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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용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고려·조선시대 춘추관 소속의 정1품 관직
고려·조선시대 춘추관 소속의 정1품 관직. 춘추관감사(春秋館監事)라고 하며, 약칭하여 감관사(監館事)라고도 한다. 1325년(충숙왕 12)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이 예문관·춘추관으로 분리되면서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와 함께 새로 설치된 관직으로서 수상이 겸임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인 1389년(공양왕 1)에 예문관·춘추관을 합칭하여 다시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이 때의 관제를 답습한 조선 개국 당시의 관제에 의하면 감관사는 예문춘추관의 최고위 관직으로서 정원이 1원(員)이고, 시중 이상이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 뒤 1401년(태종 원년) 7월의 관제개혁시 예문춘추관은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되었는데, 당시 춘추관의 관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감관사가 다시 설치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409년 기록에 영관사와 함께 감관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1401년의 예문춘추관 분관(分館) 때 다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경국대전≫에 보면 감춘추관사는 품계가 정1품이고, 정원은 2원으로서 좌의정·우의정이 으례 겸임하는 것이었는데, 같은 정1품 관직인 영춘추관사가 영의정이 으례 겸임하는 것이었으므로 서열상 춘추관 제2의 관직이었다.
<<참고문헌>>高麗史<<참고문헌>>太祖實錄<<참고문헌>>太宗實錄<<참고문헌>>經國大典<<참고문헌>>大典會通<<참고문헌>>增補文獻備考
감투
말총이나 가죽·헝겊 등으로 차양 없이 만든 관모
말총이나 가죽·헝겊 등으로 차양 없이 만든 관모. ‘감두(坎頭·甘頭)’라고도 표기하며 턱이 없이 민틋하게 만든다. ≪양자방언 揚子方言≫에는 상자류(箱子類)라 하였고, ≪광운 廣韻≫에는 머리를 덮는 것이라 하였다.
고려 우왕 13년(1387)의 관복개정 때에 낮은 계급의 두식으로 감두가 있어 고려 때에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민이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솜을 두어 방한용으로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제주도에서는 털로 만들어 겨울에 사용하였다.
벼슬하는 것을 ‘감투쓴다’ 하여 벼슬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감투는 관직의 표상인 탕건을 말하는 것으로, 어떻게 해서 감투와 탕건이 혼동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한국복식사연구(柳喜卿, 梨花女子大學校出版部, 1980)
감합무역(勘合貿易)
조선시대 일본·여진 등과 행하던 무역의 한 형태
조선시대 일본·여진 등과 행하던 무역의 한 형태. 감합은 사신의 내왕에 사용되던 확인 표찰제도를 의미한다. 사행(使行)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사행을 빙자해 고의적으로 행해지는 무역을 감합무역이라 한다.
이는 14세기 말 이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공무역의 한 형태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404년부터 150여 년간 지속된 명나라와 일본 막부(幕府) 사이의 감합무역이다.
감합무역의 원리는 전통적인 중화 중심의 관념에 따라 중국의 주변국들이 중국의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역 형태는 외교적 의례와 결합된 것으로 보통 조공무역이라 지칭된다.
조공무역은 주변국의 당사자들에게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본래의 종속적 의미에 상관없이 다투어 행해졌고, 직업 상인들과 해적들까지 조공을 위장하여 몰려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통제책을 강구했는데, 그것이 곧 감합제도였다. 이는 조공을 원하는 주변국들의 통치자들에게 일정한 형태의 확인표, 즉 감합을 미리 발급하여 공식적인 사행에 지참시키고, 진위를 확인하여 상인이나 해적들의 조공 사칭을 방지할 수 있었다.
감합제도는 1383년 샴국에 대하여 처음 쓰기 시작한 이래, 동남아시아 50여 개국에 적용되었다. 감합은 본래 금속·상아·목제 등의 표찰에 글씨를 새긴 뒤 양분하여 한쪽은 보관하고 한쪽은 상대방에 발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문서화하여 원장에 등록하고 계인과 일련 번호를 매겨 발급되었다.
명나라는 연호가 바뀔 때마다(보통은 황제의 교체시) 주변국들에게 새 감합과 저부(底簿)를 보내고 옛 감합과 저부는 회수하였다. 감합은 조공 횟수와 선박의 수 등을 고려하여 발부되었는데, 여기에는 선박·인원·화물의 수와 내왕기간·입항지·조공로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행이나 무역에는 감합의 확인 없이 일반 외교 문서만으로 대체되었다. 조선이 일본이나 여진족에 대해 허용한 무역도 감합무역의 일종으로서, 무역을 외교의 부수 행위로 간주하고 사무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조선의 교역 상대는 일본의 막부 뿐만 아니라 거추(巨酋)인 각 지방의 영주들과 대마도주 등 일본인들과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었다.
조선에서도 통신부(通信符)라는 이름의 감합이 일시적으로 발급되기는 했으나, 보통은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공식 사신의 확인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발급·확인 절차 및 효용면에서 감합과 같은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을 사용하는 무역을 감합무역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주변국들과 행한 감합무역은 무역 그 자체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주변 민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에서 행해졌다.
그 가운데서 특히 왜구의 발호를 제도무역으로 수용하여 그들의 난동을 억제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무역 체제는 1876년(고종 13) 개항으로 근대 무역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世宗實錄<<참고문헌>>世祖實錄<<참고문헌>>成宗實錄<<참고문헌>>增補文獻備考<<참고문헌>>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李鉉淙, 韓國硏究院, 1964)<<참고문헌>>李朝前期의 對日貿易性格(金柄夏, 亞細亞硏究 11-4, 1968)<<참고문헌>>東洋文化史(Fairbank,J.K. 외, 全海宗·高柄翊 譯, 乙酉文化社, 1964)
감합부(勘合符)
조선시대 조선을 왕래하는 일본 사신들에게 지참시킨 확인 표찰
조선시대 조선을 왕래하는 일본 사신들에게 지참시킨 확인 표찰. 국왕사(國王使 : 幕府조정에서 조선에 보내는 사신)와 거추사(巨酋使 : 지방의 영주들이 조선에 보내는 사신)의 사칭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서 발급한 확인표였다. 통신부(通信符)라고도 하였다.
동제(銅製) 또는 상아제의 표찰에 ‘通信符(통신부)’ 또는 ‘朝鮮通信(조선통신)’ 등의 문자를 새긴 다음 중앙을 쪼개어 좌측은 조선에서 보관하고 우측은 일본에 발급하였다. 사신들이 내조할 때는 이를 지참하게 하고, 도착하는 항구에서 양쪽을 맞추어보아 이상이 없을 때만 입국 및 상경을 허용하였다.
감합제도는 명나라에서 시행하던 것으로, 조선에서는 임시로 간간이 발급하기는 했으나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도서(圖書)·서계(書契)·문인(文引) 등의 문서가 조선·일본 간의 외교 및 무역의 확인서로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그 발급·확인 절차 및 기능 면에서 감합과 매우 유사하였다.
현재 일본의 모리가(毛利家)에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동제 통신부 하나가 소장되어 있는데, 지방 영주였던 오우치(大內)에게 교부된 것이다. 세로 5.5㎝, 가로 1.7㎝의 크기로 통신부(通信符)라는 문자를 전자(篆字)로 양각하여 중앙을 세로로 양분한 것의 오른쪽이다.
또 ≪성종실록≫에는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아시카가(足利)에게 감합부를 발급한 기사가 있는데, 1474년(성종 5)에 10개를 제작, 교부했다고 한다.
이것은 원주형의 상아제 통신부로서 한 면에 ‘朝鮮通信(조선통신)’ 한 면에 ‘成化十年甲午(성화10년갑오)’, 양측면에 제1(第一)에서 제10(第十)까지의 일련 번호를 새겼다. 가운데를 세로로 쪼개어 좌측은 조선에 보관하고 우측은 일본에 보내어 사신이 올 때 확인표로 쓰도록 하였다.
<<참고문헌>>成宗實錄<<참고문헌>>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李鉉淙, 韓國硏究院, 1964)<<참고문헌>>李朝前期의 對日貿易 性格(金柄夏, 亞細亞硏究 11-4, 1968)
감합선(勘合船)
조선시대 정부가 허가한 일본인들의 공식 무역선
조선시대 정부가 허가한 일본인들의 공식 무역선. 이들은 우리 정부에서 인정하는 감합(입국확인서), 즉 도서(圖書)를 지참하여야 했는데, 그것은 조선에서 도장을 주어 특허권을 부여한 대마도주(對馬島主) 등 몇몇 일본의 지방토후들이 발행하는 것이었다.
선박의 내왕을 허가하는 감합은 그 수가 극히 제한되었고, 무역은 삼포(三浦 : 부산포·제포·염포)에서만 행하여졌는데, 도서의 원장과 대조하여 감합이 확인되어야 가능하였다.
<<참고문헌>>朝鮮前期對日關係史硏究(李鉉淙, 韓國硏究院, 1964)
감합식(勘合式)
감(勘)은 ‘고증(考證)한다’는 뜻이요, 합(合)은 ‘같다’는 뜻이므로, 공문서(公文書)의 사실여부를 후일 빙고(憑考)할 수 있도록 부계(符契)하는 형식을 말한다[『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280]. 특히 전(錢)·양(粮)·발병(發兵)·발마(發馬)·검미(檢尾)·대벽(大辟) 등에 관한 공문(公文)은 원본에 발송공문(發送公文)을 접어 붙이고 그 이음새 부분에 글자를 쓴 뒤에 도장을 찍어서 반으로 나눔으로써 후일의 고증에 대비하도록 하였다[예전(禮典) 감합식(勘合式)].
감후(監候)
고려시대 기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서운관의 정9품 관직
고려시대 기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서운관(書雲觀)의 정9품 관직. 서운관은 천문·역수(曆數)·측후·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국초에는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태복감은 천문·역수를, 태사국은 측후·각루를 관장하였다.
이 때 감후는 태사국의 최말단에 있으면서 기후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으며, 문종 때의 관제에서는 종9품으로 2인이 있었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관제를 개혁할 때 사천감(국초 태복감의 후신)을 태사국에 병합하여 서운관을 두었는데, 감후는 정9품으로 품질이 오르고 정원도 3인으로 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1362년·1369년·1372년에 문종구제로, 혹은 충렬구제로 돌아가면서 개편이 되풀이되었다. 1392년(태조 1) 신왕조의 관제를 정할 때 서운관에 감후 4원을 두었다가 1420년(세종 2)에 2인으로 줄였다. 1466년(세조 12)의 관제개혁 때 서운관을 관상감(觀象監)으로 고치면서 부봉사(副奉事)로 바뀌어졌다. →서운관
<<참고문헌>>高麗史<<참고문헌>>高麗史節要<<참고문헌>>太祖實錄<<참고문헌>>世宗實錄<<참고문헌>>世祖實錄
갑과(甲科)
문과(文科)[大科]에는 초시(初試)[제1차 시험], 복시(覆試)[제2차 시험], 전시(殿試)[제3차 시험]의 세 차례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서울과 지방에서 초시(初試)에 합격된 자가 서울에서 복시(覆試)를 통하여 33인이 선발되고, 이들을 전시(殿試)에서 갑과(甲科)[3인]·을과(乙科)[7인]·병과(丙科)[23인]로 급제자(及第者)의 등급이 기과기인(幾科幾人)[예: 을과(乙科) 제3인]으로 매겨진다.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문과(文科)의 경우 복시 합격자(覆試合格者) 33인을 전시(殿試)에서 성적에 따라 갑·을·병과(甲乙丙科)로 나누어 등차(等次)를 매겼다. 이때 갑과(甲科)는 장원(壯元)을 포함하여 3인[1등∼3등], 을과(乙科)는 7인[4등∼10등], 병과(丙科)는 23인[11등∼33등]이었다. 문과(文科)의 경우 갑과(甲科) 제1인[壯元]은 종6품직(從六品職)을 주고 그 나머지는 정7품직(正七品職)을 주며, 을과(乙科)는 정8품계(正八品階)를, 병과(丙科)는 정9품계(正九品階)를 주었다. 원래 품계(品階)를 가진 자로서 갑과(甲科) 제1인은 4계(階), 그 나머지는 3계(階)를 올려 주고, 계궁자(階窮者)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 주었다. 을과(乙科)에 급제한 자는 2계(階), 병과(丙科)에 급제한 자는 1계(階)를 올려 주되, 계궁자(階窮者)는 준직(准職)을 주었다. 단 이미 준직(准職)에 있는 자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려 주었다. 이미 올려 줄 품계(品階)가 그에게 응당 주어야 할 품계(品階)와 서로 같거나 미치지 못하면 거기서 1계(階)를 더 올려 주었다.[『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 제과(諸科)] 그런데 국초에는 명(明)을 의식하여 을과(乙科)·병과(丙科)·동진사(同進士)로 구분하던 것을[『세종실록』권 127, 32년 윤1월 정미], 세조(世祖) 12년(1467) 5월부터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로 고쳤다[『세조실록』권 39, 12년 5월 경진]. 중시(重試)합격자는 을과(乙科) 1·2·3등으로 구분하였다[조좌호(曺佐鎬), [학제(學制)와 과거제(科擧制)] 국사편찬위원회편,『한국사』10, 154면, 1977] ☞ 이전(吏典) 주(註) 1050 갑과(甲科) 참조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조선시대의 과거(科擧)에서 전시(殿試)의 성적이 상위의 3등 안에 든 자의 과차(科次)를 말한다. 무과전시(武科殿試)의 과차(科次)는 당초 성적에 따라 1·2·3등으로 칭하였으나, 세종(世宗) 18년 이후 문·무과(文武科) 모두 을과(乙科)·병과(丙科)·동진사(同進士)로 하다가 세조(世祖) 12년부터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로 개칭하였다[윤훈표, [조선초기(朝鮮初期) 무과제도연구(武科制度硏究)] 61면]. 무과(武科)에서 갑과(甲科)로 합격한 사람에게는 백신(白身)인 경우 종7품직(從七品職)이 제수(除授)되었으며, 원래 관품(官品)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1계(階)를 가자(加資)해 주거나 종7품(從七品)보다 1계(階)를 더해 주었다.
갑사(甲士)
조선시대 오위제의 중위에 속했던 군인
조선시대 오위제(五衛制)의 중위(中衛 : 義興衛)에 속했던 군인. 갑사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고, 조선 건국 초에도 태조가 사병적인 성격이 강한 내갑사(內甲士)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갑사는 수하병적(手下兵的)인 군사로서 사위 임무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 뒤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하나의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사병적인 성격의 갑사는 국가의 녹으로 운영되는 기간병으로 정착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 서울의 시위병으로서, 한편으로는 대외적 변경 방비까지 담당하는 정예병으로서 양계갑사(兩界甲士)가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호환(虎患)을 방지하기 위한 착호갑사(捉虎甲士)까지도 설치되었다.
갑사에 입속할 수 있는 요건은, 첫째 대부분 부유한 지배계층의 자제가 아니면 어려웠다. 특히, 기갑사(騎甲士)는 본인이 말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자제나 한량·양인들도 봉족을 받고 갑사가 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며, 실제로 시위패(侍衛牌)·영진군(營鎭軍)·선군(船軍) 등도 취재 시험을 거쳐 갑사가 된 예가 많았다.
둘째, 갑사는 의장 군사의 성격도 겸했으므로 용모가 준수하고 무용이 있는 자만이 입속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부유한 양반자제라 하더라도 시위 군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입속할 수 없었다.
갑사에 대한 시취 제도가 완비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 이후부터이다. 이후 시취는 점차 어려워져갔는데, 신장·힘·기·예를 모두 갖추어야 하는 엄격한 규제가 뒤따랐다. 세조 때도 엄격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등수에 따라 군직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성립되던 성종 때에 오면 이미 갑사의 수가 더욱 많아지고 질도 떨어져 시취도 많이 완화되었다. 갑사의 수는 처음 2,000인에서 점차 증가해갔다. 양계갑사·착호갑사 등으로 종류도 다양해져 1448년(세종 30) 이후에는 7,500인으로 늘어났다.
1475년(성종 6) 이후에는 1만 4800인으로 대폭 증가되어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상번갑사(上番甲士)의 복무 기간이 짧아지고, 번차가 늘어나 당번갑사의 수는 항상 1,000인에서 2,000인 사이가 되었다.
따라서, 갑사수의 변화에 따라 번차를 조절하여 그들에게 지급하는 녹봉은 별로 변동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러한 번차의 조절을 국가재정 면에서 합리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필요한 인원을 그대로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살려나간 것이다.
초기의 갑사는 무반에 포함되어 사직(司直)·부사직(副司直)·부사정(副司正) 등의 품직을 갖는 수록군사(受祿軍士)였다. 그러나 일반 무반직과 달랐던 점은 번상할 때만 녹을 받았다는 점이다.
1410년에 갑사의 직계가 처음 나타나는데, 이 때 갑사 2,000인이던 것을 1,000인을 늘려 3,000인 전원에게 직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인원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고품직을 줄이고 하위직을 늘려 정부 지출의 균형을 잡게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와서는 종전까지 문반에만 있던 정·종9품의 품계가 무반에도 설치되고 여기에 해당하는 사용(司勇)·부사용의 군직이 새로 정비되었다. 이에 따라 다시 고위직에 대한 개혁을 단행, 하향 조정하였다.
임면출척(任免黜陟)을 위한 도목(都目)은 번차에 따라 근무하는 성적 일수에 따라 이루어졌다. 여기서 특히 무예가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으면 만호나 수령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갑사는 조선 초기 의흥삼군부를 중심으로 10위에 골고루 속해 있었다. 그러나 태종 이후 갑사와 비슷한 다른 특수 병의 수가 증가되어 이들은 실직에서 체아직(遞兒職)으로 변해갔다.
군제가 문종 이후에 5위제로 개편됨에 따라 갑사는 1457년(세조 3) 근장(近仗)과 함께 의흥위에 속했다가 1469년(예종 1)에 대졸(隊卒)과 함께 의흥위, 다시 ≪경국대전≫에 와서 보충대와 함께 의흥위에 속하여 중앙군의 기간병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太祖實錄<<참고문헌>>太宗實錄<<참고문헌>>世宗實錄<<참고문헌>>世祖實錄<<참고문헌>>睿宗實錄<<참고문헌>>成宗實錄<<참고문헌>>經國大典<<참고문헌>>朝鮮時代의 軍制硏究(車文燮,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참고문헌>>朝鮮初期兩班硏究(李成茂, 一潮閣, 1980)<<참고문헌>>朝鮮初期의 軍事制度硏究(閔賢九, 韓國硏硏院, 1983)<<참고문헌>>16세기 甲士의 消滅과 正兵立役의 變化(金鐘洙, 國史館論叢 32, 1992)
갑산(甲山)
원래 허천부(虛川府)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의 점거지(占據地)가 되고 자주 병화(兵火)를 겪어서 주민이 없었던 것을 공양왕(恭讓王) 3년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로 삼았었다. 태종(太宗) 13년에 갑산군(甲山郡)으로 되었던 것이 세종(世宗) 19년에 진(鎭)을 설치하여 겸절제사(兼節制使)를 두고, 세조(世祖) 7년에 도호부(都護府)로 되었다.[『세종실록』권 155, 지리지(地理志), 함길도(咸吉道) 갑산군(甲山郡).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9, 갑산(甲山)]
갑인통공(甲寅通共)
조선 1794년(정조 18) 갑인년에 이루어진 통공 발매정책
조선 1794년(정조 18) 갑인년에 이루어진 통공 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특권을 모두 폐지하고, 자유 상인과 수공업자들도 도성 안에서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일종의 상공 유통정책이다.
일찍부터 육의전을 비롯한 서울의 시전상인들은 그들의 조합으로 도중(都中)을 결성하고, 조정으로부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얻어내 도성 안의 상권을 독점, 사상(私商)들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사상들은 시전상인들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종루(鐘樓)나 이들의 금난전권이 행사되지 않는 서울 종로 4가 부근에 있었던 이현(梨峴), 지금 서소문 부근에 있었던 칠패(七牌) 등지에서 상행위를 하여 번창해갔다.
또한,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을 과도하게 사용해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사상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금난전권을 점차 완화시키다가 1787년에 정미통공, 1791년 신해통공에 이어 갑인통공령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통공정책은 정부의 재정궁핍을 보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기도 하지만, 점차 확장하는 서울의 상공업 발전 추세에 따른 불가피한 상공 정책이었다.
이로써 도고(都賈)·문벌세가와 그 하속배·외방부상·강상(江商) 등 자유 상인과 자유 수공업자들은 새로이 전(廛)을 설치하고 육의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자유로이 판매하였다. 또 지방 도시와 연결, 상권(商圈)을 확대시켜 도성 안의 상품 시장은 종전에 비해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반면, 상권을 침해당한 시전상인들은 상업 경영상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상품 매매권을 둘러싼 갖가지 쟁의와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종전에 조정에 대해 졌던 세부담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초엽에는 시전상인들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되자, 통공정책을 폐지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正祖實錄<<참고문헌>>韓國近代經濟史硏究(劉元東, 一志社, 1977)<<참고문헌>>朝鮮後期經濟史硏究(金玉根, 瑞文社, 1977)<<참고문헌>>朝鮮後期에 있어서의 都市商業의 새로운 展開-亂廛을 중심으로-(金泳鎬, 韓國史硏究 2, 1968)
갑장(甲匠)
갑옷을 만드는 장인(匠人)이다.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갑옷을 만드는 장인이다. 일명 조갑장(造甲匠)이라고도 한다. 세종(世宗) 16년(1434)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된 조갑장인(造甲匠人)은 원액(元額) 14명에 29명을 추가하여 모두 43명이었다[『세종실록』권 64, 16년 6월 병진]. 그후 세조(世祖) 6년(1460) 8월에 45명으로 책정되었다가[『세조실록』권 21, 6년 8월 병진],『경국대전(經國大典)』에 35명으로 확정되었다.
갑조선(甲造船)
조선 초기 새로운 조선법에 따라 만든 배
조선 초기 새로운 조선법에 따라 만든 배. 1430년(세종 12) 무렵 중국·유구(琉球)·일본 등 여러 나라의 배는 모두 쇠못을 써서 시일을 두고 건조시켜 견고하고 경쾌하며, 오래도록 물에 떠 있어도 물이 새지 않고, 큰 바람을 만나도 손상됨이 없이 오래도록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군선은 그렇지 못하였다.
중국식 조선법을 본떠 배를 시조(試造)해 본 결과, 그것이 좋다는 것이 판명되어 1434년부터 한때 쇠못을 쓰고 외판(外板)을 이중으로 하는 중국식 조선법을 채택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을 갑선(甲船)·갑조선 또는 복조선(複造船)이라 하고, 재래의 전통적인 우리 나라 조선법에 따라 만든 배를 단조선(單造船)이라 했다.
조선 초기 태종 때에 이미 군선이 속력이 느릴 뿐만 아니라 구조도 견실하지 못하다는 것이 거론되어 그 해결책으로 쾌선(快船)을 써보려 하였고, 귀화왜인(歸化倭人)으로 하여금 일본식 배를 만들게 하여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한편 귀선(龜船) 같은 특수군선의 활용방안도 모색하였다.
세종 때에는 거도선(居刀船)을 활용하게 하는 한편, 〈병선수호법 兵船守護法〉을 만드는 등 군선의 구조개선이 여러 방면으로 모색되다가, 드디어 1434년에 중국식 갑조선을 채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채택에 앞서 조선(造船)을 관장하는 경강사수색(京江司水色)에서는 갑조선 건조법에 따른 시험선을 건조하였다.
1431년에 만든 동자갑선(冬字甲船), 1434년에 만든 왕자갑선(往字甲船)과 월자갑선(月字甲船)이 그것인데, 이 배들은 모두 하체는 철정(鐵釘)과 목정(木釘)을 반반씩 쓰고, 상장(上粧)은 모두 철정을 써서 만들었다. 이 배를 만드는 데 든 철정은 동자갑선이 1,800근, 왕자갑선이 1,900근, 월자갑선이 3,352근이었다.
1434년 가을에는 이 세 척의 시험선을 시험한 결과 왕자갑선이 가장 빠르고, 동자갑선이 그 다음이었으며, 유구의 선장(船匠)이 만든 월자갑선이 가장 느리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전선들을 왕자갑선이나 동자갑선 형태로 건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모처럼 채택된 갑조선 건조법도 문종 때에는 그것이 우리 나라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 거론되어,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단조선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배는 평저선구조(平底船構造)로 일관하여 첨저형선박(尖底型船舶)은 발달하지 못했다.
<<참고문헌>>世宗實錄<<참고문헌>>文宗實錄<<참고문헌>>朝鮮王朝軍船硏究(金在瑾, 서울大學校 韓國文化硏究所, 1976)
갑주(甲胄)
갑옷과 투구. 갑옷에는 쇠로써 미늘[札]을 만들고 수은(水銀)으로써 끼얹고 붉은색 가죽[韎韋]을 사용하여 엮어 만든 수은갑(水銀甲), 그을린 녹피(鹿皮)를 사용하여 엮어 만들고 검은 칠(漆)을 한 유엽갑(柳葉甲), 생저피(生猪皮)로써 미늘을 만들고, 그을린 녹피(鹿皮)를 사용하여 엮어 만든 피갑(皮甲), 철사로써 작은 고리[小環]를 만들어 서로 꿴 쇄자갑(鏁子甲), 쇠미늘[鐵札]과 쇠고리[鐵環]를 서로 사이하여 엮은 경번갑(鏡幡甲), 종이를 접어서 미늘을 만들고, 녹피(鹿皮)로써 엮어 검은 칠을 한 지갑(紙甲) 등이 있었다. 투구는『설문(說文)』에 두무(兜鞪) 곧 머리갑옷[首鎧]이라고 한 것으로서, 쇠로써 만들되, 둘레[簷]가 있는 첨주(簷胄)와 둘레가 없는 원주(圓胄) 두 가지가 있었다[『세종실록』권 133, 오례(五禮) 군례서례(軍禮序例) 병기(兵器)]. 쇄자갑(鏁子甲) 등은 만들기도 어렵고 사어(射御)에도 불편하여 피갑(皮甲)·지갑(紙甲) 등이 선호(選好)되었다[『단종실록』권 10, 2년 3월 무인].
▶출처 : 역주 경국대전 -번역편-(한우근, 이성무, 민현구, 이태진, 권오영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갑옷과 투구. 갑옷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철(鐵)로써 미늘[札]을 만들고 수은(水銀)에 적신 후 말위(靺韋)를 사용하여 편성한 것은 수은갑(水銀甲)이라 하였다. 또 연록피(烟鹿皮)를 사용하여 편성하고 흑칠(黑漆)을 한 것은 유엽갑(柳葉甲)이라 불렀으며, 생저피(生猪皮)로써 미늘을 만들고 연록피(烟鹿皮)를 사용하여 편성한 것은 피갑(皮甲)이라 하였다. 그리고 철사(鐵絲)로써 소환(小環)을 만들어 서로 꿰뚫은 것은 쇄자갑(鏁子甲)이라 하였으며, 철미늘 및 철고리를 서로 계차(階次)를 만들어 사이가 생기게 한 것은 경번갑(鏡幡甲)이라 하였다. 접은 종이[摺紙]로 미늘을 만들고 녹피(鹿皮)를 편성하여 흑칠(黑漆)을 한 것은 지갑(紙甲)이라 하였다. 투구는 설문(說文)에 두무(兜鞪)라고 하였는데, 곧 수개(首鎧)이다. 철(鐵)로써 만들었는데 처마[簷]가 있으면 첨주(簷胄), 처마가 없으면 원첨(圓簷)이라 하였다[『세종실록』권 133, 오례(五禮) 군례서례(軍禮序禮)].
갓((모자))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머리에 쓰던 관모(冠帽).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帽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루어진다.
원래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갓은 형태상으로 볼 때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方笠型〕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平凉子型〕의 두 계열이 있다.
방갓형의 갓으로는 삿갓〔蘆笠〕·방갓〔方笠〕·전모(氈帽) 등이 있다. 패랭이형으로는 패랭이·초립(草笠)·흑립(黑笠)·전립(戰笠)·주립(朱笠)·백립(白笠) 등이 있다. 넓은 의미의 갓이라고 하면 방갓형과 패랭이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일반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을 말한다.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치면서 완성된 흑립은 우리 나라의 전형적인 갓으로 정착되면서 사대부나 서민 모두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형태로 우리 나라 사람의 고유한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의관이 되었다.
갓은 상투 튼 머리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는데, 외출 때나 의례행사 등 의관을 갖추어야 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갓은 흑칠(黑漆)이 본색이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그 색을 달리하였다.
붉은 옷칠을 한 주립은 무관 당상관이 융복(戎服)을 입을 때 착용하였고, 백립은 상복(喪服)에 착용했다. 다만 일반에서는 대상을 지낸 후 담제까지 썼고, 국상(國喪)이 있을 때도 썼다. 의례를 가장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대사회적 용도로 사용했던 갓은 위엄과 체모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갓에 얽힌 여러 이야기는 물론 해학적이며 풍자적인 속담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역 사〕
(1) 고 대 갓의 역사는 멀리 고대에 소급되며, 그 시초형(始初形)은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와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龕神塚) 벽화에 나오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인물에서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갓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 려 고려시대에 와서는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아문(衙門)의 정3품 이하 관원들에게 각기 품수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으로 장식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1374년 4월에는 재상(宰相)·중방(重房)·각문(閣門)이 모두 갓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갓은 재료나 제작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나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다.
(3) 조 선 갓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 한때 백관들이 갓을 쓰고 궁궐에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조로(朝路)에 우설일(雨雪日)이 아닌데도 대소관리(大小官吏)가 착립(着笠)하고 있어 미편(未便)하다.”고 하여,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를 쓰게 되고 갓은 편복(便服)에 착용하게 되었다. 다양했던 관모 중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갓은 특히 양반층에서 즐겨 썼다.
(4) 근 대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賤人層)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함으로써, 의관제도에 귀천의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계속 이어져 민족항일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의관 갖추기를 잃지 않았고,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종 류〕
한자로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기도 하는 갓은 성인남자용으로 그 형태는 위보다 아래가 조금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 즉 모자집과 아래가 약간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양태, 즉 차양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갓끈〔笠纓〕이 있다.
갓은 싸기(갓싸개)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眞絲笠)·음양사립(陰陽絲笠)·음양립(陰陽笠)·포립 (布笠)·마미립(馬尾笠) 등으로 나뉘고,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되었다.
(1) 진사립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한올 입혀서 칠을 한 것으로, 왕이나 귀인이 착용하던 극상품(極上品)이다. 왕이 쓰는 이른바 어립(御笠)에는 은각 밑뿌리에 당사(唐絲)를 물들여서 꼰 홍사(紅絲)를 감는다.
(2) 음양사립 갓모자는 말총으로 곱게 엮고 양태만 죽사에다 촉사를 올려 옻칠한 것이다. 진사립의 다음 등품이며, 은각 밑뿌리에는 청사(靑絲)를 두른다.
(3) 음양립 말총으로 만든 갓모자인 총모자에 양태는 죽사를 쓰나 양태 위는 촉사 대신 생초(生綃)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음양사립 다음 등품이며, 음양립부터 아래 등품의 것은 은각 밑뿌리에 녹사(綠絲)를 두른다.
(4) 포립 총모자와 죽사로 엮은 양태로 되어 있고, 양태 위는 명주나 얇은 베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5) 마미립 종립(鬃笠), 혹은 마종립(馬鬃笠)이라고도 하며, 말총으로 갓모자와 양태를 엮어 만든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종립은 사족(士族)들의 것으로 되어 있고,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에는 당상관 이하는 착용을 금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 중기까지는 당상관 이상에서만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흑립이 사서(士庶)의 통상관모로 일반화되는 동안에도 양태의 크기나 장식·재료 등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흑립의 형태변화〕
시속에 따라 갓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갓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485년(성종 20) 3월 “입자의 모양이 승립(僧笠)과 같으니 이를 개정하라.”고 하는 기록에서부터이다.
당시의 갓은 모자의 정상이 둥그렇고 테가 넓은 형태였다. 연산군 초에는 둥글던 모정(帽頂)이 조금 뾰족하게 변하였고, 이 후부터 모자의 모양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원통형으로 된 것이라 생각된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모자가 높고 양태가 작은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1530년(중종 25) 5월에는 모자의 높이나 양태의 넓이를 절충한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기에는 모자의 높이가 극도로 높아지고 양태는 극히 좁아졌으며, 명종초에는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를 적당히 가감하여 만든 경쾌한 형태의 ‘김순고입자(金舜皐笠子)’가 등장하였다. 그러다가 곧 다시 모자는 점점 낮아지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모양처럼 넓어졌다.
1556년(명종 1) 입제(笠制)의 개정이 다시 논의되었으나, 주로 모자가 낮고 양태는 극히 넓은 형태의 갓이 명종 말기까지 쓰였다. 그러나 선조 때에는 초년부터 모자가 높고 양태가 좁아지기 시작하여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그와 반대로 양태가 극히 넓어지고 모자가 아주 낮아져 안반처럼 넓은 양태에 마치 주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갓이 유행되었다. 넓은 양태의 갓이 인조 말부터는 갑자기 모자도 높아져서 이른바 ‘큰갓’이 되었으며, 효종 때까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또, 숙종 때는 한때 모자가 낮고 양태가 좁은 ‘작은갓〔小笠〕’이 유행했다. 그러나 영·정조 때의 갓은 그 시대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양태가 비교적 넓었다. 거기에 밀화나 호박·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그 멋을 한층 더하였다.
순조 말기에는 양태가 더욱 넓어져서 종전의 어깨를 덮을 정도에서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가 되었는데,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큰갓’은 ‘작은갓’으로 변화되었다. 완고한 것으로만 되어 있던 선비의 의관, 특히 그들이 중히 여기던 갓이 이렇듯 시속에 따라 변천해왔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제작법〕
갓은 질이 좋은 대나무를 아주 가늘게 쪼개어서 실올처럼 가늘고 길게 다듬어서 양태와 모자를 만들어 붙인 다음 싸기를 하고 옻칠하여 완성한다. 따라서, 갓을 완성하는 데는 세 공정을 거치게 된다.
세죽사(細竹絲)나 말총으로 갓모자를 만드는 일과 머리카락같이 가는 대로 양태를 엮는 일, 또 갓방에서 갓모자와 양태를 서로 모아 갓을 완성하는 일로서, 이 세 공정은 각각 따로 행해지는 것이 예사였다.
갓을 모으는 일 중에서는 양태가 아래로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잡는 일, 속칭 ‘버렁잡는다’고 하는 일이 가장 숙련을 요하는 일이다. 제주도의 총모자와 거제도의 양태가 특히 유명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갓(흑립)은 인류가 고안해낸 관모 중 세계에서 으뜸가는 제일 화사한 관모이다. 머리에 얹되 쓴 것 같지도 않게 가볍고, 섬세하게 짜여진 차양 위에 내리쬐는 햇살은 얼굴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워 은근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러면서도 양태가 넓은 갓을 쓰고 좌정하면 이에서 위풍이 당당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갓 제작법은 ‘갓일’이라는 명칭으로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의 기능보유자는 김인(金仁)과 정춘모(鄭春模)이다.
〔장식품〕
(1) 갓 끈 원래는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턱 밑에 매는 실용적 구실을 하던 부분인데, 차츰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장식적인 구실도 겸하였다.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布帛纓), 옥·마노·호박·산호·금패·밀화·수정 등으로 만든 주영(珠纓) 및 대로 만든 죽영(竹纓)이 있다. 갓끈은 갓을 쓰면 일단 턱 밑에서 고정시킨 뒤 내려뜨리지만, 주영·죽영은 그냥 장식으로 길게 가슴 밑까지 내려뜨리고 따로 검은 헝겊 끈으로 고정시키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42년(세종 24) 9월 옥석(玉石)·번옥(燔玉) 및 마노 등으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하고, 향리에게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으로 만든 것조차 금했던 기록이 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는 당상관 이상의 갓끈을 금옥(金玉)으로 제도화하였다. 그런데, 1497년 10월에 “입영(笠纓 : 갓 끈)을 포백(布帛)으로 함이 어떠한가.”라는 왕의 전지(傳旨)에 따라서 한때 주영을 폐지하고 포백영으로 고친 일이 있었다. 1508년(중종 3) 정월에는 “입영의 값이 멋대로 높아지니 폐하자.”는 주청이 있었다.
≪대전후속록≫ 예전 금제조에는 여전히 “마노·호박·명박·산호·청금석(靑金石) 입영은 당상관 외는 일체 금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대전회통≫에도 주영에 관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현존하는 주영의 유품들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 집정시에는 의관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라 입영으로 대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한때 죽영이 유행하기도 했다.
(2) 정자(頂子) 갓의 정상에 장식한 꾸밈새로 증자(0xF994子)라고도 한다. 계급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고려말 공민왕 때 직품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의 정자를 달리 정하여 흑립에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경국대전≫ 예전의장조에 의하면, 대군(大君)은 금정자, 정3품 이상은 은정자이며, 사헌부·사간원의 관원과 관찰사·절도사는 옥정자를 사용하고 감찰(監察)은 수정정자를 사용한다 하였는데, 그 제도는 ≪대전회통≫에 기록된 제도와도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장식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오직 옥로(玉鷺)가 있을 뿐이다. 옥로는 옥으로 백로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서, 갓의 모정에 장식한 옥로립(玉鷺笠)은 시임대신·원임대신·장신(將臣)이 의식 때에 융복이나 군복에 착용했고, 또한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이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갓의 착용이 의례화되는 동시에 일반화되면서 갓을 쓰지 않을 때에는 갓집을 만들어 소중히 보관하였다. 갓집은 흔히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나 장식을 넣어서 아름답게 꾸몄는데, 주로 장농 위에 얹어두고 사용하였으므로 방안치레의 구실도 하였다.
<<참고문헌>>朝鮮王朝實錄<<참고문헌>>大東野乘<<참고문헌>>五洲衍文長箋散考<<참고문헌>>增補文獻備考<<참고문헌>>林下筆記<<참고문헌>>人間文化財(芮庸海, 語文閣, 1963)<<참고문헌>>韓國服飾史(石宙善, 寶晉齋, 1971)<<참고문헌>>韓國의 冠帽(沈載完·李殷昌, 嶺南大學校新羅伽倻文化硏究所,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