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건너고 언덕배기를 수도 없이 오르는데 등줄기에서는 땀이 모락모락 난다. 벌써 몸이 풀려간다. 눈 덮인 들판은 보리 싹마저 보이지 않으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근디 아부지는 왜 힘들게 복령 캐로 다니신다요?"
"복령은 복조리보다 낫고 당귀, 엉겅퀴, 백지, 삽주, 창출, 백출, 천마, 우슬(牛膝), 백작약, 맥문동, 오미자, 구기자 등 일반 약재를 캐고 따는 것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단다.
그건 니기 엄마가 해도 되고…. 그 중에서 백복령 몇 개 캐는 날이면 노다지 캐는 것과 같지. 한약에서 감초처럼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란다."
잠시 쉬고 나서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비까리'를 지나 평산(平山) '평까끔'에 이르자 굵은 나무는 베어지고 군데군데 꼿꼿하고 날렵한 소나무 밭이 나온다. 응달진 곳이라 밟히는 곳마다 서릿발(霜柱) 기둥이 스르르 미끄러진다. 투명한 소리에 귀마저 싱그러워진다.

두 자(한 자는 30cm)나 되는 긴 창을 얼마나 많이 찔러댔는지 땅에 박힌 부분은 하얗고 둥글게 닳아서 흙 한 줌도 붙지 않게 잘 갈려있다. 꺼내느라 작은 창과 부딪히니 "쨍그랑" 소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T'자 모양의 손잡이를 잡고 양손으로 "푸~욱" 쑤시기를 한 번 두 번 거듭하신다.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매일 산으로 출근을 하셨다. 무쇠로 만든 긴 창을 성냥간(대장간)에 가서 담금질을 해서 녹을 벗겨내니 부러질 일은 없다. 그렇게 날마다 산으로 들어가 나무 뿌리가 뻗어갈 곳을 미리 짐작하고 드넓은 땅을 지뢰 찾듯, 길 잃은 소경이 제 갈 길을 찾아 헤매듯 푹푹
쑤시고 다닌다.
2~3년 전 소나무 밭에 산판(벌목의 사투리)으로 베어진 등걸을 보아 나무
크기를 짐작하고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수간(樹幹)을 셈하여 뿌리가 어느
쪽으로 실하게 뻗쳤을까를 어림셈 하기는 어렵지 않으신가 보다. 가장 실
한 쪽을 골라 방향을 정하고 꾹 눌러 주는 것이 복령 캐기의 기초다. 이어
돌이 나오면 그 자리만 피해 주위를 맴돈다.
백복령(白茯笭)과 적복령(赤茯笭)의 가격 차이는 없던 시절
쌀과 보리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소나무를 베고 난 후 그루터기가 발로 살짝 건드리면 툭 넘어질 때 만들어지는 복령.
나무 두께(胸高直徑)가 10cm 이상 되는 조선소나무(육송, 적송, 미인송,
금강송, 강송, 춘양목) 밑 둥지에서 가장 굵은 뿌리 줄기를 따라 내려간 송
진이 고구마 혹은 못생긴 감자 모양으로 아이들 머리통만큼 큰 것에서 둥
근 고구마 만하게 뭉쳐 있다. 껍질은 타다 만 고구마가 딱딱하게 굳은 껍데
기 같다. 그 안에 송진 결정이 모여 찐득찐득한 진만 빠져 엉겨붙은 덩어리
가 복령이다.
몇 번 들쑤셔 봤다가 없으면 예전에 봐뒀던 다른 산으로 이동을 하여 그 일을 지속한다. 문득 "찐득"하면서도 찰흙보다 더 끈덕지면서 뭔가 잡아당기
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그곳을 파 보면 어김없이 복령이 들어 있다.
부산히 움직이시던 아버지가 아무 발걸음이 없으시더니,
"아야, 이리 좀 와 봐라."
"왜라우? 복령 있간디요?"
"그려. 뭔가 맞히는 게 있당께."
"큰 것인가요?"
"잡아댕기는 힘이 센 것을 보니 솔찬히(꽤, 제법) 큰 것이구만."
"아부지, 저도 이 자리 한번 찔러 볼라요. 그래야 담에 저도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아닌가요."
"잡아채지 말고 위에서 아래로 곧바로 눌러야 한다. 알겄제?"
"예."
자갈 만한 돌을 만나 다시 위치를 조금 옮겨 꾹 눌러 줬다.
손에 찰떡이 묻은 듯 창끝을 끌어당긴다. 송진과 날카로운
창의 만남은 강한 끌림이 있었다.
아버지는 약괭이로 주변을 정리하시더니 속살 같은 가는 흙이 나오자 긴 창으로 조심스럽게 파 들어갔다. 한동안 씨름을 하니 한 움큼 주위로 50여cm 깊이로 파졌다. 서서히 드러나는 정체는 분명 까맣고 단단한 복령이렷다!


도톰한 껍질을 밤 껍데기 까듯 조심히 쥐어뜯고 칼로 이물질을 툭툭 밀어
벗기고는 본격적인 손질을 시작한다.
깨끗한 면을 행주로 닦아 먼지를 제거한 사료 부대를 깔아 놓고 손톱 만한
두께로 일정하게 요리조리 돌려가며 밀어서 깎는다. 마치 세수 비누를 깎
아내는 듯한 좋은 느낌이다. 호롱불이 흔들리는 외풍이 심했던 그 집은 복
령 손질하느라 밤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얇게 깔아 평상 위에 올려 널린 하얀 백복령과 조금은 붉으스
름하면서도 푸석푸석한 적복령이 따로 어울려 지난날 산촌의 겨울은 긴 그
림자 밑에 알알이 말라갔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마음이 먹먹해 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