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칼럼] 독선의 시대, 정치의 실패
광화문·서초동으로 갈라진 광장 / 생각 다르다고 서로 배척·적대 / 정치권 갈등조정 기능 실종 탓 / 조국 거취 결단 내리고 대화할 때
다시 광장이다. 이번엔 둘로 갈렸다. 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조국 법무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보수진영 집회가, 5일 서초동에선 ‘조국 수호’와 검찰개혁을 외치는 진보진영 집회가 열렸다. 이른바 ‘조국 내전’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벌어지는 두 진영 간 말의 전쟁은 섬뜩한 기운이 감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 배척하고 적대한다. 나라가 두 동강 났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목도하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
박완규 논설실장
독선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원래는 ‘독선기신(獨善其身)’, 자기 한 몸의 처신만을 온전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맹자’ 진심 편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는 구절이 있다. 그 후로 뜻이 변질돼 나와 내 편만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독선사회’에서 “정도의 차이일 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이 독선적”이라며 “대한민국은 ‘독선 사회’”라고 규정했다. “날이 갈수록 분열로 온 사회가 찢어지는 ‘사이버 발칸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상대편을 향해 서로 독선적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대지만, 피차 역지사지를 하지 않는 독선 공방 속에서 모든 건 권력 쟁탈의 의지로 환원된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적은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독선”이라는 것이다.
독선을 경계한 선인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다산 정약용은 ‘방산 이도명에게 답함(答方山)’에서 “고개를 내젓고 눈을 감아버려 사람을 막고 저 홀로 선할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군자는 화합하되 한 가지 부류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찌 먼저 경계를 설정해두고 나와 사물을 달리 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중국 명나라 때 유학자 홍자성은 ‘채근담’에서 “이익을 탐하는 것이 마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마음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진 것은 정치의 실패를 말해준다. 정치학자 케네스 미노그는 ‘정치란 무엇인가’에서 “정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러한 일상의 세계를 어렵게나마 지탱하는 것”이라며 “정치란 인간 삶의 총체적 구성 틀을 유지하는 활동”이라고 했다. 정치가 이런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니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서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정치인들까지 거리로 나와 집회에 몇 명 나왔는지 따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어제 야당 대표들과 만나 “분열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 선동의 정치가 위험선에 다다랐다”며 “국민은 국회와 정치권만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는 진영 싸움에 매몰돼 국민을 거리로 내모는 형국이다. 고단한 국민의 일상마저 흔들고 있다”고 했다. 국회가 갈등 조정 기능을 못하고 정치 실종 사태를 부른 것을 지적한 말이다.
‘조국 사태’에 올인하는 정치권은 우리 사회에서 무당파 층이 커지는 현상을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독선이 나라를 망치고 있음을 국민은 모르지 않는다. 정치권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무엇이 선거에 유리한지만 계산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라가 이 모양이 된 데 책임이 큰 집권세력‘이 반성문을 써야 한다. 정치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찾는 일도 그들 몫이다. 장관 하나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 됐는데도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조국이어야 검찰개혁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국민은 납득하지 못한다. 조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데도 그가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현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치적 의견의 차이나 활발한 토론 차원을 넘어서서 깊은 대립의 골로 빠져들거나 모든 정치가 거기에 매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조 장관 거취에 대한 결단을 내리고 정치공간을 되살려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 아닌가. 정치력을 지금 아니면 언제 쓰려는가.
박완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