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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17일
일본 고베지역을 중심으로
한 긴키 지역 대규모 지진 발생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46분 일본 효
고현(兵庫縣) 남부 긴키(近畿)지방에 매
그니튜드 진도 7.2의 지진이 강타해 미항
고베가 일시에 쑥밭이 되었고 5천5백명의
사망자와 4만명의 부상자에 이재민이 30
만명, 재산피해가 9조6천억엔에 이르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참사 이후 최악의 도
심 지진으로 기록된 이번 지진으로 오사카
(大阪)와 고베(神戶)를 연결하는 한신고속
도로의 고베선에서 약 5백m에 달하는고가
도로가 무너지는 등 도로 7개소가 끊어졌
으며 신간선을 비롯한 국철, 사철, 지하철
등 주요 교통수단이 두절돼 큰 혼란을 빚었
다. 진앙지가 고베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아와지섬이었고 진앙지 깊이가 지
표에서 불과 20km 밑이어서 고베와 오사
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 일대에 특히 큰
피해를 냈다.
엄청난 인명 및 재산피해에도 불구하고 성
숙된 시민의식과 의연한 사태수습을 보여
준 시민들의 모습에 세계 언론들은 놀라움
을 표시했다.
▶2010년 칠레, 20년만에 우파 대통령 당선
중도우파 야당연합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
▶2010년 '러브 스토리' 작가 에릭 시걸 타계
▶2002년 콩고 화산폭발, 45만명 대피
2002년 1월 17일 콩고민주공화국(DRC) 내 고마市의 니라공고 화산이 폭발해 주민 45명이 숨지고 45만여 명이 긴급 대피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니라공고 화산이 폭발하면서 폭 50m에 달하는 용암이 고마 시내를 덮쳐 시 전체가 파괴되고 용암이 인근 키부호(湖)로 흘러 들면서, 수질이 오염되고 호수 바닥의 메탄 가스가 대기로 분출돼 반경 30km까지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나온 용암이 고마시를
뒤덮은 뒤 인근 키부 호수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나온 용암이 고마시를 뒤덮은 뒤 인근 키부 호수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1월 21일에는 니라공고 화산 폭발로 도시 절반이 파괴된 고마시에 화산 분출이 재개되고 수차례 강진이 발생했다. 한편 고마시 동부의 한 주유소가 흘러든 용암에 폭발해 연료를 모으던 최고 100여명이 숨지는 사건이 이어졌다. 또 화산폭발로 인접국인 르완다의 기세니로 대피했던 난민들이 귀환하면서 콜레라의 집단발병 등 삼중고를 겪었다. 니라공고 화산은 1977년 1월 10일에도 폭발해, 30분 만에 약 2000명의 주민의 목숨을 앗아간 바 있다.
▶2001년 한국, 사거리 500㎞ 미사일 보유 가능
2000년 8월 초 괌에 배치된 크루즈 미사일.
▶1998년 북한, 연속극 ‘진달래꽃 필 때까지’
북한은 17일 KBS가 방영중인 연속극 ‘진달래꽃 필 때까지’ 를 즉각 중단하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다.
내외통신은 이날 북한이 대남선전용 평양방송 논평을 통해 “남조선괴뢰들이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 끝내 텔레비전 연속국 ‘진달래꽃 필 때까지’ 를 만들어 방영하고 있다” 면서 “우리는 이것을우리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 정치적 선전포고로 간주해 도발자들에게 이미 필요한 계산을 해놓고 있다” 고 방송이 계속될 경우 보복을 가할 것임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평양방송은 이어 “남조선 당국이 우리의 방송중단 요구를 무시하고 새해 벽두부터 반북 모략극을 만들어 방영, 남북관계를 또 다시 대결의 극한점으로 몰아가고 있다” 고 비난하며 “연속극 방영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때 그로부터 생겨나는 후과는 남조선 당국과 당사자들이 책임을 져야 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귀순 무용수 신영희씨의 삶을 다룬 KBS 드라마
‘진달래꽃 필 때까지’ 중 한 장면. 왼쪽에서 두번째가
극중 신씨 역을 맡은 탤런트 염정아.
중단하지 않으면 보복조치 취하겠다 협박
▶1998년 미 클린턴대통령, 6시간동안 `성희롱 증언`
▶1997년 `명왕성` 발견한 천문학자 톰보 사망
▶1994년 LA에 진도 6.6의 지진 강타
▶1994년 한국-스페인, 투자보장협정-
경제협력협정-문화협력협정 체결
▶1991년 노르웨이의 왕 울라프 5세 사망
▶1991년 33개 다국적군,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공중폭격 개시
미국 등 다국적군이 이라크 주요시설에 대해
대 공습을 시작함으로써 걸프전이 시작됐다.
▶1983년 남미농업이민 중단
▶1982년 미국 해군, 트라이던트 미사일 수중발사 성공
▶1981년 민주한국당 창당
▶1981년 필리핀 8년 만에 계엄 해제
▶1974년 항일투사 박열 사망
항일투사 박열이 1974년 1월 17일 북한에서 사망했다. 박열은 경북 문경출신으로 1919년 일본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운동에 뛰어들었고 1921년 사회주의 비밀결사 흑도회를 조직했다.
1922년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다음해 일본인 애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실행하려다 체포돼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같은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가네코는 그해 7월 옥중에서 자살했고, 박열은 1945년 해방과 함께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되어 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27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열(오른쪽)과 그의 애인 가네코 후미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귀국, 6.25전쟁때 납북돼 1974년 오늘 북한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 이 있다.
▶1973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광주권 지정
▶1971년 英 항해가 프란시스 치체스터 대서양 요트 횡단
▶1964년 파나마 운하 분쟁으로 미국과 파나마 단교
▶1955년 한미군원의정서 조인
▶1955년 세계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 시운전
1954년 1월 21일 진수된 세계최초의 미국 원자력잠수함 노틸러스가 1955년 1월 17일 시운전에 성공했다. 오전 11시 노틸러스는 보조용 전지 힘으로 조용히 조선소 암벽을 떠났다. 총 배수량 3,500톤, 이제까지 잠수함의 2배 크기였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 (1954-1980)
1955년 5월 노틸러스는 능력시험항해를 행해 20노트 이상의 수중평균속도, 90시간 연속잠행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이제까지의 디젤 잠수함은 거대한 전지를 축전해 그 전력으로 수중을 운항했기 때문에 평균 4-7노트밖에 안돼 다른 함선에 비교하면 속도가 늦었다. 게다가 전지도 1시간정도밖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충전하기 위해서는 수면위로 부상한다든지 흡기통을 길게 늘여야 했으므로 잠수함으로는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세계최초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의 진수식.
▶1951년 한국, 국제전신연맹 가입
▶1948년 시인 고정희 출생
▶1943년 한국정신대 조직, 징용 강화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인력부족이 격화되자 징용제도·징병제도·근로보국대제도·근로동원제도·여자정신대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인력을 강제수탈하였다.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 집단 동원하더니,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 <국민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 연행해다가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태평양전쟁 이후 징용영장에 의한 징용이 잘 안되자 트럭을 농촌에 몰고 가서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강제로 실어다가 징용에 보내는 만행을 예사로 자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까지 146만명의 한국인 청장년을 징용하여 광산·토목공사·군수공장에 투입하여 무보수 노예노동을 시켰다.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0년대 남녀 각 조직에 정신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실제 조선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법령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원래 남성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미혼여성을 일본과 국내의 군수공장 등에 강제 취역시켰는데 일종의 민간인 노동부대인 이들을 정신대라고 한다. 원칙적으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제도는 다른 것이었다.
조선여성들은 학교·공장·농촌에서 무자비하게 끌려가, 인도·타이·버마·인도네시아 등 태평양 일대의 섬과 중국으로 보내졌으며, 낮에는 탄약운반·취사요원·세탁부·간호부로, 밤에는 위안부로 혹사당했을 뿐아니라, 정신대에서 직접 위안부로 넘겨진 사례도 많았다.
▶1942년 미국 프로 복싱 선수 무하마드 알리 출생
알리 [Ali, Muhammad, 1942.1.17~ ]
본명은 Cassius Marcellus Clay. 미국의 프로 복싱 선수.
3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된 유일무이한 복싱 선수이다. 아마추어 시절인 1960년에 미국 아마추어 경기연맹(AAU) 주최 복싱 대회 라이트 헤비급, 골든 글러브 대회 헤비급, 올림픽 대회 라이트 헤비급에서 각각 우승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얼마 후 프로로 전향해서 1964년 2월 25일 소니 리스턴에게 7회 KO승을 거두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뛰어난 반사신경 및 훌륭한 손과 발의 조화, 그리고 잘 단련된 방어기술 등을 갖춘 알리는 1965~67년 9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1967년 2월 6일에는 세계권투협회(WBA) 챔피언인 어니 터렐을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챔피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종종 엉터리 시구(詩句)로 자신이 무적(無敵)임을 주장했고, "내가 최고다"라는 개인적인 슬로건을 떠벌리고 다녔다. 블랙 무슬림(주로 미국의 흑인들로 구성된 이슬람교 교리 옹호 단체)에 가입하고 이슬람교도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1967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군역선발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되어 링에서 추방되고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그 유죄판결은 결국 1971년에 대법원에 의해 파기되었다.
한편 알리는 1970년 복싱을 다시 시작해서 2명의 선수와 도전자 결정전을 벌여 승리했으나, 1971년 3월 8일 헤비급 챔피언인 조 프레이저에게 15회 판정패 당했다. 그후 약 3년 동안 알리는 제리 쿼리, 잠시 컴백을 시도한 플로이드 패터슨, 조 버그너, 켄 노턴 등과 싸웠다. 마침내 알리는 1974년 1월 28일 프레이저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새로운 챔피언인 조지 포먼과 싸우게 되었다. 1974년 10월 30일 포먼을 8회에 KO시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알리는 1978년 2월 15일 7차 타이틀 방어전에서 리언 스핑크스에게 판정패했다. 7개월 후 알리는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스핑크스로부터 WBA 타이틀을 재탈환함으로써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3번이나 획득하는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79년 알리는 은퇴를 선언했는데, 당시 그의 전적은 59전 56승 3패였다. 1980년 다시 링으로 돌아와 세계권투평의회(WBC) 세계 챔피언인 래리 홈스와, 1981년에는 캐나다의 트레버 버빅과 재기전을 가졌으나 모두 패했다.
1984년 '펀치드렁크' 증후군 또는 만성 복서 뇌증 등 복합적인 일련의 증상으로 알리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알리의 증세는 말더듬증·안면근육마비·균형감각상실·보행장애 등이 나타나는 파킨슨병인 것으로 알려졌다.
▶ 1929년 뽀빠이 탄생
“살려 줘요, 뽀빠이!”
올리브가 높고 새된 목소리로 외치면 언제 어디서든 시금치 통조림을 먹고 달려오는 뱃사람 ‘뽀빠이’. 그가 17일로 ‘77세’(2006년 기준)를 맞았다.
미키 마우스와 함께 가장 장수한 캐릭터 중 하나인 뽀빠이는 1929년 1월 17일 미국의 한 신문 연재만화 ‘골무극장’에 별 볼 일 없는 조연으로 처음 얼굴을 알렸다.
그러나 우람한 팔 근육을 자랑하던 뽀빠이는 단숨에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2년 만에 주인공으로 승격했다. 올리브도 다른 남자 친구를 버리고 뽀빠이의 연인이 됐다. 1933년에는 TV 만화영화 ‘뱃사람 뽀빠이’가 만들어졌고 1980년에는 로빈 윌리엄스가 뽀빠이를 연기한 뮤지컬 영화도 나왔다.
키가 작고 주걱턱에 애꾸라서 볼품없던 뽀빠이가 어떻게 올리브뿐 아니라 전 세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뽀빠이는 이후 만화계를 평정하게 될 ‘초(超)영웅’들의 선조 격이었다. 도덕 기준이 투철했으며 사악한 ‘브루터스’에게 공격을 받거나 나쁜 행동을 더는 참을 수 없을 때에만 힘에 의존하는 ‘정의의 사도’였다. 뽀빠이를 탄생시킨 만화가 엘지 시거가 “욕설을 내뱉고 사람들을 패주고 싶은 불만을 뽀빠이에게 맡겨 버린다”고 고백했듯, 뽀빠이는 사람들의 마음속 억눌린 분노를 대신 표현해 주는 존재였다.
툭 하면 “나는 나야. 그게 나의 전부야”라고 말하곤 했던 뽀빠이는 미국식 개인주의를 상징했고 미국의 자부심을 대변했다. 만화영화 시리즈에선 뽀빠이가 브루터스를 물리칠 때 배경음악으로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쓰이기도 했다.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난다는 설정이 들어간 까닭은 1920년대 말 한 논문에 시금치의 철분 함유량이 실제보다 10배나 많게 잘못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금치에는 칼로리를 낼 만한 영양소가 거의 없어 ‘힘’과는 상관없지만 뽀빠이 덕분에 1930년대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가 33%나 증가했다. 텍사스 크리스털 시티의 시금치 재배 농부들은 이에 감격해 마을에 뽀빠이 동상까지 세웠다.
뽀빠이는 장수 캐릭터인 만큼 ‘실버 금실’을 과시했다. 뽀빠이가 오래된 연인 올리브와 결혼한 것은 1999년의 만화영화 특별판에서였다. 변치 않은 사랑이 7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1920년 미국, 금주법 실시
1920년 1월 17일 미국에서 금주법이 실시됐다.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로 금주법에 관한 논란이 일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더욱 확산됐다. 전시에서의 곡물절약과 맥주를 제조하는 독일인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17년 미국내에서 금주법 수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하여 이날 발효하게 된 것이다.
금주법이 실시되자 한 맥주 제조업자가
맥주통을 하수구에 쏟아 버리고 있다.
금주법은 신종범죄인 밀주제조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 인물이 브루클린에서 경리로 일하던 알 카포네인데, 그는 금주법을 가장 잘 악용했으며 밀주제조로 연간 수입이 6,000만 달러로 추산될 정도의 거금을 쥐게되었다. 1929년 시카고에서 라이벌 조직 7명을 일거에 살해한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밀조, 밀매 등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갱들이 미국전역을 날뛰게 했으며, 평범했던 수백명의 남녀를 전과자로 만든 금주법은 계속 지속될 수 없었다. 사실상 1929년 경제공황으로 금주법시대는 사라지게 됐다. 1933년 금주법은 헌법수정 21조에 의해 폐지됐고, 그 후 각 주법이나 지방조례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현재는 미시시피주만이 주법에 의해 금주를 정하고 있다.
▶1920년 세계최초 라디오방송국 개국
▶1918년 고등고시 및 보통고시령 공포
▶1917년 영국, 짐머만 전문 해독
1917년 1월 17일, 영국 정보부의 암호 해독 요원이 전날 가로챈 암호를 해독했다. 독일 외무장관 짐머만이 워싱턴 주재 독일대사에게 보낸 암호였다. 전문(電文)에는 곧 독일이 펼칠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맞서 미국이 참전할 경우 멕시코에게 독일 동맹국으로 가담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 대가는 1848년 멕시코가 미국에게 잃었던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 등 전 멕시코의 땅을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을 부른 결정적인 두가지 요인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짐머만 전문 사건'이었다. 전문 사건이 터지기 전, 독일은 U보트를 이용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 등에서 연합군 측으로 보내는 보급선만 막으면 6개월 내에 승리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승리의 향방은 미국의 참전여부였다.
예정대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1917년 2월 1일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짐머만 전문에 대해 모르고 있던 미국은 전쟁 불참 입장을 고수했으나 2월 24일, 짐머만 전문이 미 국무부에 전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문의 내용을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간주했고, 3월 1일 전문의 내용을 언론에 공개해서 국민들의 참전 지지를 이끌어냈다. 한달여 뒤인 4월 2일,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결정했다.
▶1915년 미국 의회 이민법 가결
▶1914년 단성사 신축(수용인원 1000여명)
▶1911년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 출생
▶1911년 영국 인류학자 골턴 사망
▶1907년 네덜란드 작곡가 바딩스 출생
▶1906년 외부 폐지, 의정부에 외사국 설치
▶1893년 미국의 제19대 대통령 헤이스 사망
▶1893년 하와이 왕제폐지, 공화정부 수립
▶1880년 미국 슬랩스틱 희극의 아버지 마크 세넷 출생
▶1863년 영국 정치가 조지 출생
▶1834년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출생
▶1771년 미국 소설의 아버지 찰스 브라운 출생
▶1714년 영국 타자기 발명
▶1706년 벤자민 프랭클린 출생
▶1655년 강화도 해변에 진과 보 설치
▶1484년 독일의 다작(多作) 작가 조지 슈팔라틴 출생647년신라, 비담(毗曇) 등 반란자 처형 후 반란 평정
https://youtu.be/1kLUEY4fXT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