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분양제 도입, 분양원가 공개, 공공택지의 추첨 공급 폐지 및 경쟁 입찰제 도입….
이 방안들은 최근 분양원가 공개 논란을 주도하고 있는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이미 행정법원이나 감사원 등에서도 수차례 대안으로 제시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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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교통부가 공동주택건설용지를 추첨 방식으로 공급하도록 규정한 취지는 아파트 분양 가격이 자율화되기 이전에 택지를 주택건설업체에 싸게 공급해 아파트 분양가 상승을 막고 주택 수요자에게 값 싼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결과는 엉뚱하게 분양가를 올려 개발이익을 부풀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98년말 이후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이후 수도권 일부 지역의 택지를 싸게 공급받은 주택건설업체들은 건교부의 취지와 달리 분양가를 높게 매겨 적정한 수준 이상의 개발이익을 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수도권 등 투기 예상 지역의 공동주택건설용지의 매각은 경쟁입찰 등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대한주택공사 등 용지 공급자가 얻는 개발이익은 국민임대주택 건설재원이나 택지개발지구 기반시설비 등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설교통부는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이후에도 종전 규정을 고집하고 있다. 그 결과 주택업체들에게 과도한 이익과 특혜가 돌아가고 있다. 용인죽전 등 두 개 지구 4개 주택건설업체는 2226세대를 분양하면서 1603억원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고, 일부 주택건설업체는 추첨으로 공급받은 택지를 다른 업체에 넘겨 손쉽게 차익을 실현하고 있다.
건교부 장관은 경쟁입찰 등 방식으로 공급하고 경쟁입찰을 통하여 용지 공급자가 얻게 되는 개발이익을 국민임대주택 건설재원 등 공익을 위해 사용하는 방안을 강구하시기 바람.”(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수정, 요약하였음)
감사원 지적도 귓등으로 흘려듣는 정부
'21회 차관회의 회의록'. 앞의 다른 안건에 대해서는 발언 주체(빨간 색 표시 부분)를 밝히고 있지만 문제의 택지개발촉진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서는 발언자별 소개 없이 토의 결과(파란 테두리 부분)만 요약해 싣고 있다. 사진=김준진기자
감사원이 2002년 12월 건교부에 시정을 요구하며 통보한 내용이다. 감사원은 용인죽전 택지지구 등 공공택지개발지구의 추첨 공급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택지 공급 방식을 경쟁입찰 등의 방식으로 바꿀 것을 건교부에 요구했다. 감사원의 지적에 대해 건교부는 택지개발촉진법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몇 달 뒤 이를 스스로 폐기했다. 2003년 5월 31일 열린 정부 부처별 합동회의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 회의 내용을 기록한 ‘21회 차관회의 회의록’을 보자.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최재덕 건교부 차관이 이 규정에 대한 제안설명을 한 뒤 관계 부처 차관들이 토론을 벌인 것으로 돼 있다. 회의록에는 토의 내용과 관련, “(문제의 규정은) 부동산 안정대책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당분간 개정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관계 부처 의견을 수용해 이를 삭제해 의결할 것을 제안함”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감사원이 “부동산 안정 효과가 없다”며 시정을 요구한 사항을 관계 부처 등이 ‘부동산 안정’이라는 명목 아래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회의록 작성 과정은 더욱 석연치 않다. 차관회의 회의록은 통상 토의 내용을 발언자별로 소개한다. 그러나 유독 이 안건에 관해서는 발언자별 의견이 소개되지 않고 토의결과만 적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 책임 소재를 흐리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행정법원 “주공의 분양원가 공개 타당하다”,,,대통령은 "분양원가 공개 '장사의 원리'에 안 맞아
서울 행정법원은 2000년 ‘분양원가 산출 내역은 분양가격의 결정이 타당하게 이뤄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료이므로 해당 분양자들은 당연히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가 2000년 1월 서울 중계주공 7단지 아파트분양대책위원회가 제기한 ‘분양원가산출내역 및 용지보상내역에 관한 정보’ 청구 소송에 대해 내린 판결(사건번호 99구19984)에서다.
당시 법원은 주공이 제기한 비공개 사유에 대해 조목조목 ‘이유 없다’고 결정했다. 당시 주공의 원가공개 요구 거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분양원가는 영업상 비밀에 관한 것이고, 둘째 원가산출내역이 공개되면 원가가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기존 입주자들이 불만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원가공개로 분양가가 내려가면 사업의 축소가 불가피해 업무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분양원가 공개 논란이 불거지면서 주공과 건교부 등이 내놓은 공개 불가 이유와 사실상 같은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원가산출내역은 영업상의 비밀에 해당한다거나 주공의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볼 사정도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위 문서들이 공개됨으로 인해 분양원가 산출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공공기관이 내부적으로 빠지기 쉬운 행정편의주의와 형식주의 및 권한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는데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해 공공기관의 주택정책에 대한 투명성과 행정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주공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 같은 판결은 주공과 건교부 등 최근 정부가 한 목소리로 내놓는 분양원가 공개 불가 방침이 설득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달 주공의 분양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어긋난다’며 원가 공개 반대 방침을 분명히 해 여론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건교부, 대통령 지시한 후분양제 도입 형식적으로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지난 달 9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분양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안 맞다"고 확언했다.[사진=연합뉴스]
심지어 건교부는 대통령의 지시 사항조차도 충실히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현 정부 들어 노 대통령이 도입을 지시한 아파트 후분양제 도입 방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건교부는 노대통령의 후분양제 도입 지시와 관련, 지난 3월 ‘아파트 후분양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실효성이 크게 떨어지는 ‘생색내기용’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당초 건교부는 노대통령 취임 직후 업무보고 내용에 후분양제 관련 내용을 전혀 거론조차 하지 않다가 “단기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우면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목표연도를 세우라”는 대통령의 강한 질책을 받고 나서야 움직였다.
그런 질책을 받은 뒤 1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후분양제 실시 방안은 건교부가 마지못해 시늉만 한 기색이 역력하다.
건교부는 이 방안에서 주택공사와 시도별 도시개발공사, 수자원공사 등 공기업은 올해부터 단계적으로 도입, 2011년 이후에나 후분양제를 전면 실시하도록 했다. 노대통령이 퇴임하는 2007년경에 후분양제를 실시하는 주택 규모는 1000가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주택기금 우대지원 및 공공택지 우선공급 등의 인센티브를 주되 ‘업계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좀더 자세히 뜯어보자. 먼저 정부는 공공부문의 경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시범지역을 선정해 후분양을 실시하겠다며 올해에는 주택공사에서 인천 동양지구에, 서울시에서 장지·발산 지구 내 일부단지에서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천 동양지구는 올해 택지조성을 시작하면 2006년 5월경이나 아파트를 완공할 수 있어 빨라야 2006년초에 후분양을 실시할 수 있다. 서울시 경우는 끼워맞추기식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서울시는 자체 자금을 가지고 택지개발 지구내 원주민이나 다른 사업지구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특별공급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상암 7단지 분양사업만 빼고는 모두 원래부터 후분양 방식으로 공급해오고 있었기 때문. 늘 해오던 것을 새삼스럽게 시범사업이라고 포장한 것에 불과한 셈이다.
민간 부문도 후분양제의 실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건교부는 국민주택기금으로 우대지원하는 대상은 공정률을 단계적으로 높여나가 점진적으로 후분양제 실시를 유도한다는 방침이지만, 대부분의 건설업체들이 국민주택기금을 지원받지 않고 있어 이에 따를 이유가 없기 때문. 업계에서는 “기금을 통해 후분양으로 유도하겠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는 평이 중론이다.
경실련 관계자는 “사실상 시늉만 하다가 정권이 바뀌면 어물쩡 넘어가겠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건교부의 후분양제 도입 방안이 실효성이 없음을 뒤늦게 알게된 당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은 "우리를 속이려 하다니..."라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으나 이 방안은 수정되지 못했다.
한편 건교부는 이와 관련,“선분양 방식을 일시에 후분양으로 전환하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후분양제를 활성화할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사실 아파트 후분양제 도입 시도는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95년 아파트 선분양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감사원의 권고에 따라 정부가 97년부터 시장원리에 맞게 후분양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지만 이후 주택업계의 반발에 밀려 결국 흐지부지됐다.
건교부, 새 정부 출범 때마다 비슷한 개혁방안 되풀이,,,실천은 없이 예산만 낭비
지난 해 5월말 건교부당정협의회에서 당시 최종찬장관(왼쪽)과 민주당 정세균 정책위의장이 환담하고 있다. 최장관은 스스로 만든 계획안을 실행하지 못했다.[사진=연합뉴스]
정부는 그동안 각종 건설개혁 정책을 내놓았지만 제대로 정책으로 밀고 나간 적은 드물었다. 건교부는 현 정부 출범 초인 지난해 2월 건설산업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국제기준과 시장원리에 충실한 건설시스템 구축 △건설산업의 건전한 발전기반 구축 △세계 선진수준의 국제경쟁력 확보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건교부는 이전에도 비슷한 계획들을 새 정권이 출범하거나 대형 건설사고가 터져 여론의 질타가 쏟아질 때마다 어김없이 내놓았지만 실천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건교부는 91년 3월 팔당대교 붕괴와 92년 7월 신행주대교 붕괴, 93년 1월 청주 우암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자 정부는 각계인사로 부정방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건설부조리 실태 및 방지대책’을 내놓았다. 95년 6월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계기로 ‘부실방지 및 건설산업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건교부는 IMF 외환위기를 거친 뒤인 99년 경실련 등 시민단체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2년까지 공공건설 예산의 20% 절감을 목표로 ‘공공사업 효율화 추진단’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후 전혀 실천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건교부차관으로서 계획안 작성을 주도했던 최종찬 전 건교부장관은 지난해 자신의 장관 재임 시절에도 이 같은 방안을 실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건교부, 국무총리실, 부패방지위원회, 감사원 등에서는 건설부패 근절과 건설산업 경쟁력 강화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수없이 개최하고 많은 용역 보고서를 내놓았다. 내용들은 대부분 지난 해 건설산업진흥 기본계획에 담겨있는 것과 비슷한 것들이다. 결국 건교부는 ‘정답’을 알면서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각종 계획서 작성과 위원회 구성으로 예산만 낭비한 셈이다.
경실련 김헌동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장은 “건교부는 새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형식적으로 일하는 시늉을 하다 대통령이 잊어버리면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행태를 반복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관료들은 30년동안 한 자리를 지키는데 비해 대통령의 임기는 5년밖에 안 되니 관료들은 스스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며 “퇴임 후에도 대형건설업체의 임원이나 관련 협회, 토공이나 주공 등 공기업에 포진하는 건교부 관료들이 누구의 이해를 반영하겠느냐”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