 탈출,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임되어 체육계에서 활약했으며, 1966년 런던월드컵축구대회의 임원으로 참가했다가 숙청되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청년행동대원 100~200명씩이 1개 분단을 이루어 대구 역전 광장을 비롯하여 주요 거리에 배치되어 암약하고 있었다
경찰의 발포를 시점으로 대구는 무법천지가 되다
10월 2일 12시에 경북지사 헤론(Gordon J. Heron) 대령이 주둔군에 탱크를 요청하자 프레지아(John C. Presia) 소령이 이끄는 탱크부대가 거리를 순찰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당시에 배치된 병력은 219명이며, 부산 제5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이날 오후 5시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오후 7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당시의 소요에 대하여 탱크를 동원할 상황은 아니었으나, 군정은 이곳의 좌익적 성향에 지레 겁을 먹어 과잉반응한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군중들이 해산함에 따라 사람의 숫자가 적어졌는데도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로부터 대구 일대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왜관(倭館)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장석한(張錫翰)과 경관의 눈알을 빼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했다. 경찰의 성기를 잘라버린 경우도 있었다.(‘재팬 다이어리(Japan Diary)’·마크 게인(Mark Gayn)·420쪽) 이때 민간인 22명과 경찰 31명이 죽었다.
10월 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의한 피살자라며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이를 목격한 군중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조선일보 1946년 10월 8일자) 사망자의 신원에 대하여는 좌익과 우익의 견해가 다르다.
당시 남로당원으로서 전평 경상북도평의회 간사였던 이일재(李一宰)는 나와의 인터뷰(대구 그랜드호텔, 2003년 10월 1일)에서 당시 사망자는 대팔(大八)연탄공장의 공원이었던 황팔용으로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대구 MBC가 제작하여 1996년 10월 10일에 방영한 ‘대구 10·1사건 5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했던 당시 대구의전 교수와 경찰 관계자들은 좌익들이 대구의전 영안실에서 그 시체를 탈취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체의 이름이 황팔용이었다는 이일재의 증언이 맞을 수는 있지만 시체의 신원에 대해서 나는 대구의전 교수들의 증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민중들은 경찰서를 포위하여 한동안 점거했으며 인근 지방의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를 강탈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대구의 군정 당국은 충남과 충북에서 경찰을 지원받아 대응했다. 경찰에 대한 보복살해는 더욱 늘어났다. 살해 방법은 몽둥이나 쇠꼬챙이를 사용했으며, 시체의 머리를 자르고 얼굴의 껍질을 벗기고 팔다리를 잘랐다.(조선일보 1946년 10월 29일자)
이날 대구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죄수 100여명이 탈출했으며 시위대는 도청 관리와 경찰의 가택을 습격하여 가구를 파손하고 가족들을 납치했다. 소요는 얼마 동안 더 진행되다가 10월 21일 밤에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며, 연말에 이르러서야 소요는 가라앉았다. 군정은 특별군법회의를 설치했는데 심지연 교수(경남대학교)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보통군법회의가 5년형 이상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구 사태는 “대구에서만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70~80여개 군 및 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 한 예로 선산인민위원회의 내정부장이었던 박상희(朴相熙)는 10월 3일에 선산군 민청 간부 김정수(金鼎洙)와 더불어 봉기에 참여했다.
그들이 이끄는 2000여명의 군중들은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구미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白喆相) 경찰서장에게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으나 이튿날 경찰의 반격을 받아 박상희는 군농조위원장인 김광암(金光岩) 및 민청 간부인 장달천(張達千)과 함께 사살되었다.(‘대구 리포트(Taegue Report)’·이그지비트 에프(Exhibit F)·20쪽, ‘폭풍의 10월’·정영진·389~390쪽)
백남억은 한민당 간부 박노익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박노익의 사위였다. 박노익은 공화당 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朴浚圭)의 아버지이다.
무법천지 속 좌우익 가릴 것 없이 자행된 사형과 불법행위
유산
훗날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洛東江) 전선이 위험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끌어내어 기결수나 미결수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의 예비 검속이었다. 특히 대구와 왜관에서 헌병들은 200~300명씩 줄을 세우고 사살했으며, 그중에는 12~13세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총이 부실하여 단발에 사살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확인 사살을 했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의 비명이 그치지 않았다.(‘프랭크 피어스 리포트(Frank Pearce Report)’ 1950년 8월 11일(11 August 1950))
그렇다면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어쩌면 우문(愚問)일 수 있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보복살해와 우익의 즉결처분과 암매장은 증거조차도 남아 있지 않으나 그 숫자는 매우 높으리라고 추정되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 당시에 옥중에서 학살된 인명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법천지에서 자행된 사형(私刑)과 불법행위는 더 참혹했다. 그것은 우익이 좌익에 비해 더 잔혹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에 대구형무소에서 군에 이첩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402명이었다.(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7일자,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371~390쪽·2000년)
그 잔혹상은 경북 일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박헌영의 기록(‘투쟁일지’ 119쪽)에 따르면, 10월 16일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대구 소요 사건의 주모자가 서울에 잠입했으리라는 확신 아래 3000여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시내 각 여관과 유곽(遊廓)을 검색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 33명을 검거하여 경관을 해친 자라고 발표했다.
대구 사태를 설명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은 과연 이 사태의 배후에 박헌영 또는 남로당이 얼마나 깊이 연루되었으며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미 군정 측에서는 이 사건이 박헌영의 작품이라고 확신했고, 일부 조선공산당 계열에서도 그렇게 믿고 이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며, 우익에서도 이를 비난했다.
공산당에서는 이를 극좌 모험이라고 비난했고, 안재홍(安在鴻)은 실패한 이립삼(李立三) 노선(공산화 과정에서 먼저 거점도시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농촌으로 혁명을 확산한다는 이론)을 방불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당사자인 박헌영은 이번 사건이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선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려는 것은 이승만 일파와 동일한 견해”라고 응수하면서, 이번 사태야말로 동학란(東學亂·동학농민운동) 및 3·1운동과 더불어 남조선의 3대 인민 항쟁이라고 자평했다.(‘10월인민항쟁’·박헌영·53, 67쪽
박상희,백남억, 김성곤, 황태성… 대구사건에 연루된 민감한 인물들
나이가 많은 독자들은 위의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명(實名)을 보면서 내가 대구사건을 쓰면서 왜 부담스러워하며 사설(辭說)이 길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박상희(1906년생)는 박정희 전 대통령(1917년생)의 형이었고, 백남억(1914년생)과 김성곤(1913년생)은 훗날 민주공화당의 중요 당직자였다.
황태성(1906년생)은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의 무역성 부상(차관)이 되어 남한의 군사정부가 친공산주의 정권이라고 오판한 김일성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1926년생)을 만나러 밀파되었다가 처형된 인물이다.(‘김종필 증언록’ 중앙일보 2015년 4월 20일자)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그런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박정희의 운신과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尹潽善) 후보도 이 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유세반원이었던 김사만(金思萬)은 영주(榮州)에서의 연설에서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으며, 김일성이 내려오면 만세를 부를 사람이 많다” (조선일보 1963년 10월 13일자)고 말했다가 거센 역풍을 만났다. 그때 박정희와 윤보선의 당락의 표차가 15만6000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김사만의 설화(舌禍)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를 하자면, 대구 사태는 전근대적 형태의 민란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흉작, 수입감소, 전염병이라는 민란의 전형적인 3대 요소에 의해 일어난 민중 봉기였다. 여기에 틈새를 노리고 있던 좌익이 이를 호기로 이용했을 뿐이다. 대구 사태 당시에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적기가를 부르고, 노동 해방의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그것이 공산혁명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박헌영의 평가는 대구 사태를 공산혁명으로 지나치게 미화했고 우익은 거기에 이념을 덧씌웠다. 그것은 굶주림과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로당의 전술이 종속 변수로 개입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현대사 연구는 이념의 문제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몇몇 전문가들에 국한된 것이었고, 민중의 생각은 그토록 정제되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대구사건은 박헌영의 주장처럼 현대사의 3대 혁명도 아니고 우익의 주장처럼 빨갱이들의 폭동도 아니다.
그것은 신생국 창설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의 표출이었다. 거기에 해묵은 원한과 전통적인 모순에 대한 격정과 질주가 중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대구 사태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민중적 소망을 담은 현대적 민란이었고 그로 인한 잔혹사였을 뿐이다.
<편집자 주>
이 시리즈는 앞으로 세 번의 비극② : 제주 4·3사건, 세 번의 비극③ : 여순반란, 한국전쟁과 김일성 신화의 진실 순으로 이어집니다.
<정정과 사과의 말씀>
지난 회(10회)의 “김일성 신화의 진실”(1)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이명영 전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며, 필자가 전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근거 없이 작성한 것으로 고명하신 이명영 교수님과 그를 아끼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점을 사과드리고, 이번 실수를 거울삼아 앞으로의 글에 더욱 세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신복룡-
2. 세 번의 비극 제주 4·3사건 - “제주도의 유채꽃들은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지난 6월에 첫 회를 시작한 이래 이번 15회에 이르기까지 무척 긴장했고 살얼음을 밟는 것 같았다. 틀린 점이나 없는지, 나의 글로 말미암아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는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일은 없는지…. 이번호에 특별히 그런 넋두리를 하는 것은 제주4·3사건이야말로 너무 극명하게 좌우가 갈려 대치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현대사는 은원(恩怨)이 너무 깊다. 어느 편에 설 수도 없다. 학자의 소신이니 역사가의 정론이니 하는 것이 참으로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제주4·3사건을 쓰려니 그런 감회가 더욱 새록새록하다.
아름답고 슬픈 제주
언제인가 ‘내가 본 세계의 10대 명승지’라는 주제의 수필 원고 청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1)50만년이 걸려 생성되었다는 네바다주 소금사막에 서서 100년도 못 살며 아웅다웅한 인생의 무상함 (2)피라미드 앞 나폴레옹이 섰던 자리에서의 망연자실함 (3)고비사막의 유성(流星) (4)통일을 염원하며 울며 묵주 기도를 드리던 백두산 천지의 부슬비 (5)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마야(Maya) 유적지와 칸쿤(Cancuun)의 쪽빛 바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Frida Kahlo)전(展) (6)바르셀로나의 피카소박물관과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유적 (7)바이칼호의 물안개와 자작나무 숲, 그리고 데카브리스트(Decabrist·12월혁명당)박물관 (8)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남쪽에 있는 골동품·고서점 도시 스틸워터(Stillwater) (9)일본 교토(京都) 북쪽에 히에이산(比叡山)과 비와호(琵琶湖)를 끼고 있는 엔랴쿠지(延曆寺) (10)한라산 1200고지의 설화(雪花)를 꼽았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곳은 한라산의 아름다움이다. 세계 10대 절경에 뽑혔다거나 내 나라 땅이라거나 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는 설령 한국인이 아니었더라도 한라산의 설화를 꼽았을 것이다. 이 좁은 땅에 한대(寒帶)에서부터 아열대기후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라산에 갈 적마다 늘 기쁘고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제주4·3사건을 쓴 뒤로부터 그렇게 되었다. 더욱이 이산하의 시 ‘한라산’의 다음 구절를 읽을 때면 가슴이 저려온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 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제주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다. 30년 전에 제주사건을 답사하면서 몇 가지 놀란 일이 있다. 한집안에 살면서도 부모와 자식이 따로 밥을 지어먹는 것이 이상했다. 김씨 집에 혼사가 있을 적에 하객인 이씨 집안의 아버지는 저쪽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저쪽 어머니에게, 형은 저쪽 형에게, 그리고 동생은 저쪽 동생에게 따로따로 축의금을 내는데 축의금은 각자 받은 사람의 몫이었다. 대문도 특이했다. 집이 비었을 적에는 긴 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여자만 있을 적에는 막대기를 비스듬히 놓고, 손님이 들어와도 좋을 때에는 그 막대기를 치운다. 육지 사위는 괜찮지만 육지 며느리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했다. 문화인류학을 꺼낼 것까지는 없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그들의 독립심이 매우 강인하다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도는 대륙과의 격리로 말미암아 행정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혜택이 빈약하여 소외의식과 경계심이 강렬했다. 이미 조선시대 후기부터 제주도에서의 이러한 불만은 조직적 저항으로 나타났는데, 양제해(梁制海)의 난(1812), 철종 시기의 민요(民擾·1862), 방성칠(房星七)의 난(1898), 그리고 그 유명한 이재수(李在守)의 난(1901)으로 말미암아 중앙 정부와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하여 영화로도 유명해진 이재수의 난만 하더라도 할 말이 많다. 한국 천주교 박해사를 이야기할 때면 순교자의 거룩한 신심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제주도에서는 프랑스 세력을 배경으로 신자들이 비교도를 박해하다가 사단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흔히 제주교안(敎案)이라 부르는 이 사건에는 제주의 슬픔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4·3사건 당시에 민병대(民兵隊)들이 “예수쟁이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대정교회 이도종 목사를 죽인 사건(‘한국의 성읍교회-대정교회’·전정희·국민일보 2015년 5월 23일자)은 그런 복수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주도에 부임한 관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그 부하들은 육지인이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가 되면 일본은 제주도를 최후의 항전지로 생각하고 많은 무기와 병력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무기에 매우 친숙해 있었다. 종전 무렵에 제주도에는 6개 보병사단과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육군과 막강한 해·공군 25만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도민들보다 군인이 더 많았다. 일본은 아마도 제주도를 ‘한국의 시칠리아(Sicily)’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해방정국에서의 제주도
광복 당시의 제주도는 13개 면에 인구 25만명을 가진, 전남에서 가장 큰 군(郡)이었는데 광복과 더불어 5만명이 더 귀환했다. 일본이나 육지로 나가 있던 유학생, 사상 도피자, 상공인이 대거 귀환한 데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좌익 사상에 젖어 있었고 남로당과 연결된 사람도 많았다. 미 군정이 들어서기 전에 인민공화국 정부가 있었으며 남로당원이 자칭 5만명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농부와 어부였고, 진심으로 공산주의의 교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의 이입은 분노를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정국에서의 제주 상황을 가장 정확히 인식했던 사람은 제주 사태의 조사 책임을 맡았던 서울지방심리원(審理院) 판사 양원일(梁元一)이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제주도민들은 사실상 정부 행세를 하던 인민공화국을 너무 과대평가했고, 경찰이 가혹한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인심을 잃었으며, 여기에 우익청년단이 협조했고, 밀무역 단속을 빙자하여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했으며, 도민들은 강대한 세력에 아부하여 지위와 재산을 보존하려는 심리가 강했으며, 남북 협상을 지나치게 기대했다.(조선일보 1948년 6월 17일자) 경찰의 가혹행위, 곧 고문이나 수탈, 보복살해에 대해서는 제주 사태의 진상 조사를 맡았던 최란수(崔蘭洙) 경감의 기록(동아일보 1948월 6월 23일자)에 잘 나타나 있는데 100명 전후의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를 비롯한 우익들이 제주도민의 생업이었던 일본·제주·육지 간의 중간무역을 위협하고 침해했다. 당시 미 군정하에서 귀환 동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재산은 대부분 섬에 결핍되어 있는 생활필수품이었는데 서북청년회가 이를 압수하여 상인들에게 다시 팔아 돈을 벌었다.(조선일보 1948년 7월 24일자)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의 3·1절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서울운동장(우익)과 남산(좌익)에서 따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하는 동안에 좌우익이 충돌하여 사망자 16명과 부상자 22명이 발생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제주에서는 남산국민학교에서 3·1절 행사를 마치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현장에서 6명이 죽었다. 시위가 격화된 것은 3·1절 경축식에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시국 문제를 거론했고 그 틈새에 남로당이 사건을 확대하려고 암약한 탓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으로 민심이 격분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에 경찰서와 우익이 공격받는 것으로 제주사건은 본격적으로 폭력화되었다. 첫날 민병대의 수는 100명이 넘었다. 당시 제주에는 15개 지서에 약 480명의 경찰관이 있었는데, 이날 경찰관서 11개소와 지서 5개소가 습격을 받았고 경찰관 4명이 사망했으며, 일반인 8명이 사살되었다.(조선일보 1948년 4월 6일자) 습격의 주요 원인은 밀수 혐의 등을 이유로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 고문치사, 강간에 대한 보복이었다. 민병대의 당초 목적은 경찰에 구치되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 구조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정부는 1400명의 본토 경찰을 파견하는 한편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정호(金正晧)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해상교통망을 차단함으로써 외부 세력의 가세를 막으면서 민병대의 귀순을 유도하고자 했다. 김정호는 만주봉천군관학교 3기 출신으로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경찰에 투신, 경무부 공안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 귀순 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제주지사 유해진(柳海辰)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섭을 위해 ‘산(山)사람들’을 만나기로 한 날 갑자기 몸이 아파 못 가겠다고 말했다. 그 다음의 교섭책임자는 김정호였으나 그 또한 갑자기 서울로 올라갈 일이 생겨 빠졌다. 세 번째로 임명된 책임자는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이었는데 그 또한 회담 당일에 갑자기 몸이 아팠다. 이어서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네 번째 책임자로 지명되었으나 그도 또한 담판을 회피함으로써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 다섯 번째 교섭자로 지명되었다. 김익렬(1921~1988)은 경남 하동(河東) 출신으로 일본 고베(神戶)상업학교를 나와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한 인물로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에 국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주도 부임 당시에는 중령이었다. 그는 유서를 써 남겨두고 한라산 유격대 김달삼(金達三·1925~1950)의 아지트로 올라갔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대좌가 이뤄진 것은 4월 28일이었다. 제주 대정중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김달삼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대정 출신이다. 본명은 이승진(李承晋)으로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정토종계(淨土宗系) 세이호(聖峯)중학교와 주오(中央)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아버지가 살던 대구에서 잠시 살았는데 이때 어떤 형태로든 대구사건과 연루되었을 것이다. 1946년 제주도로 귀향한 그는 대정초급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을 가르치면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남로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강문석(姜文錫)의 사위였다.(‘20세기 제주인명사전’ 102~103쪽)
김익렬의 유고(遺稿) ‘4·3의 진실’(‘4·3은 말한다’(2) 320쪽)에 따르면 김익렬과 김달삼 두 사람은 전혀 초면이라고 하나, 제주 사건을 논문으로 발표한 메릴(John Merrill·‘The Cheju-do Rebellion’ 174쪽)과 김익렬의 선임 연대장이었던 이치업(李致業)은 김익렬이 학병 출신으로 김달삼과 동료였으며 제주도에서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번개장군’·이치업·107쪽) 유격대의 지휘자는 김달삼이었지만 군사 지휘관은 학병 출신인 이덕구(李德九)였고 초기의 병력은 500~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할 무렵 버리고 간 무기를 모아 무장하고 군사 훈련은 팔로군(八路軍) 출신들이 담당하여 자못 그 기세가 당당했다.
김익렬과 김달삼, 그리고 박진경
김익렬과의 첫 대좌에서 김달삼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없었으며,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 일제 경찰, 서북청년회를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실시한다면 순종하겠다는 골자의 내용을 피력했다. 4월 말이 되자 유격대 수는 약 2000명 정도로 늘었으며 약 3개월분의 탄약과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유격대 가운데에는 퉁퉁 부은 젖가슴을 보이면서 어서 집에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다. 김익렬은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며, 김달삼과 유격대 두목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선박을 제공할 용의도 있으며, 이를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잡혀두겠다고 약속했다.(김익렬·328~330쪽)
이 자리에서 김익렬이 제시한 사항은 전투 행위의 중지, 즉각적인 무장 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명단 제출이었다. 이에 대해 김달삼이 제시한 조건은 제주도민으로만 행정 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 악질 경찰, 서북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하고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며, ‘의거’(봉기)에 참가한 어떠한 사람도 죄를 묻지 않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김달삼의 제안은 김익렬의 직권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일단 휴전에는 합의를 보았다.
전투가 소강(小康)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5월 1일의 노동절(May Day)이 다가왔다. 불행하게도 이날 오전 11시경 정체불명의 일단이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를 습격하여 주민을 죽이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경찰들에 의한 귀순 방해 공작이었다. 며칠 안에 귀순 작업이 종료되어 진압이 끝나면 경찰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그들은 두려워했다. 더욱이 우익들은 연대장 김익렬을 암살하겠노라고 위협했다. 습격은 2~3일에 걸쳐 자행되었다. 5월 3일에도 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 민병대를 습격했다.(김익렬·332~335쪽)
5월 5일 제주도에서는 딘(William F. Dean) 군정 장관의 주도하에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宋虎聲),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Mansfield),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이 참석하여 진압 정책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하는 김익렬 연대장과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사이에 첨예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으나 딘 장관이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김익렬은 용공분자라는 의혹을 받고 여수 14연대장으로 전출됐다.
김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朴珍景·1920~1948) 중령이 부임한 것은 5월 6일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9연대는 11연대로 편제가 변경되었다. 박진경은 경남 남해(南海) 출신으로 오사카(大阪)외국어학교를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광복이 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했으나 행정장교 출신이었으므로 작전 지휘의 경험이 없었다. 딘 장군은 박진경을 몹시 총애했다. 그는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지형과 요새 배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취임식에서 미욱한 짓을 저질렀다. 내용인즉, 자기 부친은 친일 단체인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 간부였으며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한 것이다. 김익렬의 유고(344~345쪽)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 발언에 대하여 우익들을 박진경이 양민을 보호했다고 반박했다.(‘민족정론소식’ 2000년 3월호 4~5쪽)
박진경의 부임과 함께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다. 김정호 사령관의 작전 계획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제주도의 민중 봉기를 유격대로 확대시킨 근본 원인이 된다. 더욱이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경찰의 실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고자 노골적으로 귀순 공작을 방해했다. 미 군정이 초토화 작전을 묵인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마을들을 초토화시켜 나감으로써 산간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유격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밭의 경계선에 돌담을 쌓았는데 이것이 유격대에는 훌륭한 방새(防塞)가 되었다. 언제인가 제주도 우근민(禹瑾敏) 지사에게 제주도의 돌담 기술자를 명장(名匠)으로 선정하라고 말했다가 제주도 출신이면 초등학교 출신도 다하는 일이라고 핀잔만 들었다. 돌담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남기고 간 토굴이 많아 유격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박진경이 부임한 뒤 거의 1개월이 지나 군정장관 딘은 박진경의 사기를 고무하고자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그날 관리와 민간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이 만취하여 6월 19일 오전 3시에 연대본부의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을 때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비롯한 4명의 부하들이 그를 사살했다. 그들은 박진경의 무자비한 공격 작전이 살해의 동기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고등군법재판은 문상길, 신상우(申尙雨) 1등상사, 손선호(孫善鎬) 하사, 배경용(裵敬用) 하사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조선일보 1948년 8월 11일·15일자) 우익들은 그들이 남로당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박진경의 장군 추서를 추진했다.(‘민족정론소식’ 2000년 3월호 4~5쪽)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崔慶祿) 중령이 취임했다.
이 무렵인 9월 14일에는 제주사건과 관련하여 목포(木浦)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40명의 죄수들이 집단으로 탈옥했다. 경찰은 그들을 처형하고 살점을 저며 좌익 인사들에게 배달했다.(John Merrill·193쪽) 군사 법정은 공산주의 용의자 1650명에게 유죄를 언도했고 이들 중 250명이 처형되었다. 이와 함께 여수·순천사건의 소식을 듣고 유격대는 다시 경찰초소를 공격했다. 아울러 여 순천사건은 우익들에게 제주 학살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비대와 경찰은 제주도 주민을 해안에 설치된 캠프로 소개(疏開)하고, 한라산 아랫자락을 따라 가옥과 농작물을 불태웠으며, 혐의가 있는 유격대와 그들의 가족을 살해했다.(Allen R. Millett·‘Captain James H. Haus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528쪽)
혈흔(血痕)
인간의 마성(魔性)은 얼마만큼이나 극악할 수 있을까. 과연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잔혹하게 동족을 집단 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방 공간이라는 동족의 무대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식민지 지배에서도 겪지 않았던 대량 학살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다시 어리석은 질문을 해보자. 도대체 얼마나 죽였을까. 양민 학살의 진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성산포경찰서에 소장되어 있는 문서(사진)가 곧 그것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계엄사령관이었던 해병대 김○○ 중령이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공문인데, 내용인즉 성산포경찰서에 수감 중인 C-D급 미결혐의자를 즉시 총살하라는 것이었다. D급으로 올라갈수록 중범자이다. 그런데 문서 윗부분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총살이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도 모두 성산경찰서처럼 총살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김 중령은 그 뒤 해병대 사령관으로 진급했고 독립유공자 5등급을 받았으며,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 살다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불이행’이라고 부전지(附箋紙)를 붙인 인물은 성산포경찰서장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신원을 추적해 보니 문형순(文亨淳) 경감이었다. 대정리 앞바다에서 이 문서를 들여다보는데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 문제를 학술적으로 처음 다루었던 메릴은 적어도 제주도 인구의 약 10%인 3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194~195쪽) 군정청에서는 1만5000명이 살해당하고 3분의 1의 가옥이 파손된 것으로 보고하였으며(G-2 Periodical Report, No. 1097 : 1 April 1949), 군사(軍史)학자 밀레트(Allen R. Millett)는 제주도에서 ‘사라진’ 주민이 약 3만명으로 추정되지만 아마도 실제로 피살된 숫자는 8000~1만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28쪽) 제주도의회가 접수한 피해자 통계에 따르면, 당시의 피살자가 9987명, 행방불명자가 1225명,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피해자 1031명, 피해자로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사망이 확실한 무연고 피살자가 2598명, 합계 1만484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제주도 4·3 피해조사 보고서’ 60~63쪽·2000)
요컨대 제주4·3사건의 본질은 사건의 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습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 현상이다. 원인만 따지는 것은 죄상을 묻으려는 구실일 뿐이다. 제주사건은 처음에는 자발적인 민중 봉기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상호간’의 보복살해로 말미암아 사태가 악화되었고, 남북한의 정면대결로 번지자 현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추격을 당하게 된 잔여세력들이 점차로 조직적인 빨치산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주 사태는 남로당으로 하여금 승리할 수 없는 때에 무장투쟁에 뛰어든 결과를 초래했고, 우익에는 양민 학살이라는 오명을 안겨주었다.
김달삼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주도를 탈출하여 월북했다. 북한 혁명열사의 능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1950년 9월 30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은 그 뒤 육군 중장에 올라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퇴역했다. 그는 “좀 허풍스러웠으며 좌경한 군인”(‘번개장군’ 110쪽)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공개하라는 부탁과 함께 가족들에게 제주 사태의 진상을 담은 유서(遺稿)를 남겼는데 그 글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305·357쪽
3. 세 번의 비극 여수·순천사건
- 날씨 걱정하던 농민들 왜 철사에 묶인 채 오동도 앞바다에 던져졌을까
“불행했던 과거 역사를 알고 나면 마음은 더욱 비참해진다.” 앤드루 릭비(E. Rigby·2007)
나는 1960년대 초엽, 대학 초년 시절에 서울 성동구 신당동 시구문시장에서 점원을 하며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이발소 주인의 입담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손님의 넋을 빼놓았다. 그의 입담을 듣다 보면 어느덧 이발은 끝났다. 신변잡기에서부터 현대사를 종횡하는 그의 이야기에는 허풍도 많았지만 무근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빈부가 엇갈리는 길 건너 사이여서 나와 사는 수준이 달랐으나 그 이발소 뒷집에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살고, 그 옆에 육군참모총장 김종오(金鍾五) 대장이 살고, 조금 올라가면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사는데 그분들이 모두 자기의 고객이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머리를 깎던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고향 이야기를 했다. 오늘이 아버지 제삿날인데 먹고살기 어려워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수·순천사건 때 진압부대 요원인 김종원(金鍾元)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면도하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무섭던지…. 그날 그의 아버지는 시국 강연을 들으러 동네 사람들과 함께 쭐레쭐레 학교 교정에 가서 연설을 듣고 있었다. 연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비가 좀 올랑가?” “금년 농사는 좀 잘되었으면 씨겠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오고 칼을 빼든 군인과 경찰이 시민들을 죽여 한 구덩이에 묻었다. 그래서 자기네 동네에는 제삿날이 모두 같다고 했다. 왜 죽였을까. 정말로 그렇게 죽였을까.
호남의 정치적 유산
지난날 내가 ‘전봉준(全琫準) 평전’을 쓰면서 전북 고창에 들렀을 적에 고창문화원장 이기화(李起華) 선생은 ‘전라도 자랑’의 버전을 들려주었다. 옛날에는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고흥 가서 힘 자랑하지 말랬다”인데 지금은 “고창 가서 양반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보탰다고 한다. 그 뒤로 내가 역마살 낀 사람처럼 호남 땅을 헤매고 다니면서 얻은 신판 호남 자랑을 더 보태자면, 진도 가서 창(唱) 자랑하지 말고, 목포 가서 그림 자랑하지 말고, 전주 가서 글씨 자랑하지 말고, 남원 가서 아미(蛾眉)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호남은 정이 흐르는 예향(藝鄕)이라는 뜻이다.
그런 호남이 왜 그리 가슴 아픈 땅이 되었을까.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 남도 답사기를 먼저 쓴 뒤로 그 책 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지만 호남의 한(恨)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내가 20년 동안 호남 땅을 내 고향보다 더 자주 찾아본 뒤에 얻은 결론은, 호남에 한(恨)이 깊다지만 정확하게 그것은 한이 아니라 원(寃)이었다. 그 둘은 다르다. ‘한’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것(팔자)에 의해 나에게 내려진 아픔, 이를테면 고아나 과부가 되는 것과 같은 불행을 뜻하며, ‘원’이란 인간의 악의(惡意)가 할퀴고 간 상처들, 이를테면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이나 지주의 수탈로 인한 아픔을 뜻한다. 이것이 호남 문화의 유산이다. 전주비빔밥을 자랑하지만 국 한 그릇 떠놓을 형편만 되어도 밥을 비비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남은 풍년에 배곯아 죽는 땅이었다. 여수·순천사건은 그러한 원통함의 한 고리이다.
여수(麗水)는 1948년 기준 인구 15만5000명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좌익적 성향이 강했으나 남로당원의 수는 70~8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46년 5월 경찰서가 서기 이전까지는 치안대가 치안을 유지했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순천(順天)은 15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6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군 병사였으며 2~3개월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무렵 지방정부를 운영하면서 미 군정이 가장 신경 써야 했던 부분은 좌익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었다. 대구사태와 제주4·3사건으로 좌익에 대한 공포가 점차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 군정이 좌익의 섬멸을 구상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계제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朴珍景) 대령의 피살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방경비대의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국방경비대의 숙군(肅軍)과 14연대의 반란
건국 초야에 맞이한 공산주의 발흥에 대해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당혹했다. 국방경비대 정보처장 백선엽(白善燁)은 남로당의 첩자들을 노출시키지 않고서는 군부를 정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용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여수의 제14연대를 가장 위험한 부대로 여기면서 그들이 지리산에 게릴라작전 지역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좌익에 대한 사찰은 제1연대(泰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연대장 이성가(李成佳) 소령은 부대 내에 침투하고 있는 좌익 인사를 색출하고자 김창룡(金昌龍) 소령을 정보주임으로 발탁했다. 김창룡은 함남 영흥 출신으로서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 헌병대 대공 사찰 담당자로 활약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기의 우수생으로 졸업한 뒤 소령에 임관되었다. 그의 별명은 ‘스네이크 김(Snake Kim)’이었다.
14연대는 여수읍 신월리(新月里)의 옛 일본 해군 비행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李永純) 소령은 한 달 남짓 근무하다가 1948년 6월 18일자로 전출되고 제주도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金益烈) 소령이 부임하였으나 좌경 군인으로 의심받던 그도 곧 경질되어 7월 15일 오동기(吳東起) 소령이 부임했다. 오동기는 평소에 군장교의 부패를 개탄하면서 군대의 개혁을 외쳐 오던 터였다. 오동기는 부임하자마자 송호성(宋虎聲) 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공개 입찰로 바꿔 부식의 질을 높이고 장교들에 편중되어 있던 부식비 배정을 모든 장병들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이렇게 하자 그동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기존 상인과 장교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그에게 혁명의용군 음모라는 누명을 씌우는 빌미를 제공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366~367쪽)
여기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승만 계열에서 이 사건을 김구(金九)를 거세하기 위한 작업으로 확산하려고 한 데 있었다. 최능진(崔能鎭) 외 2명에 관한 혁명의용군사건의 공판은 1949년 1월 2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연루자들은 최고 책임자 서세충(徐世忠), 정치 재정 책임자 최능진, 14연대 책임자 오동기, 경비대 책임자 김진섭(金鎭燮), 강원도 원주(原州) 동원 책임자 안종옥(安鍾玉), 춘천(春川) 동원 책임자 박규일(朴奎一) 등으로 발표되었다. 이들은 1947년 12월 하순부터 1948년 9월 22일까지 10회에 걸쳐 밀회를 가지면서 원주와 춘천 부대 병사 200명과 14연대의 응원을 얻어 서울로 진격하여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했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49년 1월 23일)
윤치영(尹致瑛) 내무부 장관의 보고에 따르면 “오동기는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자 남한 정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좌익 계열의 선동과 음모 아래 소련혁명기념일(11월 7일)을 계기로 행동을 전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국회속기록 1949년 10월 27일) 그러나 사실인즉 오동기가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것은 아니었고 연루자 중의 몇몇이 입대할 때 오동기가 보증을 서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오동기를 연루시킨 것은 그가 광복군(光復軍) 출신으로 열렬한 김구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1948년 9월 28일에 송호성의 소환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오동기는 곧 구속되었다. 취조의 내용은 최능진과 관련하여 정부 전복과 반란 음모를 했으므로 사건의 주모자로서 내용과 배후를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동기 소령은 최능진을 한 번도 만나본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박일원(朴馹遠)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일원은 광복 후 공산당 경기도당 청년부장과 박헌영(朴憲永)의 비서를 역임했으나 광복 후에 경찰에 투신하여 좌익의 탄압에 앞장섰다가 남로당 특수대원의 손에 죽었다. 노선을 바꾼 사람이 더 지독하다.
오동기 소령이 구속되어 10년형을 언도받은 뒤 일본군 출신 박승훈(朴勝薰) 중령이 10월 7일자로 14연대장에 부임해 왔다. 연대장이 정부 전복의 혐의로 구속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14연대는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서 1대대가 제주도 토벌 작전에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항하라는 전문 지시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서 상륙용주정(LST)에 선적 작업을 시작하였다.
사건의 전개
10월 19일 오후 9시30분경이 되자 제14연대 내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연대 주임 상사였던 지창수(池昌洙)는 군대 내에 침투해 있던 좌익들과 함께 부대에서 제주도 출병을 위한 장교들의 환송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16명의 장교를 사살했다.(‘하우스만(Hauseman) 증언’·173쪽) 당시 14연대의 3개 대대에는 일제 무기 대신에 M-1 소총이 지급되어 있었는데 파견 명령을 받은 대대가 M-1소총과 자동기관총을 모두 거둬 제주도로 가려 했기 때문에 당초에 지창수 무리에는 무기가 없었다. 이들이 봉기할 당초에 추종한 무리는 4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반란 당시 지창수는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하며, 나아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고 병사들을 선동했다. 오동기 연대장의 체포와 다가오는 숙군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좌익 군인들은 제주도 토벌 작전이라고 하는 마음 내키지 않는 명령에 불복하여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0일 오전 3시에 여수경찰서를 습격 점령한 반란군은 오전 5시가 되자 2000명 정도로 증가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장악한 후 그 세력을 순천 쪽으로 확대해 나아갔다. 이들에게는 제주도 토벌을 위해 미군의 M-1소총과 기관총, 박격포가 새로 지급된 직후였기 때문에 화력이 막강했다.(‘軍과 나’·백선엽·340쪽)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한 반란군과 군경의 교전이 오후 5시경에 끝나면서 순천경찰서는 완전히 반군에 점령당했다. 반란군은 10월 21일 오전 8시경에 유치된 죄수 20여명을 석방하여 경찰에서 노획한 무기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들은 인민군을 편성하여 사령부를 경찰서에, 인민위원회를 민족청년단 사무소에, 인민재판소를 군청에 각각 설치하는 한편 각 공무원과 경찰 가족, 우익정당, 청년 단원 400명을 검거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그들 가운데 간부급은 총살형을 받았고 나머지 100여명은 23일 국군의 진주로 사형 집행 직전에 구출되었는데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의 총살형은 가장 처참했다.(세계일보 1948년 10월 28일)
10월 21일 오후 3시에 여수를 점령한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우익 요인과 경찰관 가족을 살해하고 순천의 경찰서·군청·읍사무소·전기회사·은행 등 공공기관을 접수한 뒤 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하고 간판을 내걸었으며 자칭 계엄령을 선포하여 순천재판소를 인민재판소로 개칭하여 재판을 시작했다.(국회속기록 1949년 10월 27일) 재판은 민간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경찰관, 관리, 지방의 우익 인사, CIC의 첩보원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벌교에서는 한자리에서 67명이 처형되었다.(‘G-2 Weekly Summary’·29 October-5 November 1948)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梧洞島)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日本刀)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31쪽)
초토화작전으로 여수·순천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여수의 함락은 반란의 종식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전개되었다. 물 빠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으며, 정체불명의 편지를 배달했다는 이유로 배달부가 처형되었다. 목포·해남·완도·진도에서는 양민들이 바다에 실려가 돌에 매달린 채 수장되었다.(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1)·165, 288, 229, 258쪽)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의 한 회원은 ‘호박잎 하나 건네준 죄’로 잡혀갔다.(‘順天市史(순천시사)’·818쪽) 종산(鍾山)국민학교에서는 125명을 처형하여 묻어버렸다.(이 학교는 지금의 여수중앙초등학교인데 앞서 이발사가 말한 바로 그 학교이다.) 문중 간의 해묵은 감정을 이유로 처형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자들의 국부를 막대기로 쑤시기도 했다.(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289~323쪽) 나의 저서 미국어판이 출판될 당시 미국 측 편집자는 이 문장이 너무 야만적이어서 문명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표현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They (policemen) violated women with sticks”라고 문장을 바꾸었다. 읽는 이의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군번이 260xxx로 시작되는 청년들도 처형되었는데 이는 14연대 병력의 군번이 260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된 사람도 있지만 당시에 이념의 확신 때문에 인민위원장을 맡은 사람은 없으며 대부분이 구장을 맡는 심정으로 그 직책을 맡았다.
보복은 이듬해에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보복살인 중에서도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대한 살육이 가장 처절했다. 보도연맹은 반공 검사 오제도(吳制道)의 제안으로 1949년 4월 21일에 발의되어(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6월 5일에 결성된 것으로서, 초대 간사장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 조사부장이었던 박우천(朴友千)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을 조직하면서 여기에 가입하면 좌익으로서의 전과를 묻지 않고 애국적인 국민으로서 포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예비 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하기 이전에는 생업에 충실한 양민이 대부분이었다.
해원(解寃)
어느 날 내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구장이 보도연맹에 들라고 하는데 어쩔까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 사람들은 보도연맹이라면 당연히 시국 강연을 하는 보도연맹(報道聯盟·reporting union)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자수한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게 만들어 잘 보호하고 인도하는 모임’, 곧 보도연맹(保導聯盟)으로 안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에 들어가면 비료표도 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별 뜻 없이 보도연맹에 들어가셨고 그날 이후로 사흘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며칠이 지나 밤중에 밖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내다보았더니 마당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놀라 나가 보니 아버지였다.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내가 울며불며 이웃 사람들을 불렀다. 어떤 아주머니는 ‘다야찡’이 좋다 하고 누구는 ‘구아노찡’이 좋다고 했지만 그런 약을 어디에서 구하는지도 몰랐다.(다야찡은 전시 부상병의 지혈제였고 구아노찡은 지사제(止瀉劑)였는데 워낙 위약(僞藥·placebo) 효과가 높아 감기와 골절에도 썼다.)
그때 정씨 아저씨가 말했다. 옛날에 저렇게 고문을 당한 몸에는 오래 썩은 똥물이 좋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와 함께 재래식 변소에 가 똥물을 퍼 용수로 걸러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 깨어나셨다. 아버지는 그때 얻은 골병으로 평생 오만 삭신이 쑤시는 고통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몸이 괴로울 때면 “그때 문광면 지서 주임 장(張)씨가 왜 나를 그렇게 팼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지서 주임은 쉬엄쉬엄 사흘 동안 패며 히죽거렸다고 한다. 그때 생각만 하면 목이 메고 앞이 뿌예진다. 국창(國唱) 박동진(朴東鎭) 선생도 묵은 똥물을 마시고 득음(得音)했다는 수기를 남겼다. 그래서 그분의 창을 들을 때면 아버지 생각이 더욱 절절하다. 그때 맺힌 원통함이 이제까지 내가 독하게 살아온 근력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억울한 일 겪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수·순천사건을 다루면서 가장 거북스러운 대목이 바로 박정희(朴正熙) 연루설이다. 수사 과정에서 방첩대에 끌려온 많은 장교들 가운데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소속의 박정희 중위는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무기징역이라는 기록도 있다. 박정희는 신문 과정에서 이재복(李在福)·이중업(李重業)으로 이어온 한국군 내부의 적색 조직을 백선엽에게 진술했다. 그의 진술에 따라 ‘줄기에 딸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200명의 남로당원이 체포되었다.(‘실록 박정희’·중앙일보 1997년 11월 17일자) 이로써 그는 감형을 받아 6·25전쟁 때 석방되어 군대에 복귀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한림(李翰林) 회상록’(390쪽), ‘장도영(張都暎) 회고록’(신동아 1984년 7월호·133쪽), ‘김정렬(金貞烈) 회고록’(121쪽),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347쪽), ‘하우스만 증언’(34쪽), 이치업 회고록 ‘번개장군’(24쪽) 등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조선일보(1949년 2월 1일자)에도 보도된 바 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10쪽·2001)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를 찔러보는 유희(flirted with communism)에 빠진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치업은 박정희의 동기인 육사 2기생의 80%가 좌익이었다(95쪽)는 말과 함께 그 당시 군부의 좌경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기록했다. 이 문제는 미국의 정가에도 관심거리였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 9일, 미국 대리대사이며 쿠데타 전문가인 그린(Marshall Green)은 그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박정희를 안심시켰다.(‘Korea’s Development under Park Chung Hee’·Kim Hyung-A·71, 360쪽) 이 문제는 흔히 오고가는 이야기인데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말만 더 증폭시킬 일은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당초에 여수·순천사건은 군부 안의 공산주의자들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국가 또는 정부의 전복을 도모한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의 남로당 잔여세력이 남도 끝자락에서 연대 병력으로 ‘공산 혁명’을 추진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민중의 참여와 그들에게 엄청난 아픔을 준 데 대하여 중대장 김지회(金智會)나 지창수는 지리산으로 입산한 이후에 이현상(李鉉相)으로부터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이름으로 심한 질책을 받았다. 이후로 국군 부대의 단위별 명칭에는 ‘4’ 자를 넣지 않는 전통이 세워졌다.
여수·순천사건 이후로 한국은 엄혹한 우익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48년 12월에 공포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었다. 이 법에 따라서 군부에 광범위한 경찰권이 부여되었다. 안호상(安浩相) 문교부 장관은 취임 이후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전국 교원에 대한 사상 경향을 조사하여 전체 교원 가운데 10%인 5000여명을 교직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했다.(연합신문 1949년 1월 23일자) 이어서 3월 8일 서울운동장에서 서울 시내 10만 학도들의 호국단을 결성하여 학생 조직을 연대니 대대로 불렀다.(서울신문 1949년 3월 9일자)
여수·순천에서 5400여명이 죽임을 당했는데(연합신문 1949년 6월 18일자) 그 가운데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설령 모두 빨갱이였다 하더라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어차피 겪어야 할 죽음이 일찍 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서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위에 씌운 너울이 억울하고 정의롭지 않았으며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정당하지 않았다. 원인만 강조하는 것은 결과를 호도하려 함이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우익이었든 좌익이었든 그들에게는 합당한 진혼제가 필요하다. 이 사건은 격동기의 혼란이나 이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민족사의 비극이었으며, 언젠가는 해원(解寃)해야 할 과제이다. 이 사건은 전설도 아니고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소재도 아닌 엄연한 현실이며 잊기에는 아직도 그 모습이 내 눈에 선연하다.
[출처] :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과 석좌교수,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세번의 비국/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