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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니 나의 죽음을 아군과 적군에게 알리지 말도록 하라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다.
勿 : 말 물(勹/2)
言 : 말씀 언(言/0)
我 : 나 아(戈/3)
死 : 죽을 사(歹/2)
세계 해군의 지휘관 중에도 가장 우뚝한 성웅 이순신(李舜臣) 장군이라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선을 연파하여 궤멸시킨 세계 최초의 철갑선 거북선 제작이 첫 손 꼽힐 것이다. 이 거북선이 다시 영광을 차지하는 일이 있었다.
미국해군연구소가 2만 6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세계 해군 역사상 7대 명품 군함에 선정된 것이다.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독점하는 이런 업적 외에 장군의 명언 중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많다.
먼저 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게 피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가 있다.
장군의 좌우명으로 전투를 할 때마다 이런 각오였으니 연전연승했으리라. 그 뒤에 따르는 말까지 알아두자. '죽기로 싸운다면 한 사람이 길을 막아도 천 사람을 두렵게 한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이 말은 오자(吳子)의 치병(治兵)편에 요행을 바라면 죽는다는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로 나온다는데 목숨을 건 각오이니 그보다 더욱 비장하다.
나의 죽음(我死)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勿言)고 한 이 말도 숨을 거둘 때까지 오직 왜적에 대한 승전과 나라를 위한 임무 완수의 정신이 투철한 데서 나왔다.
왜적이 장군의 용맹에 겁을 먹은 상태에서 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리어 역습을 하여 아군이 불리해지는 것을 염려했다.
이런 장군도 초기에는 지극히 관운이 없었다. 무과에 급제하고서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의 변방을 15년 동안 전전하다 46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된 것이다. 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이었다.
왜국의 침략이 있을 것에 예상하여 전선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철저한 대비를 했기 때문에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 적선을 불태웠다.
옥포(玉浦)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한산도(閑山島) 대첩과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의 명량(鳴梁)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노량(露梁)에서 철수하던 적선을 대파하고도 유탄에 맞고 말았다.
이 때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는 말을 남기고 바로 숨이 끊어졌다고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등에 기록돼 있다. 그 자리에서 조카인 이완(李莞)이 장군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은 1545년 음력으로 3월 8일이다. 충무공의 높은 충의를 길이 빛내고 후손들에 애국정신을 높이기 위해 기념일로 제정됐다. 기념 행사의 규모가 부침이 있었지만 애국, 희생의 충무공 정신만은 우리 모두가 새길 일이다.
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을 상대가 알면 우리 편이 불리해지므로 그 사실을 숨길 때 쓴다.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전사할 때 한 말이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다.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臣)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순신(李舜臣)장군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학의 선구자인 잠곡(潛谷) 김육(金堉) 신도비명(神道碑銘)과 김범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말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1572년(선조 5) 8월 그의 나이 28세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험당시 병법에 관한 문답(武經)을 하는 가운데 '황석공서(黃石公書)'를 논할 적에 시관(試官)이 묻기를, “장양(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었다고 했는데, 과연 죽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이순신이 답하기를, “한(漢)나라 혜제(惠帝) 6년에 유후(留侯)장양이 죽었다는 내용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적혀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시관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무인(武人)이 능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다가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 지금 함경도 삼수),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 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공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라 매번 재지(才智)가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율곡(栗谷)이이(李珥) 선생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적에 서애를 통하여 공을 만나 보기를 청했으나, 공은 만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같은 문중 사람이니 만나 보아도 괜찮겠지만, 인사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니,만나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공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로 있을 적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어서 공을 맞이하여 사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어찌 세도가(勢道家)에 발을 붙이겠는가?” 하고, 그 자리에서 중매쟁이를 쫓아 버렸다.
1587년(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오므로,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내고 그 괴수를 쏘아 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의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 군관(軍官)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가두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은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고 죄를 인 채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년 2월 진도군수(종4품)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음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됨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움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함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 중인 사천으로 달려감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함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음
*6월 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감
*일본수군들은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함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함
*당항포 내만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음.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됨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7척과도 합세함
*그는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함
*한산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의 적선을 격파함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림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음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됨
공이 별도로 5백 석의 쌀을 모아 봉해 두자,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 것인가를 물으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신데, 만일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게 된다면, 배를 가지고 가서 임금을 모시고 와 나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 이것은 그때 임금이 드실 양식으로 쓸 것이다.” 하였는 바 생각의 원대한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 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 분(芬), 아들 울(蔚; 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 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됨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됨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림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섬
남해(南海)의 적이 노량(露梁)에 와서 정박해 있는 자가 무수히 많았는데, 공이 도독 진린과 함께 밤 2경(更)에 출발하면서 하늘에 빌기를, “이 왜적들을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문득 큰 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니,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이상하게 여겼다.
南海之賊來泊於露梁者無數, 公與都督, 二更, 同發, 祝曰; 此讎若除, 死亦無憾. 忽有大星, 隕於海中, 見者驚異.
4경에 왜적을 만나 큰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침에 이르러서 크게 깨뜨리고 적선 2백여 척을 불질렀다.
四更, 遇賊大戰, 至朝大破之, 焚二百餘艘.
이어 남해(南海) 지경까지 추격하여 직접 화살과 포탄을 무릅쓰고 싸움을 독려하던 중에 날아드는 탄환에 맞았다.
追至南海界, 親犯失石而督戰, 有飛丸中公.
좌우에서 공을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공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숨지니, 향년(享年) 54세였다.
左右扶入帳中, 公曰; 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終, 年五十四.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린(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실록 1598. 11.27)
영구를 아산(牙山)으로 돌려 올 적에는 모든 백성들과 선비들이 울부짖으면서 제사를 올렸는데, 천 리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임금은 즉시 제관(祭官)을 보내어 조상(弔喪)하고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04년 선조 37년)에 1등 공신에 이름을 올려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하였으며,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좌수영(左水營) 근처에 사당을 세워 충민사(忠愍祠)라 사액(賜額)하였으며, 호남 사람들은 수영의 동쪽 산마루에 비석을 세워 슬피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2월에 아산의 빙항(氷項) 선영이 있는 곳에 장사지냈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김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함
▶️ 勿(말 물, 털 몰)은 ❶상형문자로 장대 끝에 세 개의 기(旗)가 달려 있는 모양으로, 음(音)을 빌어 부정, 금지의 뜻의 어조사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勿자는 ‘말다’나 ‘아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여기서 ‘말다’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아라’라는 뜻이다. 勿자는 勹(쌀 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싸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勿자를 보면 刀(칼 도)자 주위로 점이 찍혀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칼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勿자는 이렇게 칼을 내리치는 모습에서 ‘~하지 말아라’와 같은 금지를 뜻을 나타내고 있다. 파편이 주변으로 튀는 것을 나무라던 것이다. 그래서 勿(물, 몰)은 ①말다, 말라, 말아라 ②아니다, 없다 ③아니하다 ④근심하는 모양 ⑤창황(惝怳)한 모양, 부지런히 힘쓰는 모양 ⑥분주(奔走)한 모양, 그리고 ⓐ먼지를 털다(몰)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말할 것도 없음을 물론(勿論), 하려던 일을 그만 둠을 물시(勿施), 생각하지 말음을 물념(勿念), 개개거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함을 물침(勿侵), 내버려 두고 다시 묻지 아니함을 물문(勿問), 적용하지 아니함을 물용(勿用), 들어가거나 들어오지 마시오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물입(勿入), 조심성이나 삼감이 없음을 물렴(勿廉), 가리지 아니함을 물간(勿揀), 받아들이지 아니함을 물봉(勿捧), 새어 나가지 않게 함을 물설(勿洩),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음을 물실호기(勿失好機), 조그만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물경소사(勿輕小事), 은사를 입지 못할 무거운 죄를 물간사전(勿揀赦前), 작은 일에 정성을 드리지 않는 일을 물성소사(勿誠小事), 약을 쓰지 아니하여도 병이 저절로 나음을 물약자효(勿藥自效), 비밀한 일이나 또는 상스러운 일이어서 들어 말할 것이 없음을 물위거론(勿爲擧論), 증인으로서 물어 볼 수 없음을 물위증질(勿爲證質), 기밀한 일을 공포하지 아니함을 물출조보(勿出朝報) 등에 쓰인다.
▶️ 言(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은 ❶회의문자로 辛(신)과 口(구)의 합자(合字)이다. 辛(신)은 쥘손이 있는 날붙이의 상형이고, 口(구)는 맹세의 문서의 뜻이다. 불신이 있을 때에는 죄를 받을 것을 전제로 한 맹세로, 삼가 말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言자는 ‘말씀’이나 ‘말’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言자의 갑골문을 보면 口(입 구)자 위로 나팔과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생황(笙簧)이라고 하는 악기의 일종을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고 나팔을 부는 모습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言자는 이렇게 입에서 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부수로 쓰일 때는 ‘말하다’와 관계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갑골문에서의 言자는 ‘소리’나 ‘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래서 금문에서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여기에 획을 하나 그은 音(소리 음)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言(언, 은)은 ①말씀, 말 ②견해(見解), 의견(意見) ③글 ④언론(言論) ⑤맹세(盟誓)의 말 ⑥호령(號令) ⑦하소연(딱한 사정 따위를 간곡히 호소함) ⑧건의(建議), 계책(計策) ⑨허물, 잘못 ⑩혐극(嫌隙: 서로 꺼리고 싫어하여 생긴 틈) ⑪이에 ⑫요컨대, 다시 말하면 ⑬여쭈다, 묻다 ⑭기재하다, 적어넣다 ⑮소송하다 ⑯이간하다(離間; 헐뜯어 서로 멀어지게 하다) ⑰알리다 ⑱예측하다 ⑲말하다 ⑳조문하다, 위문하다 그리고 ⓐ화기애애 하다(은) ⓑ화기애애 하면서 삼가는 모양(은) ⓒ위엄(威嚴)이 있는 모양(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어(語), 말씀 담(談), 말씀 사(辭), 말씀 변(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글월 문(文), 호반 무(武),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말로나 글로써 자기의 의사를 발표하는 일을 언론(言論), 어떤 일과 관련하여 말함을 언급(言及),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나 글자로 나타내는 수단을 언어(言語), 말과 행동을 언행(言行),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언중(言衆),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입으로 나타내는 소리를 언사(言辭), 말로 한 약속을 언약(言約), 말을 잘 하는 재주를 언변(言辯), 입담 좋게 말을 잘 하는 재주를 언설(言舌),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상대자가 한 말을 뒤에 자기가 할 말의 증거로 삼음을 언질(言質), 말과 글을 언문(言文),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언중유골(言中有骨), 여러 말을 서로 주고 받음을 언거언래(言去言來), 서로 변론 하느라고 말이 옥신각신 함을 언삼어사(言三語四), 말하고 웃는 것이 태연하다는 언소자약(言笑自若) 등에 쓰인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사회부연(死灰復燃), 이미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